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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실격 Sep 29. 2023

먼저 팔아놓고 창업하기

사업 계획서와 창업 계획서

"이겨놓고 싸운다"


나는 이겨놓고 싸운다는 말을 군대에서 들었다. 우리는 저녁마다 잠들기 전에 이 구호를 외쳤다. 이기고 지는 건 싸움의 결과로 결정된다. 아무리 군대가 부조리하지만 어떻게 논리적 선후관계까지 뒤바꿀 수 있단 말인가. 전혀 이해가 안 갈 거 같던 말은 전역한 지 한참 지난 후에 어렴풋이 뉘앙스를 깨닫게 됐다. 고작 코딱지만 한 파티룸을 오픈하면서.


이긴 다음에 싸운다는 말은 손자병법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자세한 뜻풀이는 아래와 같다.

이런 까닭에 이기는 군대는 먼저 이겨놓고 싸움을 걸고, 지는 군대는 먼저 싸움을 건 뒤 이기려고 한다. 용병을 잘하는 이는 인성을 잘 수양하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니. 그래서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능력을 갖춘다.


사업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팔아놓고 사업 시작하기, 사업 시작하고 팔지 말고.


비즈니스 플랜 분석

비즈니스 플랜은 사업 계획을 말한다. 조직이 1년간 어떻게 회사를 운영할지 나타내는 지도다. 1년에 한 번, 보통 10월에 다음 연도를 계획한다. 먼저 높으신 분들이 큰 틀짠다. 환율, 국제적 상황, 금리 같은 지표에 근거한다. 그다음엔 영업, 마케팅이 달라붙어서 팔겠다는 예상치를 던진다. 사업 계획이 꼭 매출만 다루지는 않는다. 매출과 무관한 간접 부서는 각자의 팀 KPI를 어떻게 개발할지, 어떤 새로운 일에 도전할지, 혹은 어떻게 비용을 절감할지를 적는다. 모쪼록 모든 부서가 달라붙어 내년 농사는 어떻게 지을지 결정하는 계획표다.


사업계획 분석에서 생산기획 팀은 "그게 진짜 가능하겠어?"를 체크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1년간 만들 수 있는 약이 10개라고 하자. 그런데 영업이 12개를 팔겠다고 들고 온다. 생산기획팀 입장에선 곤란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다. 회사에선 돈 벌어오겠다는 직원에게 "그거 어려울 텐데"라고 말하 역적 된다. 어느 포용력 넓은 CEO라도 참을 수 없다.

 생산기획팀은 그 12개와 10개의 GAP을 메꾸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 인원 충원, 시설 투자, 교대 근무 확보가 가용한 무기다. 여러 계획을 시뮬레이션한다. 판다고 들고 온 숫자가 실현 가능한지를 검토한다. 목표에 도달하는 How-to를 찾는 쪽에 힘을 쏟는다. 그래서 10월이 되면 부디 현실적인 숫자를 들고 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선 기획, 후 제조

계획은 실행이 뒤따라야 그 계획이 의미를 가진다. 어찌어찌 사업계획이 완성됐다면 실제로 그 계획대로 진행되는지를 체크한다. 연간 제조하기로 목표한 약이 12개라면 1분기가 지났을 때는 2.5~3.5개 정도는 만들어졌어야 한다. 덜 만들어졌다면 생산 팀을 push 한다. 교대근무를 늘리고, 시설 투자를 검토한다. 거꾸로 생산이 너무 많이 되고 있어도 문제다. 고삐를 잡아야 한다. 만약 생산은 약속대로 2.5~3.5개를 만들었는데 영업이 4개를 팔겠다고 나서도 문제다. 영업 팀은 회장님께 "우리는 더 팔고 싶었는데 생산에서 못 만들어줘서 못 팔았어요"라고 하는 게 주요 업무다. 생산기획팀도 철저하게 디펜스를 준비해야 한다.


사업계획서의 중요성

말할 것도 없이 사업계획을 수립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목표하는 사업 계획이 없다면 "빠르고, 늦고"의 개념도 없다. 기준이 부재하다. 지금 더 만들어야 하는지, 덜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데이터도 없다. 우리가 작년보다 더 잘하고 있는지, 혹은 반성해야 하는지 채점도 불가하다.

 만약 사업 계획서가 없다면 제조하면서 계획을 수립했을 거다. 예를 들어 이번달은 A제품이 조금 잘 팔리니까 A를 더 만들고, B제품은 덜 팔리니까 덜 만들고 하는 방식으로. 그건 엄밀히 말하면 계획이 아니 반응이다. 시장에 반응만 하는 기업은 생존할 수 없다. 의사결정에 대한 주도권이 "나"가 아니라 "시장"에 있기 때문이다. 뒤꽁무니만 쫓는 꼴이다.

 

파티룸 창업 시 사업 계획

사업계획 중요성과, 생산기획 팀이 어떻게 검증하는지를 말했지만 우리는 이 절차를 파티룸 창업에 적용하지 못했다. "오픈은 실전이야"이란 옛 어른들의 격언처럼 실제로 오픈하자 당장의 일을 쳐내기 급급했다. 물론 우리도 처음에는 삼성에서 만든 사업계획서 마냥 모든 일정을 챡챡챡 그렸다. 그러나 부동산 계약을 성급하게 한 순간부터 스텝이 엉켰다.


만약 다시 시작한다면   

이겨놓고 싸우기, 계획하고 제조하기처럼, 사업을 다시 시작한다면 조금 더 천천히 부동산을 계약했을 거다. 부동산은 계약하는 순간부터 초단위로 돈이 나가는 셈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번 시간을 "팔아놓고 사업하기"에 올인했을 거다. 마치 이겨놓고 싸우는 것처럼.

"먼저 사람을 모아라, 그러면 거기에 돈이 모인다"라는 아이디어는 이미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카카오톡이 대표적인 신화다. 카카오톡은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초기에 많은 사람을 모았다. 지금은 그 유저를 대상으로 광고하고, 금융 서비스를 얹으면서 막대한 매출을 만든다. 어찌 보면 이게 꼭 "팔아놓고, 사업하기"와 같은 구조다. 일단 사람을 모으면 그 위에 계속해서 서비스를 얹을 수 있을 테니까.


우리가 카카오톡처럼 큰 어플은 만들 수 없겠지. 우리는 작은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었다. 커리어 모임, 영어 회화, 독서, 사이드잡 직장인 모임을 구상했다. 분명 모임을 기획하는 일은 오픈전부터도 미리미리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만약 우리가 가진 콘텐츠로 사람을 모을 수 있다면 공간 대여업은 식은 죽 먹기다. 공간 대여업 매출 핵심은 공간을 빌리러 찾아오는 사람에게 있다. 언제든 사람 몇 명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콘텐츠가 있다면 "어떻게 사람을 데려오지?"라는 공간 대여업의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그게 실현 가능하다면 공간은 사람 넣으면 돈으로 바꿔 나오는 공장이 된다.


여전한 숙제

커뮤니티 기획은 분명 미리미리 했어야 하고, 할 수 있던 일이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여전히 계획 중이다. 만약 누구라도 어떤 사업을 구상 중이라면 타겟 손님을 한 곳에 모아 두자. 이기고 싸우는 법의 첫 번째 스텝이다. 모으는 방법은 이미 교과서에 나와있다. 내 제품 잠재 고객이 좋아할 법한, 필요할 법한 콘텐츠를 만들면 된다.

 타겟 손님을 가급적 뾰족하고 날카롭게 지정하는 게 핵심이다. 두리뭉실한 100명 보다, 참여도 높은 10명이 더 구매력 크다. 우리도 오픈 초기에 "모두가 좋아할 법한 공간"으로 마케팅했다가 실패했다. 최근에는 브라이덜 샤워, 파티룸 이 두 가지 키워드로 셀링 포인트를 좁혔다. 그제야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콘텐츠도 날카로워야 한다. 마치 이 콘텐츠가 직장인, 사이드잡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사람을 모으고 사업을 시작하기, 먼저 팔아놓고 사업을 시작하는 것과 동의어다. 모르긴 몰라도 손자병법 저자는 파티룸을 열었어도 잘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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