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자기를 빙 둘러싼 주위의 세계가 녹아 없어져 자신으로부터 떠나가 버리고,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홀로 외롭게 서 있던 이 순간으로부터, 냉기와 절망의 이 순간으로부터 벗어나, 예전보다 자아를 더욱 단단하게 응집시킨 채, 싯다르타는 불쑥 일어났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의 마지막 전율, 탄생의 마지막 경련"이었다고 느꼈다. 이윽고 그는 다시 발걸음을 떼더니, 신속하고 성급하게 걷기 시작하였다. 이제 더 이상 집으로 가는 것도, 이제 더 이상 아버지에게 가는 것도, 이제 더 이상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 싯다르타 66p
싯다르타는 헤르만 헤세가 쓴 장편 소설이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에서"를 포함하여 총 3번째 읽는 그의 소설이다. 같은 작가의 작품을 3권쯤 읽었다는 건 그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충분조건이 된다.
200p 분량의 소설은 싯다르타의 열반으로의 여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열반은 내면의 평화를 뜻한다. 인도 최고 계급 출신인 싯다르타는 어린 날에 열반에 도달하고자 가르침을 얻기 위하여 절친한 친구인 고빈다와 함께 집을 나선다. 스승을 찾아다니던 중 싯다르타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한다는 고타마를 만난다. 그는 실로 석가모니와 가장 유사한 사람 같다. 싯다르타는 고타마에 대한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싯다르타에게는 그 손에 붙어 있는 다섯 손가락 모두의 마디마디가 가르침 그 자체인 것 같아 보였으며, 다섯 손가락 모두의 마디마디가 진리를 말해 주고, 진리를 호흡하고, 진리의 향기를 풍기고, 진리를 현란하게 빛내 주는 것 같아 보였다. 이분, 이 부처야말로 새끼손가락 놀리는 동작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진실한 분이었다" - 48p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그의 설법에 감명받는다. 이 분 밑에서 수련한다면 번뇌와 열반에 오르는 일은 어려움 없을 것 같다. 열반 1타 강사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그를 떠난다고 말한다. 고타마와 얘기 나누는 장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선생님은 정말 훌륭하지만,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르침 속에는 그 비밀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제자로 남게 된 고빈다와 싯다르타는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고빈다를 뒤로한 채 방황하면서 걸어가던 고빈다는 첫 문단인 66p를 깨닫는다. 그건 바로, 내면의 욕망에 대한 고찰이 없이는 진정한 번뇌와 해탈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후 싯다르타는 승려의 길이나, 집안으로 복귀하지 않고, 시장으로 향한다. 거기서 그는 성을 경험하고, 재물을 취하고, 권력을 누린다.
다만 이렇게만 싯다르타가 끝나게 된다면 이 소설은 향락에 빠진 승려 이야기로 그칠 터. 카말라라는 여인과 깊은 사랑에 빠져있던 싯다르타는 어느 순간 자기를 둘러싸던 세상에 멀미를 느낀다. 요즘 말로 하면 현타라고 적었겠지. 그는 도박에도 빠진다. 시장 상인들보다 더 추악해 진다. 그리고 그런 본인의 모습을 느끼자 구토를 느낀다.
수십 년간 시장과 세상에서 머물던 싯다르타는 현타를 이기지 못한 어느 날 결국 마을을 떠난다. 길고 긴 걸음 끝에 강가에 도착한다. 과거와 작별하는 오랜 걸음에 지친 그는 풀숲에서 아주 긴 단잠을 잔다. 그리고 눈을 뜨자, 거기서 싯다르타가 잠에 깰 때까지 기다리던 한 승려가 보인다. 그는 오래전 그와 갈라선 고빈다다.
고빈다는 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던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그를 단 번에 알아본다. 인사를 마친 고빈다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싯다르타는 그를 불러 세운다. 깜짝 놀란 고빈다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다닌 거냐고 묻자 싯다르타는 순례를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얻어봤지만 이는 모두 부질없는 것들이다. 이제야 나는 나를 조금 더 알 것 같다.
그러자 고빈다가 다시 묻는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 싯다르타. 지금 자네는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135p
줄거리 요약은 이 정도로만 하자. 이 소설은 모든 좋은 문학에 녹아있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소설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건 바로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싯다르타가 그토록 원한 내면의 평화와 열반에 이르는 일은 법복을 입고 승려 생활"만"을 통해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식욕, 성욕, 수면욕과 같이 인간 본연이 가지는 욕망을 거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고 그것에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선행되어 해결할 질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 싯다르타를 성장 소설로 읽을 수 있다고 믿는다. 한 존재가 성장하기 위해선 부단히 내면의 욕망에 진실하고, 그리고 그것을 탐구할 수 있어야 한다. 싯다르타가 그토록 소망하던 내면의 평화, 번뇌, 열반에 이르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방황이 전제돼야 했었다고 생각하면 적잖이 위로도 된다.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동안 소설 데미안에 등장하는 유명한 아브락사스에 관한 구절이 떠오른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란 유명한 문장은 헤르만 헤세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중성, 양면성, 균형을 상징한다. 헤르만헤세에겐 밸런스가 중요하다.
싯다르타에 대입하면 이렇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내면의 평화는, 오로지 수많은 불평화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투쟁의 여정은, 온전히 스스로만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독서 모임에서 한 번 읽었고, 이번에 연말 독서 모임에서 한 번 더 다루기로 하여 두 번 읽었다. 두 번째 읽을 때가 더 좋았다.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불안함을 지니고 산다. 막연히 "불안해도 괜찮아"라고 건네는 무책임한 위로보단 "세계란 건 원래 균형이란 게 있고, 지금 불안하면 분명히 평화도 온다"라고 말해주는 이 소설이 훨씬 위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