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증권 대체투자팀
취준을 시작하면서 자소서에서 처음 만난 문항은 성장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게으르게 살아온 삶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마치 인생 마지막에 회고록을 적는 노인처럼 "가만 보자, 내가 어떻게 살아왔더라"면서 한글 파일을 켜고 소설 한 편을 적기 시작했다.
기업은 실제로 내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가 궁금한 건 아닐 테다. 손흥민이라면 모를까 내 자서전은 인사담당자가 흥미 있을만한 구석이 없다. 성장과정 항목은 지원한 직무와, 기업에 맞춰 내 삶을 각색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회사에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에 기업과 아름다운 에피소드 한 편을 녹여내는 무리수를 두기도 한다. 삼성 전자면, 갤럭시에 대한 추억들을 회고하는 거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는 건 아니다.
특정 기업과 관련 없는 실제 나는 이렇게 성장해 왔다.
나는 1994년 2월 1일, 인천에서 태어났다.
한 달만 일찍, 또는 늦게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2월에 태어난 나는 평생에 걸쳐 빠른 년생 논란의 주인공이 된다. 그럼에도 족보가 꼬이지 않게 해 보자 학년 나이인 93년생을 주장하고 있다. 어쩔 땐 94년 1월생이 형이라 부르는 교통사고도 생긴다.
태어난 후로도 평생을 인천에서 살았다. 심지어 초등학교를 제외하고는, 모든 학적에 "인천"이 들어가는 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언제쯤 서울에서 독립해서 살 수 있을까를 궁리하며 탈인천을 꿈꾼다.
2000~2011년
평범한 초, 중, 고를 다니면서 공교육에 충실했다. 충실했다는 건 공부가 아니라 출석을 말한다. 공부는 못했다. 그래도 한 번 열심히 했던 적은 있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반 10등 안에 들면 Yepp MP3를 사준다는 공약을 걸었다. 처음으로 밤을 새워가며 공부했지만 소수점 차이로 아쉽게 11등을 했다.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이때 쓰는 말인진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16GB짜리 목에 거는 Yepp MP3를 사줬다. 체육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 흥미가 없었지만 딱 한 과목, 영어는 좋아했다. 영어 한 과목 열심히 했던 턱에 평생 동안 많은 도움이 됐다. 인생은 선택과 집중이다.
친구는 많았다. 성격도 외향적이고 사교성이 많았다. 남중, 남고를 다녔는데 거기선 축구를 잘하면 친구 만들기 쉬웠다. 이 세계는 간단하다. 패스 한 번 주고받으면 친구가 된다. 이 공식은 훗날 군대와 대학까지도 이어져서 축구로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특별할 것 없는, 축덕과, pc방 좋아하는 여느 급식 생활을 보냈다. 아, 그리고 문과를 갔다. 이때부터 내 문송의 역사가 시작됐다.
2012년
공부에 불성실했으니, 재수를 한 건 오이디푸스의 예언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재수는 자의보단 타의에 가까웠다. 분명 나랑 같이 축구하고 PC방 다녔던 친구들인데, 입시 결과를 보니 번듯한 대학을 입학했더라. 그때는 대학을 실패했다는 좌절감보단, 친구들과 멀어질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더 컸다. 인천과 노량진을 오가며 1년을 보냈다. 패기 넘치게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잠도 줄여가면서 지하철에서도 단어장을 외우며 공부하다 결국엔 몇 달 못가 체력이 동났다. 훗날 어디선가 시험에 떨어지는 전형적인 사례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2013년
재수를 끝으로 평범한 수도권 4년제 대학에 경영학과 학생으로 입학한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대학 간판과 재수 생활 동안 바뀐 어두운 성격 때문에 친구들과 거리를 뒀다. 공부는 여전히 안 하고 특별할 거 없는 1학년 생활이었지만, 한 교양수업에서 인생 멘토를 만난다. 그 수업은 외부 강사가 한 주씩 번갈아가면서 강의를 했는데, 그 날은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강의자였다. "독서법"에 대해 강의를 했었다. 듣는 내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박식하던지, 언젠간 꼭 평론가님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말 잘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다. 아무튼 그 강의에 충격을 받은 후로 1년 간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읽었다. 문학, 비문학 가리지 않고 읽었으며 인생 책인 데미안도 그때 읽었다.
2014년~2015년
군대를 입대했다. 복무하며 매일 일기를 썼다. 지금의 글쓰기 경험은 많은 부분 그때를 빚지고 있다. 처음에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생각으로, (물론 모든 일기가 그렇지만), 작성했지만 나중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듯 가상의 독자를 만들어 글을 썼다. 상병, 병장이 됐을 땐 읽은 책을 독후감으로 남겼으며 전역한 뒤엔 그 글을 모아 네이버 블로그에 포스팅했다.
2016년
복학 버프로 1학기 최고 성적을 받고, 곧바로 대 2병을 겪는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재수 때 망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사람은 쉽게 안 바뀐다. 나는 대 2병을 꽤 지독하게 겪었다. 요즘에서야 정신과 치료를 받는 거에 대한 시선이 유해졌지만, 그때는 우울증 환자라는 낙인이 우울증보다도 두려웠다. 진로 고민과 존재론적 질문 같은 답 없는 질문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그딴 거 생각할 시간에 귤이나 하나 더 먹자"했겠지만 그땐 꽤 진지했다. 근원지를 모르는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딘가라도 가면 조금 나아질 거라는 생각에 도망치듯 한국을 벗어났다.
2017년
2월부터 8월까진 아일랜드에서 어학연수를 보냈다. 어학연수는 한국을 벗어나기에 좋은 명분이 됐다. 8월부터 10월까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한인민박 스테프를 했다. 이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술도 마셨다. 10월 말에 한국에 돌아와 토익을 쳤는데 말도 안 되게 높은 점수가 나와서 곧바로 대학을 편입했다. 군대에서 글쓰기가 시작됐다면, 사진 찍기는 아일랜드 나가 있던 2017년 때부터 시작됐다.
2018년~2019년
옮긴 대학교에서 열심히 학교 다녔다. 마케팅 동아리도 하고, 축구 동아리도 2개 가입했으며 나름 과 생활, 학교 생활 열심히 했다. 편입생은 굴러들어 온 돌이라 이미 단단한 친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패스 주고받으면 친구 되는 공식은 대학에서도 변함없었다. 나름 학교 프로그램도 열심히 참여해서 대부분을 지원받아 미국도 다녀오고, 유럽도 다녀왔다.
2020년
졸업을 하고 본격적으로 백수가 됐다. 취준에 돌입하면서 자소서를 적다가, 문항에 영감을 받아 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렇다고 전업 작가가 되겠다는 자신은 없어서, 마케팅, 영업, 경영 관리, 등등 비슷비슷해 보이는 직무엔 모두 지원하며 틈틈이 이 글을 작성하고 있다.
아니, 사실 요즘엔 자소서보다 이 글에 더 집중하고 있다. (3,303자)
“필패하는 자소서”에선 자소서 문항을 제 맘대로 대답하는 형식의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진로 고민, 하고 싶은 일과 해야 되는 일 사이에서의 갈등, 부끄러움, 대인 관계 등이 키워드입니다. 기획 의도가 담겨있는 프롤로그를 첨부합니다. 팔로우를 하시면 글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무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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