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결정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뤄졌다. 2학년이 되면서 문과, 이과를 정해야 했다. 문과를 간 건 100% 수학 때문이었다. 나는 세상에 수포자란 말이 있기도 전부터 묵묵히 그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수학을 싫어하면 선택지는 문과뿐이었다. 그때 싫은 걸 참고 이과 갔다면 지금 보단 수월히 취업을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이과 전공으로 졸업한 친구들만 봐도 많이 취업 해 있더라. 문송하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나는 문과를 갔고, 그 중에서도 취업 잘해보겠다고 경영학과를 갔다. 현재의 나를 대표하는 가장 큰 타이틀은 취준생이니, 인생의 결정적 순간은 그때 이뤄졌다.
당연히도 고등학교 1학년은 인생의 결정적 선택을 책임지기엔 너무 어린 나이다. 나는 바지를 6.5로 줄여서 잘 때마다 피가 안 통해 쥐가 났고, 앞머리를 뱅으로 자르는 모지리 학생이었다. 이런 철부지에게 향후 자신의 첫 번째 커리어를 결정하는 중대한 일을 맡겨야 하다니, 몹쓸 짓이다. 17살에 문과를 결정했을 때는 10년 뒤에 카페에서 이런 투정 할 줄 몰랐겠지. 고작 행렬이 싫었을 거다.
그럼에도 다행인 건 내가 문과를 만족했다는 거다. 나는 살면서 내가 뼛속까지 문과형 인간이란 걸 깨달았다. 과학적으로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글쓰기나 책 읽기, 토론하는 거, 말하는 것 같은 문과로 대표되는 동사는 다 좋았다. 그러니 취업에 불리하다는 이유 말고는 문과를 만족했다. 갑자기 알라딘이 나타나 10년 전으로 돌려줄 테니 다시 결정하라 해도 나는 문과를 갈 거다. 바지는 7.5로 줄이겠지만.
그런데 알라딘이 실수로 7년 전으로 돌려준다면? 나는 100% 다른 전공을 선택할 거다. 고 1 때 문과를 결정 한 건 차선책이었지만, 전공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입시 원서를 쓰는 시기에 수많은 전공을 앞에 두고 깊은 고민을 가졌다. 문과는 전공 이름만 들으면 다 재밌어 보인다. 나는 마피아 게임을 잘하니 심리학과도 생각했고, 창의적인 일이 멋져 보이니 광고 홍보학과를 가 볼까도 꿈꿨다. (다들 이런 식으로 전공 고르지 않나?) 그러나 결론적으로 내가 입학한 건 경영학과였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취업 때문이었다. 문과 중에선 그나마 경영학과가 취업에 유리하단다. 그렇지만 나는 경영학과와 잘 맞지 않았다. 입학한 1학년 때도, 복학한 2학년 때도 경영학에 꾸준히 흥미를 갖지 못했다. 이럴 거면 심리학과 가서 마피아나 더 연습할 걸 그랬다.
그런데 2017년에 전공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이번엔 알라딘은 아니고, 편입을 준비하면서 였다. 편입을 준비한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전공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나는 경영학을 수학만큼 싫어했다. 그래서 전공을 바꾸고 싶었다. 1, 2학년 때 경제학 과목 몇 개를 수강했었는데, 내용도 재밌고 경영학보다 더 학문적 깊이가 있는 것 같았다. 편입 영어로 지원하는 학교는 대부분 경제학과로 지원했다.
문제는 공인 영어 전형이다. 편입학은 공인 영어와, 편입 영어 전형으로 나뉘는데, 국립대와 몇 개 학교는 공인 영어 점수와 면접을 통해 편입학이 이뤄진다.
그런데 공인 영어 전형은 동일계 전공으로 지원해야 합격에 유리하다는 거다. 동일계는 전적대와 같은 전공으로 지원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면접에서 대답도 잘하고, 교수님도 이왕이면 동일계 전공 학생을 선호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공인 영어로 지원하는 학교에는 경영학과를 썼다.
결국 확률이 더 높다는 소문은 사실이 돼서, 나는 경영학과에서 경영학과로 옮겨갔다.
지금의 나는 결국 과거에 내 선택이 만들어 낸 결과다. 그런데 나는 내 선택에 얼마나 주도적이었을까. 문과를 선택한 건, 이과가 싫어서였다. 그러니 이과를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지, 문과를 선택했다고는 할 수 없다. 경영학과를 선택한 건 취업을 위해서다. 두 번째 경영학과를 선택한 건 합격을 위해서다. 그리고 그렇게 쌓아 온 선택과 함께 나는 취업 시장에 던져졌다. 만약 그동안 내렸던 내 선택들에 주도적이지 못했다면 지금 내 삶도 타인의 시선을 눈치 보며 만들어 낸 삶이지 않을까.
내 선택의 역사는 “하고 싶은 것”보단 “해야 될 것”에 손을 들어왔다. 문과를 선택한 것도, 경영학이란 전공을 선택한 것도, 토익을 공부한 것도, 조별과제를 치러낸 것도 그렇다. 그 모든 건 마치 처음부터 내가 잘 취업하기 위한 선택들을 쌓아 온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결과가 취업 못하고 있는 지금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처음부터 조금은 "하고 싶었던 것"에 집중해 봤다면 달랐을까. 아무튼 지금보단 후회가 덜 남지 않았을까.
나는 최선의 선택을 내렸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는 내게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만 최선의 결정을 내린 셈이다. 그러니 “선택지” 그 자체를 의심해 본 적은 없다. 문과, 이과가 아니라 실업계 학교였다면. 경영학 전공이 아니라, 문학을 전공했더라면, 편입학이 아니라 자퇴를 했다면. 나는 언제나 누군가 부여한 선택지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다들 그렇게 하는 거? 사회에서 요구하는 거? 친구들이 하고 있는 거?
나는 그런 일을 마치 "해야 되는 일"쯤으로 생각했다. 취업을 준비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경영학과를 졸업한 모든 내 친구들은 다들 입사를 위해 도서관에서 인적성, NCS, 컴활, 한국사를 준비 중이고, 또 이미 그 방법으로 많이 입사 해 있다. 나는 취업이라는 내가 받은 "선택지"안에서 직무를 골랐고, 기업을 골랐고, 거기에 필요한 역량을 준비했다.
요즘에도 나는 두 개의 선택지 중에서 어떤 선택을 내릴지 고민한다. 그건 바로 "쓰고 싶은 글"과 "써야 되는 글"이다. 내가 써야 하는 글은 취업을 위한 자소서다. 쓰고 싶은 글은 지금 적고 있는 이런 글이다. 시간은 한정적이기에 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대게는 자소서의 데드라인에 따라 결정됐다. 마감이 여유 있으면 내 글을 쓰고, 얼마 남지 않았다면 자소서를 썼다.
그런데 이제는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일에 시간을 써보기로 결심했다. 그건 내 글에 온전히 집중해 보는 거다. 자소서처럼 데드라인도 정했다. 눈감고 딱 몇 달만 이 일에 집중해 보는 거다. 여태까지 나는 "해야 될 것"같은 일에 손을 들어주지 않았던가. 이번 한 번은 선택지 밖에서 골라봐도 될 것 같다. 내 이야기를 맘껏 적는 건 "경영학과 졸업생"이란 선택지 안에는 없던 항목이다.
혹시 모르지 않을까. 글쓰기를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 일이 해야 될 일이 될 수도 있을지도. 큰 성공은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일과 해야 되는 일이 합치하면 꽤 괜찮을 것 같다.
어쩌면 10년 뒤에 지금의 자소서 문항을 그대로 물어오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을 지금 시기로 대답할지도 모른다. 20년 뒤, 30년 뒤에도. 그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 문과를 선택했던 때라는 거 보단 나을 것 같다.
여러분은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한 결정적 순간을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되는 일에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내렸는가. 선택지 자체를 의심해 본 적은 있었던가. [3,369자]
“필패하는 자소서”에선 자소서 문항을 제 맘대로 대답하는 형식의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진로 고민, 하고 싶은 일과 해야 되는 일 사이에서의 갈등, 부끄러움, 대인 관계 등이 키워드입니다. 기획 의도가 담겨있는 프롤로그를 첨부합니다. 팔로우를 하시면 글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무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