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자소서를 작성하면서 "이럴 바에야 SF소설을 쓰는 게 낫겠는데"싶은 일이 많았다. 쓸수록 구라를 적절하게 섞는 법과, 같은 말을 티 안 나게 길게 쓰는 법만 늘었다. 매번 문항 앞에서 자괴감을 느끼던 어느 날, 도저히 구라와, 동어반복 스킬로도 채울 수 없는 문항을 만났다. 그건 생각보다도 간단한, "지원동기"문항이었다.
이 심플하고도, 심오한 문항 앞에서 쓸 말을 찾지 못해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말 본질적인 질문인"내가 왜 지원하고 있지?"를 고민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제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정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700자도 버거웠던 내가 그 몇 배 분량을 막힘없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 곳에 적어나갈 내 자소서는 필패할 게 분명하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역량도 없고, 인재상도 없다. 기본적으로 분량도 안 맞는다. (그리고 사실, 최선을 다해 썼을 때도 필패하긴 했었다)
기업이 채용을 위해 던진 질문으로 에세이를 만들고자 했던 이 기획 자체가 나에겐 취업 시장을 향한 소심한 복수극이다. 자소서를 쓰다가 막히면 같은 문항을 이 곳으로 가져와서 마음껏 타자를 두들기며 문항 하나하나를 복수했다. 취준 기간이 길어질수록 인내심만 잃어서, 나중엔 문항만 보고도 화가 치밀어 올라 바로 브런치로 가져왔다. 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처음엔 45분 자소서를 쓰고 15분을 필패하는 자소서를 집필했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그 두 개의 시간은 역전됐다.
내가 분노했던 그 수많은 자소서 문항은, 결국 좁디좁은 취업시장을 통과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에 불과했다. 자소서를 통과하면 그제야 인적성이라는 또 다른 중간보스를 만나게 되고, 그놈을 해치우면 그제야 나를 뽑겠다는 사람의 얼굴 정도를 볼 수 있는 면접을 갖는다. 그것도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 요즘은 AI가 면접을 치른다더라. 그러니까 만약 자소서를 술술 통과했다면 필패하는 인적성이라는 책을 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1차 관문도 통과하지 못한 덕분에 아주 많은 문항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이 자리를 빌려 내 집필 과정에 도움이 된 삼성, GS, 롯데, 한화, 외에 굴지의 대기업 및 중견기업, 중소기업 사장님들에게 감사함을 바친다. 그분들이 주신 문항이 없었다면 이런 시도도 없었을 거다. 혹시 책으로 출간돼 인세를 받으면, 귀사의 물건을 열심히 소비하는 걸로 보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