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해체시키기도 하고, 타자를 붕괴시키기도 하는 ‘에고’의 정체
최근 자기계발서나 SNS 카드뉴스, 유튜브 등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단어는 ‘자존감’과 ‘가스라이팅’일 것이다. 그런 컨텐츠를 보면 모든 대인관계상 문제의 원인은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며, 우리는 무조건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내 자존감이 충분히 높다고 판단했으나 타인과 비교했을 때는 낮을 수도 있기에, 우리는 경쟁적으로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자존감과 한 세트로 엮여서 자주 등장하는 가스라이팅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며 에고가 지나치게 높은 사람인 나르시시스트에게 당할 수 있는 신종 피해다. 이전부터 존재하던 수법이기에 엄밀히 말해 신종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정확히 명칭이 정해진 이후로 마치 피해야 할 유행병처럼 대중에게 퍼지기 시작했다. 자아, 또는 에고가 너무 낮으면 가스라이팅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또 너무 높으면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가스라이팅을 하는 가해자가 된다. 대체 에고란 게 무엇이길래 이런 작용을 하는 걸까.
에고(ego). 한국어로는 ‘자아’라고도 한다. 사전적 정의로는, 대상이 되는 외부 세계와 구별되는 인식의 주체다. 나를 둘러싼 세상의 양상이 변화해도 동일성을 유지한 상태로, 작용ㆍ반응ㆍ체험ㆍ사고ㆍ의욕의 작용을 하는 의식의 통일체를 의미한다. 자아는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며, 나를 타자와 구별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건강하게 작용하면, ‘나’라는 세계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두께로 성을 쌓아주며, 타인의 작은 공격에 의해 그 성이 무너지지 않은 채로 타인과 교류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이 성이 이상한 방식으로 쌓아졌을 때, ‘나’는 해체되기도, 남을 해체시키기도 한다.
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 속 엘리너와 정유정의 ‘완전한 행복’의 유나는 둘 다 서로 양상은 다르나 앞서 말한 ‘이상한 방식으로 쌓인 자아’를 가진 인물들이다. ‘힐 하우스의 유령’의 서술은 대체로 엘리너의 시선을 통해 전개되므로, 독자들은 엘리너의 관점을 통해 주변 인물들과 힐 하우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접한다. 하지만 금세 독자들은 서술자로서 엘리너가 신뢰할 수 없는 인물임을 깨닫는다. 시어도라에 대해 극단적으로 애증의 감정을 품거나, 특별한 이유 없이 루크나 박사의 의도를 의심한다. 그녀에게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모두 자신을 공격하려는 것처럼 여겨지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시어도라를 공격해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는다.
"언젠가 우리 중 하나가 저 애의 머리를 박살내면 제대로 울부짖겠지. 그게 나는 아니어야 할 텐데.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아. 시어도라 본인이 그럴 거야."
p. 236, 「힐하우스의 유령」
어려서부터 타인과의 교류에서 배제된, 고립된 삶을 살아온 엘리너는 정상적인 방식으로 외부 세계와 교류해 본 경험이 없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의 수발을 들며 본인의 자아가 최소한도로 축소된 삶을 살아야 했고, 언니 부부에게 얹혀 지낼 때 그들은 본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엘리너를 조종하려고만 했다. 따라서 힐 하우스 내부에서 시어도라나 루크, 박사와 같은 인물과 엘리너가 관계 맺는 방식에는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다. 엘리너는 유년기에 타인과의 직접적 교류를 통해 키워내지 못한 자신의 자아를, 그 빈 공간을 몽상과 이상을 통해 채워나간다. 시어도라에게 자신이 도시의 작은 아파트에서 산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나, 힐 하우스 안에서 다른 세 사람과 ‘흉내낸’ 만들어진 가족애를 진짜인 것처럼 믿는 서술 등에 그런 부분이 드러난다. 이렇게 아슬아슬한 방식으로 형성된 엘리너의 세계는,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와 현실간의 괴리를 스스로 깨닫는 순간 붕괴된다.
엘리너는 깔깔 웃었다. 그리고는 시어도라에게 말했다.
"나는 아파트가 없어. 지어낸 거야. 언니의 아기방에 간이침대를 놓고 자지. 집이라고는 없어. 언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언니 차를 훔쳤거든."
p. 357, 「힐하우스의 유령」
한편, ‘완전한 행복’의 유나는 철저한 의도와 목적에 따라 자신의 세계를 견고하게 쌓아 나가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행복은 좋은 것들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행의 가능성이 모두 소거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한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방해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있다면 설사 그것이 본인과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소거’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외부 환경과 타자는 단지 본인의 견고하고, 절대 침해 받지 않을 에고를 더욱 완벽하게 만드는 도구에 불과하다. 에고가 무서울 만큼 높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욕구를 채워도 채워도 중심이 텅 빈 것처럼 만족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스트이며, 본인이 원하는 것을 이뤄나가는 데 있어 상황 조작을 통해 연인과 배우자들, 주변인의 판단력을 완전히 뺏어 간다는 점에서 가스라이팅의 귀재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그렇게 무자비한 인물이 된 이유 또한, 엘리너와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 고립의 경험이라는 부분이다.
그땐 몰랐다. 왜 자신이 동생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벌벌 떨고 있는지. 이제 와 추측건대,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자신을 향한 유나의 감정이 증오라는 것을.
유나는 가위를 칼처럼 틀어쥐며 대꾸했다.
"네가 내 걸 다 훔쳐갔으니까. 엄마, 아빠, 우리 집까지 독차지했잖아."
p. 159, 「완전한 행복」
‘결함도 결핍도 없는 완전성’을 행복으로 정의 내리는 유나는 어린시절 고립된 공간에서 부모님 및 자매인 재인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어머니의 병세 악화와 아버지의 사업 시작으로 인해 부부는 두 자매를 모두 돌볼 여력이 없었고, 그리하여 유나는 우혜리라는 시골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자라게 된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떨어져 열악한 시골집에서 살면서 유나는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안락한 집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는 ‘정상 가족’의 삶이 거세된 탓을 모두 언니인 재인에게 돌린다. 가해자가 상정된 상태로 결핍된 삶을 견뎌내면서 유나는 재인이 자신에게서 뺏어갔다고 믿는 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 어떤 가혹한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난다. 재인의 연인을 뺏어서 결혼하는 데서 출발하여, 자신이 정의하는 완전한 가족에 부합하도록 딸인 지유와 재혼한 남편 차은호를 가스라이팅하여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만든다. 그러한 과정에서 유나를 둘러싼, 유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쌓고자 하는 완전무결한 ‘해피’엔딩을 위해 본연의 모습을 잃고 소모적으로 사용되며 그 이용가치가 사라지는 순간 죽임을 당하기까지 한다.
‘완전한 행복’의 서술적 특징은, 가해자인 유나의 관점은 철저히 배제한 채 그로부터 피해나 영향을 받는 주변 인물들의 시각으로만 기술한다는 점이다. 유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점에서 ‘힐 하우스의 유령’에 비해 서술의 깊이가 한정적이고, 가해와 피해의 구도가 명확한 사건을 다루는 소설이 이러한 시점을 취해도 되느냐는 당위적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을 취했기에 오히려 독자 입장에서는 조금 더 현실적인 관점으로 인물들을 바라볼 수 있다. 사회면에서 수많은 종류의 사이코패스나 나르시시스트가 가해자인 사건들을 접하면서, 우리는 ‘대체 저 사람은 어떻게 하다가 저렇게까지 되었을까’ , ‘저 사람을 괴물로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성장기에 그들이 겪은, 무엇인가가 결핍된 채로 살아야 했던 경험이나 자아가 학대당했던 경험이 그를 그렇게 만든 요인이라는 추측을 하곤 한다.
그녀의 생각은 더 근본적인 문제로 뻗어갔다. 유나는 왜 이런 일을 저지를까, 라는 주제로.
타인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건 행동의 의미를 스스로 설명해내는 일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녀는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유나를 잘 안다고 자부해왔으나, 막상 까보니 착각이었다. 안다고 여겼던 건 유나가 아니었다. 유나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었다. 그녀는 본인에게 가닿지 않을 질문을 하릴없이 되풀이했다. 신유나, 대체 너는 누구냐고.
p. 436~437, 「완전한 행복」
물론 그들이 그런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가해 행위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행위는 추후 같은 양상의 범죄자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고자, 또는 내가 그런 행위의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함이 아닐까. 이러한 관점에서, 유나의 속내를 속속들이 드러내기보다 주변 인물의 관찰에 의해 그녀의 조각을 맞춰가며 ‘과연 그녀는 어쩌다 신유나가 되었을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려는 ‘완전한 행복’의 서술 방식은, 안온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지나치게 안전하면서도 또한 현실적이다.
나르시시즘의 발현, 또는 건강하지 못한 에고의 표출은 상대적인 것이다. 누군가에게 나는 가스라이팅의 피해자였으나, 또 다른 이에게 나는 가해자일 수도 있다. 앞서 나를 지킬 수 있도록 에고의 성이 정상적인 방식으로 쌓이지 않으면 그것은 나 또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파괴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과연 그 ‘정상성’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충분히 건강하게 살아왔고, 두터운 자존감으로 나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을 무너뜨릴 상대는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모든 것을 방어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자존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렇다면, 우리는 끝없이 ‘남보다 더’ 두터운 자존감을 갖기 위해, 더 건강한 에고를 쌓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가. 남에게 당하지 않아야 하지만, 또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는 않을 정도로 에고를 쌓는다는 것. 과연 그런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결국 해답은 진부하지만 외부 세계와의 소통, 그리고 타자로부터 이해 받는 경험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 고립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엘리너나 신유나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그들이 한 명이라도 터놓고 이야기할 대상이 있었다면. 또는 그들의 결핍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두 소설의 결말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애주기가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이미 지어진 성이라 할지라도 더 단단해질 수도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나의 성과 타인의 성이 함께 견고할 수 있도록 지키는 것은 결국은 소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