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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작가 Oct 06. 2020

내가 더 예뻤을 때

그때가 꼭 그립다는 건 아니지만

명절이 그저 휴일이었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그해 추석엔 연휴 앞뒤로 며칠 붙여서 휴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긴 연휴였다. 명절 내내 그냥 집에서 TV나 보며 쉴 새 없이 먹어대다가 부은 건지, 살이 찐 건지 모를 상태로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 진리다. 다른 건 없었다.


미리 계획한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행지를 고를 만한 여유가 없었다. 거기가 어디든 시간만 맞으면 바로 떠날 수 있는 곳이면 됐다. 준비할 시간이 없어 패키지 상품 중에 골랐다. 그렇게 선택한 곳은 당시 한창 뜨고 있던 캄보디아와 태국을 묶은 여행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앙코르와트를 이렇게 보는구나. 스스로 헛웃음이 날 정도로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그때는 목적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떠나는 것이 중요했을 뿐.


패키지여행의 특성상 여행 구성원들은 노부부부터 아이들이 있는 가족, 또는 부부인지 불륜 인지 뭔가 수상한 커플까지 다양했다. 또 하나 특이한 건 혼자 여행을 온 사람이 무려 7명이나 되었다는 점이다. 가이드는 1년에 두 번, 설과 추석 연휴 여행 패키지에는 솔로들이 많다고 했다. 솔로에겐 이 긴 휴일이 어쩌면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었을까. 일상과 맞닥뜨리지 않으려는 듯 그들은, 그리고 나는 설렘보다 심드렁한 얼굴로 거기에 섞여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태국에 순간 이동된 나는 버스에 실려 낯 모르는 사람들과 어색하게 눈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뒷자리를 차지한 채 이국의 풍경을 건성건성 보았다. 어쩌면 혼자 왔다는 동질감에 금방 친해질 것도 같았지만 나는 외로워서 온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딱히 앙코르와트가 궁금했던 것도 아니고, 다만 시간이 맞아서 떠나온 것뿐이니 맥주나 홀짝이며 이국을 느끼면 충분했다. 패키지여행의 빡빡한 일정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실수였다면 실수였지만 말이다. 


당시는 캄보디아 직행이 없을 때여서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에서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까지 6~7시간 동안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했다. 그것도 옛날 마을버스 같은 차량에서 직각으로 앉아 가야 하는 꽤 힘든 일정이었다. 시엠립에 도착해서는 너무 가난한 이 나라에 놀라고, 앙코르와트 때문에 난개발이었던 복잡한 시내와 어울리지 않는 럭셔리 호텔에 잠깐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나는 지금 어디에 온 거지?


최근에 지어진 럭셔리 호텔이라고 광고를 하더니만 호텔은 아직 공사 중인 것 같았다. 그래도 기분은 내고 싶어서 물도 채워지지 않은 수영장 선베드에 누웠다. 그러고 보니 캄보디아에 도착만 했는데 벌써 이틀이 지났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일은 정말로 그 앙코르와트도 볼 것이다. 그럼 이제 돌아가야 하는구나.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을 보니 다른 나라에 오긴 온 것 같고 이제 막 도착했는데 돌아갈 생각에 벌써 우울해진 것 같은 복잡 미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게 호텔 직원은 시키지도 않은 맥주를 선심 쓰듯 가져다주며 현지 물가와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받았다. 


그래도 사실은 좋았다. 이 기분 때문에 두서없는 여행을 떠났던 건 아닐까. 엄마는 전을 부치며 그나마 도움이 되는 다 큰딸이 명절에 집을 나갔다고 투덜거리겠지만 내심 나를 기특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집에 돌아가 사진이라도 주르륵 올리면 부럽다고 댓글을 다는 친구들 덕분에 잠시나마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맥주를 홀짝이며 혼자 웃는데 건너편에 혼자 누운 그림자가 얼핏 보인다. 조명 상태도 좋지 않아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당신도 나처럼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떠나온 사람이군요.


해가 뜨기 전 앙코르와트를 보아야 한다기에 새벽에 일어나 드넓은 유적지를 보며 조금은 감탄을 했고 조금은 더워했으며 또 나머지는 아쉬워하며 시간을 보냈다. 가이드는 빡빡한 일정으로 우리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막판 해가 지기 시작하자 프놈바켕에서는 꼭 일몰을 봐야 한다며 등산까지 시켰다. 어쨌든 네발로 기어올라 기진맥진하며 정상에 올라 일몰을 보는 것으로 여행 일정을 마쳤다. 여기에서 볼 만하다는 건 다 본 셈이었으므로 패키지여행의 소임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명절이 끝나고 놀다 왔으면서도 이상하게 피곤해 보이는 남자들이 소화도 덜 된 얼굴로 나타나고, 밤샘과 야근을 계속한 것처럼 명절 업무를 마친 여자들이 차라리 홀가분하게 출근했다.


여행을 마친 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슬쩍 내 자리로 돌아왔다. 

별거 없는 여행이었지만 때때로 그날의 내가 생각난다. 호텔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이국의 하늘을 바라보던 나, 프놈바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몰을 보던 나.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예뻤을 것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지금의 나는 업무의 연장선 같은 명절을 보내야 할지라도 ‘그땐 그랬지’의 기억으로 조금은 견딜 수 있을 테니까. 



*위 글은 <2W 매거진 3호 우리의 명절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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