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좀 살아보겠다니까요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상경하여 자그마치 10년을 서울에 살았다. 지방에서 나고 자라 고등학교까지 나오면서는 서울을 크게 선망하지는 않았다. 다만, '당연히 대학교는 서울로 가야지'라는 전제가 항상 깔려있었던 것 같다. 그 전제에 대한 의심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직업과 인프라, 문화생활, 그리고 길 가다가 운명의 사랑을 마주칠 확률까지도 전부 몰려있는 곳. 젊은 사람들이 그토록 서울로 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기회는 서울에 집중되어 있잖나. 서울에서 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더욱 서울에서 살고 싶었다. 가끔씩 고향에 내려가면 도태되고 있다는 초조함까지도 밀려왔다.
우리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서 그 사람의 부의 수준을 대략적으로나마 가늠할 수 있다. '강남 살아요'라는 말의 어감에는 그 워딩을 초월한 뭔가가 있다. 몸담고 있던 회사에서 각종 관계사 임원들에게 명절 선물을 보낼 때 주소록 검토하는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주로 임원들의 주소지가 서초구, 용산구, 강남구에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역시는 역시구나, 싶었다. 그냥 어렴풋이 알던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까 더 실감하게 되었는지도. 이 외에도, 당시 회사에서 팀장님께서 아이스 브레이킹용으로 다소 사적인 질문을 던지신 적이 있다.
우리 팀에 집 있는 사람이 몇 명이지?
6명 중에 나랑 팀장님만 빼고 회사 근처에 집이 있으셨다. 다들 결혼하시면서 하나씩 장만하셨던건데, 나는 사회초년생이었으니까 그렇다치고 그 때의 팀장님 얼굴을 스치던 표정은 뭐랄까, 좀 씁쓸했던 것 같다.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가 자신이 현재 살고있는 반포 아크로 리버파크를 강조하며 "부모님이 나중에 물려주신대요"라고 어필하던 말, 대학 선배가 부모님 퇴직 연금까지 끌어서 강남쪽에 작은 아파트를 샀다는 소식, "야, 걔 알고보니까 성수동 ㅇㅇ 아파트 산대, 그 연예인 사는데 있잖아", "그 오빠 타워팰리스 산대", 그런 말들에 자잘하고 꾸준하게 노출되며 집은 부의 절대적인 척도라는 생각은 확신이 되어갔다. 그런 선망어린 말들 사이에서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관념은 아주 자연스럽고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형성되어갔다.
대학생 때 6평 남짓한 빌라에서 자취를 했다. 대학교 기숙사를 살다가 '그래도 나 혼자서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호기심과 욕심에 시작한 자취였다. 무례한 집주인에게 지독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장마철에는 곰팡이가 피고 천장에서 물이 새서 모든 옷을 다시 세탁해야 했고, 가끔씩 바퀴벌레와 돈벌레가 출몰하는 방이었다. 지금 회상해보니 그런 곳에 어떻게 살았나 싶은데, 나의 첫 자취는 즐거운 기억으로 가득했다. 허접하지만 직접 원하는 요리를 해먹을 수 있는 조리공간, 내 방 문 바로 앞까지 배달되는 택배, 룸메 눈치보지 않고 노래를 틀어놓을 수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지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통화, 공용공간에 내려가지 않고도 방 안에서 한 방에 해결 가능한 빨래와 건조, 통금시간 없이 원하는 시간까지 친구들을 만나다가 맘 편히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모두 나를 행복하게 했다. 자취를 기점으로 친구들이랑 급격히 친해졌다. 진짜 추억은 새벽 1시 이후에 형성되는 나이였다.
학교를 따라 서울에 올라왔고, 그러면서 형성된 친구관계와 인프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서울에 계속 남아있고 싶었다. 지방러가 서울에서 살기 위해서는 내 몸 하나 담을 공간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취직을 하면서 저렴한 값에 벌레가 나오지 않는 깔끔한 원룸을 구했다. '1년만 살고 이사하겠지'라는 생각으로 계약했던 그 집은, 계속된 계약 연장 끝에 4년이라는 시간을 나와 함께 했다. 아파트값이 한참 폭등해서 광교 신도시 청약 가격이 10억을 육박했을 때,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와 아파텔을 한참 알아보았다. 아파텔은 사지 말라고 말리던 부모님의 말씀에도 어떤 식으로든 서울에 발 한 쪽이라도 담그고 있어야 될 것 같다는 초조함이 더 컸다. 물론 이런 노력은 연애의 종료로 무산되었다.
집과 관련된 초조함은 이제 내재화되어, 이직 후에도 계속해서 아파트 강의를 들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무조건 배워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혼자 돈이나 모으면서 집이나 사자는 심산이었다. 스터디도 참가했다. 연령대는 20대부터 60대까지 정말 다양했다. 궂은 날씨에도 비를 맞아가며 잠실에 있는 아파트들 임장을 다녔다. 입지와 가격, 저평가된 지역을 보는 안목을 키우는 목적이었다. 마냥 친구들과 신나게 놀러다니던 잠실 롯데백화점과 석촌호수쪽의 아파트 가격이 20억, 30억을 육박하는 것을 확인하니 나도 모르게 우울증이 왔다. 새로운 회사 일에 적응하는 것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는데, 눈 앞에 있는 현실을 보다보니 멘탈 관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서울에서 좀 살고 싶다는 마음은 자꾸만 큰 욕심처럼 보였다.
이쯤되면 아마 중독된게 아닌가 싶다. 도시의 소음, 매연, 담배 냄새와 술 취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리던 대로변 오피스텔에서는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묘한 위로를 받았다. 옆집, 앞집 사람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어딘가에서 상경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왠지 모를 소속감을 안겨주었다. 도시의 익명성은 어딘가 안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택배 수령인 이름을 바꿔서 지정해놓고, 같은 엘레베이터를 타더라도 수많은 호실 중에 내가 살고있는 호실이 노출되지 않는다는 안도감. 유현준 건축학 교수는 서울에 카페가 그렇게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좁아터진 방에서 나와 사람을 만나고 공부나 할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카페밖에 없어서, 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서로 대화는 하지 않더라도 카페 옆자리에 앉아 각자 할 일을 하다보면 느껴지는 묘한 연결감이 인구 많은 도시에 사는 매력 중 하나인 듯하다.
막상 혼자 방에 있으면 뭘 열심히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고 다니거나 하지는 않았다. 가끔 한강변에 운동을 하러 나가거나, 흥미로운 취미 클래스가 있으면 들으러가는 정도. 하지만 그냥 손만 뻗으면 도처에 기회가 널려있다는 기분이 나를 안심시켜줬던 것 같다. 삶의 질과 비용 측면에서 따지면 사실 지방만큼 살기 편한데도 없다. 그럼에도 서울은 그냥, 마음 속에 언젠간 내 집 하나 갖고 살고싶은 곳이 되어버린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