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을 원하는 건 나약한 게 아니야
타국으로 여행을 길게 오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낯선 땅에서도 혼자 힘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마음속에 유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막상 유학을 갔을 때 내가 연고 하나 없는 땅에서 잘 뿌리내릴 수 있을지가 영어 점수보다도 더 걱정되었다. 대학생 시절 아무 걱정도 의심도 없이 떠났던 교환학생 프로그램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기에 예행연습을 해보고 싶었나 보다. 꼭 유학이 아니더라도, 숨 막힌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다른 나라에 혼자 가서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태어나는 곳은 내가 정할 수 없지만, 앞으로 살아갈 곳은 내가 정할 수 있을 거라는 의지도 한몫했다.
그러기 위해 독립적인 마음가짐은 필수인 듯 보였다.
생각해 보면 항상 독립성이라는 개념에 집착해 왔다. 연애의 영향이 크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마음은 너덜너덜해졌고, 누군가를 100% 믿고 기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조금씩 지배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립적인 성향은 결국 관계에도 좋다는 생각이 있었다.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라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뭣도 모르고 했던 첫 연애에서 상대방은 재고 따지는 것 없이 나에게 많은 것을 주는 사람이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도 없던 그런 연애. 서로 결혼에 대한 생각이 달라 3년의 연애 끝에 이별을 했지만 정서적인 지지부터 일상적인 조언까지 모든 것이 그 사람에게 의지해있던 상태였던지라, 이별 후 나의 일상은 그야말로 엉망이 되었다. 매일같이 술을 먹고 새벽 늦게 방에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졸업 학기 즈음 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후로 다짐했다. 절대로 내 모든 걸 상대방에게 내맡기지 않겠다고. 연애 중에도 각자의 영역과 일상을 유지하는 건 중요하지만, 나는 그걸 좀 잘못된 방식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이후로 가볍거나 깊거나 짧거나 긴 연애를 반복하며 나에게 반복되는 패턴을 발견했다. '덜 주고 덜 받기'였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독립적이야'라는 허상에 갇혀 살았다. 남자친구에게 밤늦게 집에 데려다 달라는 부탁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다. 상대방도 일하고 와서 피곤할 테니까. 이사를 하는 날에도 침대 분해부터 대형폐기물 내려놓는 것까지 모두 내 힘으로 했고, 도와주겠다는 연인의 제안도 극구 만류했다. 혹시나 다시 나 혼자가 되더라도 내 인생의 중요한 이벤트는 내 힘으로 했다는 기억을 조금은 절박하게 만들어나갔다. 그런 행동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독립적인 여자친구는 처음 사귀어보는데 편하고 좋다'는 반응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진정한 독립성이 아닌, 관심받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감추려는 발악 정도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봐주는 사람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내 안에 크게 고장 난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런 패턴은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반복되었다. 정서적 지지를 받기 어려우니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나에게도 그런 지지를 요구하지 마세요, 버겁습니다. 내가 몸이 아프더라도 성인이니까 혼자 배달음식 시켜 먹어가면서 나아볼게요, 그러니까 아프시더라도 나한테 너무 기대려 하지 마세요. 어리광을 부리는 건 곧 약하다는 말이고, 가족을 걱정시키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 잡혀 있어서인지 가족에게 기대거나 티 내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족과 어떤 상의도 하지 않고 이사를 하고, 직장을 옮기고, 그렇게 인생을 이어나갔다. 이런 게 독립성인줄 알았다.
그렇게 2023년 7월, 비 오는 새벽 도착한 발리에서 나는 많이 아팠다. 돈을 아끼려고 가장 저렴한 호스텔을 찾아 들어갔는데 첫날부터 컨디션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여행자보험이 있었지만 병원을 갈 엄두는 나지 않았고, 내 곁에 있는 건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세계 각국에서 온 낯선 외국인들뿐이었다. 이런 걸 실험해보고 싶어서 온 건가, 정말 기댈 곳 아무 데도 없는 낯선 땅에서 갑작스러운 상황을 만났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어서?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들은 '오늘 일정 있냐', '계획 없으면 우리랑 같이 나가서 놀자'하면서 나를 침대 밖으로 끌어내주었다.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꾸역꾸역 하루 시간을 같이 보내고 밤에 숙소에 돌아와 아파서 끙끙대는 나를 보고, 약을 챙겨주고, 물도 떠다 주고, 몸은 좀 괜찮냐고 자신들의 여행이 끝날 때까지 물어와 준 인도 친구들의 관심이 나를 참 울컥하게 만들었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따뜻하게 챙겨주나, 싶었다.
독립적이고 싶었던 마음 한가운데에는 '나는 별 거 아닌 존재'라는 생각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남들이 나를 챙기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했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으니, 내 힘으로 다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마음. 나는 중요하지 않은 존재니까 남들 귀찮게 하지 말고 혼자서 어떻게 살아나가보자는 마음. 내가 힘들더라도 남들도 다 똑같이 힘들 테니까 최대한 내색하지 말고 씩씩하게 살아보자는 마음. 겉으로 보기에 독립적인 것 같아 보이고, 표면적으로 나를 아는 사람들의 '되게 독립적이시네요'라는 말들은 이게 옳은 방향이라는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갖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의 외로움은 점점 더 곪아터지고 있었나 보다.
독립적인 것은 강한 것이고, 애정을 원하는 것은 약한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불행중독> p.94
'애정을 원하는 것은 약한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 왔다. 연애를 할 때도 애정을 더 원하는 쪽은 을이 된다고 어렴풋이 학습한 것 같다. 그래서 깊은 애정과 관심을 원하면서도 겉으로는 '네가 있든 없는 나는 잘 살 수 있어'라며 독립적인 척을 했나 보다. 그런 마음으로 연애를 하니 퍼즐 조각 하나가 빠진 느낌이 안들 수가 없다. 진심으로 원한 것은 깊게 연결된 서로 믿을 수 있는 관계였는데 그걸 외면했으니. 상대방에게 부담이나 짐이 되고 싶지 않아 도움을 구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서로를 더 외롭게 만든다.
이제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알았다. 나는 뭐든 스스로 힘으로 척척하는 사람이나 그런 친구들로 둘러싸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서로 얼마든지 물리적, 정서적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고 마음을 터놓고 어려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여유와 믿음을 가진 관계를 원한다. '그것도 모르냐' 라던지, '원래 인간은 다 외로운 거다' 하면서 두루뭉술하고도 바쁘게 대화를 종료하는, 서로에게 짐이 될까 봐 눈치를 보는 사이가 아니라, 기꺼이 서로의 짐을 짊어지고 함께 고된 길을 걸어가 줄 동반자를 원한다. 내가 이만큼 줬으니, 너도 이만큼만 줘도 돼 라며 선을 긋는 사이가 아닌 100만큼 받고 200만큼 줘도 행복감으로 가득 찬 사이를 원한다.
사회적 성취 욕구도 결국 사랑받고 존경받고 싶은 욕구에서 시작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가 이렇게 좋은 회사에 들어왔고, 이 정도를 벌고, 이런 옷을 입고 다니면 더 사랑받을 수 있겠지? 나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런데 인과관계가 반대가 됐다고 해야 하나, 사회적 성취를 우선시하다 보니 좋아하는 사람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줄어들었고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연락을 받을 마음의 여유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세계 17개국을 대상으로 실행된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요소들>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이 '가족'을 1위로 꼽은 반면, 한국만이 '물질적 풍요'를 1위로 꼽았다. 다른 이유들이 있겠지만, 물질적 풍요를 통해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인 이유가 크다. 결론적으로는 '가족'이라는 가치가 우선이면서 그 수단인 물질을 우선시하는 문화가 깊게 자리 잡은 것이다. 이제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을 먼저 앞에 두면서 살아가고 싶다. 사랑받고 싶으면 그냥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련다.
발리 현지인에게 당신들은 왜 그렇게 행복해 보이냐고 그 이유를 물었다. Irwan이라는 운전기사가 답했다.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부모님은 저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얼마를 버는지 물으신 적이 없어요. 그저 제가 집에 왔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하시고 반겨주시죠. 친구들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예요. 한 친구가 '나 요즘 돈을 잘 못 벌어서 너네랑 못 놀아'라고 하면 당장 그 친구 집에 쳐들어갈 겁니다. '돈이 무슨 상관이냐, 내게 돈이 있으니 잔말 말고 나와라' 그저 서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뿐이에요. 아이폰 13이 나오든, 14가 나오든 무슨 상관입니까. 저에게 잘 작동하는 핸드폰이 있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있는데 뭘 더 바라겠나요."
마음이 울컥해지는 답변이었다. 발리 하늘에는 유독 아주아주 높이 떠있는 거대한 연이 엄청 많이 보이는데, 그 이유를 물으니 위의 답변과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연이 왜 그렇게 큰지 궁금하시죠? 종교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저렇게 큰 연은 혼자 만들기도 어렵고, 혼자서 날리기도 어렵습니다. 최소한 2-3명의 사람들이 필요하죠. 여러 명이 모여 같이 연을 만들고, 함께 연을 날리며 놀 수 있기 때문에 여기 사람들은 연 날리기를 매우 즐겨합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상관없어요. 저도 지금까지도 연을 자주 날리며 놀거든요."
아, 그래서 하늘에 연이 그렇게 많았구나.
어느 나라의 방식이 절대적으로 옳다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나라에도 비합리적인 장례문화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타국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행복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 자신감의 원천을 한 번 들여다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대단한 골프장이나 멋진 VR 기계 같은 게 없더라도 연 하나만으로 함께 충분히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이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