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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게 Aug 14. 2023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단순한 삶(Simple Life), 그저 존재하는 법을 회복하는 시간

| Human-Doing의 일상




퇴사 후 맘 편히 쉬지 못하고 계속 일을 벌이고 있던 나를 보고 친구가 말했다.



너를 보고 있으면 Human Doing 같아, Human Being 이 아니라.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던가. 뭐라도 안 하고 있으면 불안하고, 쓸모없는 인간이 될 것 같고, 뭐라도 배우거나, 돈을 벌거나, 콘텐츠를 시청하거나, 의견을 내거나 해야 할 것 같다. 그러지 않으면 빠르게 도태되거나 잊힐 것 같이 불안하다.


최근까지 회사를 다니던 나의 하루는 이러했다. 눈을 뜨고 잠에서 깨어 간단히 뉴스를 읽는다. 또 다른 비극적인 사건들을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개탄하지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금방 잊어버린다. 출근하는 길에는 팟캐스트를 듣는다. 시사상식이나 경제뉴스, 부동산 관련 뉴스를 들으면서 퇴근하면 더 열심히 공부하기로 다짐한다. 회사에 도착한다. 밤 사이 쌓인 이메일과 부재중 전화를 처리한다. 숨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호흡은 얕아지고, 시의성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심장은 빠르게 뛴다. 벌써 점심시간이다. 짬 내서 주식창을 열어본다. 존버는 승리한다고 했다. 또다시 일하고 나니 밤 9시다. 집에 도착해서 홈트도 하고 책도 몇 장 읽다가 피곤함에 절어 일찍 숙면을 취하기로 한다. 다음 날도 똑같이 펼쳐진다. 괜찮아, 이렇게 20년만 더 하면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그렇게 그저 존재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나약하고, 나태하고, 이기적이며, 대책 없고, 책임감 없거나 돈이 많을 거라는 시선들에 굴복했다. 그러니까 사회에서 멀쩡한 성인으로 인정받으려면 뭐라도 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바쁨이 미덕이 된 사회에서 어찌어찌 잘 적응해서 살아가는 듯했다.




| Human-Doing 말고 Human-Being 은 어때


발리에서 Human Being이 되는 법을 다시 배울 수 있었다. 꼭 발리까지 와야만 했냐고 묻는다면, 발리가 아니더라도 내가 기존에 살던 환경에서 완전히 벗어날 필요는 있었다. 아무래도 익숙한 환경에 있다 보면 몸도 마음도 익숙함을 좇아갈 것이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삶에 적응하고 나니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새벽같이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 없이도 햇빛을 맞으며 이른 아침에 일어난다. 동시에 아침마다 느껴지던 긴장감과 불쾌한 심장박동이 사라졌다. 잠들어 있는 몸을 풀기 위해 세수만 하고 요가원으로 향한다. 아무리 어려운 동작을 해도 그저 재미있기만 하다. 땀으로 샤워를 하며 온몸의 근육을 깨우고 나면 몸이 땅과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내가 몸에 짝 달라붙는 요가복을 입고 다니든, 어제 입었던 옷을 또 입고 다니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을 지나 식당에 들어가 몸에 좋고 저렴한 스무디볼을 먹는다.


어떠한 판단도 평가도 없는 공간에서 여유를 갖고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창문 없이 뻥 뚫린 아무 카페에 들어가 보고 싶던 다큐멘터리, 읽고 싶던 책도 실컷 읽으며 인생에 대한 생각을 재정비한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쉽게 대화를 시작하고, 그들의 말을 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낯선 이와 눈을 마주치면 서로 씩 미소를 날린다. 혼자 있어도 웃음을 짓고 콧노래를 부르는 날들이 많아진다. 미래가 더 이상 걱정되지 않고, 그저 모든 게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불안감의 파도에 잠겨 허우적거릴 당시에는 언젠가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발리에서의 삶이 한 달을 넘어가니 비로소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한 기분이 든다. 


요가 자세 중 Happy Baby라는 자세가 있다. 척추랑 등 마사지에 도움이 되는 자세인데, 발리의 요가 강사들이 이 자세를 시킬 때면 꼭 하는 말이 있다. 


아이가 된 것처럼 즐거움을 느껴보세요. 아기 때는 자기 발가락만 봐도 재밌어하잖아요.

Happy Baby 자세


몸에 미치는 영향보다도, 이 자세가 갖고 있는 의미가 참 좋았다. 아기 때처럼 자신의 몸과 이 세상의 경이로움을 하나하나 느끼고 감사하는 것, 일상 속에서도 그런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다.




| 진정한 휴식의 의미


여행을 갔을 때 서양 사람들이 호텔 수영장에 누워 햇빛을 맞으며 책을 읽고 있는 걸 보면, '왜 여행지까지 와서 관광을 안 하고 호텔에만 있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당시 나에게 제대로 된 여행이란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지역을 돌아봐야 하고, 최대한 모든 뮤지엄과 건축물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파리에 갔으면 에펠탑은 봐야지, 몽생미셸은 가봐야지, 디즈니랜드는 가야지" 그런 말들에 지배당했다. "그 나라 가서 그것도 안 보고 왔어? 그러려면 왜 갔어"라는 말을 듣기가 그토록 싫었다. 실제로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있어서 더 그랬다. 하지만 사실은 딱히 미술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 유명하다는 모나리자나 클림트 그림을 봐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멋지다는 곳에 가서 사진을 왕창 찍고 숙소에 돌아와 눈이 빠지게 선별한 사진들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돌아오는 부러움 섞인 반응들에 만족하며 피곤에 절어 잠자리에 들곤 했던 기억들이 있다. 그마저도 큰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기 시작한 때부터 나에게 맞는 여행 방식을 조금씩 탐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나에게 좋은 여행은 기존에 살던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간을 제2의 고향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인 것 같다. 스페인 교환학생을 갔을 때, '내가 여길 언제 다시 와보겠어'라고 생각하며 촘촘히 유럽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곤 했다. 하지만 그런 초조함을 내려놓고, 새로운 지역을 방문했을 때의 낯섦이 익숙함으로 변해가는 기분을 천천히 음미하기 시작하자 마음이 참 편해지더라. 그에 더해 지역에서 인기 많은 액티비티나 운동 하나를 정해서 집중적으로 배울 수 있으면 완벽하다. 본국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기분은 참 마음을 포근하게 만든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여행지를 선정함에 있어서 '볼 거 많은 나라들'을 제치기 시작했다. 쉬러 간다고 하더라도 막상 그 지역에 있으면 뭐라도 보러 나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 나라와 도시가 나에게 주는 편안함과 따뜻함이 우선순위가 되었다. 여행 계획을 세워야 된다거나, 뭔가를 꼭 봐야 된다거나 하는 등 뭔가에 쫓기는 것 없이 그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것이 가장 단순한 의미의 휴식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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