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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쥬스 May 24. 2020

야간자율학습

밤이 되면 우리들은 성장했다.

밤의 아파트 단지에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녔다. 또래라고 하기엔 서로 다른 키의 아이들이 때로는 달리고 때로는 소리를 지르면서 단지 안을 휘저었다. 그들만의 상황과 설정 안에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확한 건 알 수 없었다. 얼마 뒤 젊은 경비원이 다가와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늦었지? 밤에는 조용히 놀아야 해. 봐, 저 집엔 불이 꺼져있지? 자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거거든."


경비원이 사방을 둘러싼 창문들을 향해 손가락을 저었다. 아이들은 네, 네, 대답하며 고개를 꾸벅이다 작전회의를 하듯 무언가를 속닥이고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이때 시간은 밤 열한 시 정도. 저 나이때의 아이들이 온전히 또래들끼리만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 일은 흔치 않다. 아마 꽤 특별한 하루였을 것이다. 내게도 오래 전 그런 하루가 있었다.


늦여름, 아파트 근처 풀숲에 사마귀와 잠자리가 붐비는 계절이었다. 당시 분당은 갑작스러운 개발로 아직 서식지를 옮기지 못한 곤충들이 많은 곳이었다. 사람의 손길에 익숙하지 않은 곤충들은 어린 애의 서툰 손짓에도 쉽게 잡혔다. 늘 함께였던 3명의 친구들과 채집통에 곤충들을 담아와 놀이터에서 모래집을 짓고 있을 때, 처음 보는 또래애들 몇이 다가왔다. 우리는 옆동네에서 왔고, 그 사마귀들을 같이 갖고 놀고 싶다. 대신 저녁이 되면 우리가 무서운 이야기를 해줄게. 우리는 그러기로 했다. 우리는 낮동안 사마귀를 다루는 법과 사마귀를 위한 모래집을 짓는 법을 알려주었다. 밤이 되자 각자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와 옆동네의 놀이터로 모였다. 그곳엔 성처럼 생긴 미끄럼틀이 있었는데, 안에 모여앉으니 미국 영화에 나오는 나무 위에 지어진 아지트 같은 공간이 되었다. 이 모임을 제안한 친구는 머리에 동그란 헤드랜턴을 쓰고 있어서 고갯짓에 따라 친구들의 얼굴에 명암이 너울거렸다. 그 어둠 속에서 아직 얼굴이 낯선 친구들이 주섬주섬 이야기를 꺼냈다.


이 동네에 빨간 치마를 입고 다니는 미친 여자를 본 적이 있어? 대우아파트를 지을 때 아들이 깔려죽어서 애들을 납치하러 돌아다닌대. 아파트 지하실 가본 적 있어? 밤에 거길 가면 사람들이 우는 소리가 들린대. 일제시대에 고문 당한 사람들이 묻힌 곳이라서. 저 뒷산에 비닐하우스에 사람 살고 있는 거 알아?. 밤 되면 거기서 어떤 사람들이 소리 지르고 욕하고 깨지는 소리가 나. 이건 내가 직접 봤어 진짜로.


그건 부모님 무릎 아래서 듣던 옛날옛적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세계의 전부였던 이 동네의 구체적인 지명들과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도시의 얄팍한 역사가 얽혀있는 설화들이었다. 언젠가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내가 매일 발 붙이고 살고 있는 동네의 모퉁이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었다. 이야기 군데군데 설치된 현실의 부자재들은 설득력을 더했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친구가 야광시계를 차고 오지 않았다면 시간을 모르고 거기 있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외진 골목길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문 닫힌 허름한 가게를 지날 때면 통유리에 이마를 대고 속을 들여다보았다. 몰래 아파트 지하실로 내려가 문이 열려있는지 확인하곤 했다(하지만 항상 잠겨있었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어서, 우린 곧 곤충채집을 그만두고 탐험대가 되었다.


탐험의 전제는 이 평화로워 보이는 동네의 뒷면에서 비밀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였다. 우리는 모든 것을 수상하게 바라보았다. 길거리의 잡동사니를 주워 곤충채집통에 담았고 증거라고 지칭했다. 증거들을 모아 가능한 이야기를 추측했다. 녹슨 머리핀을 줍고 한 여자애가 개구리소년처럼 실종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놀이터에서 찾은 일본 동전과 재활용쓰레기 사이에서 찾은 낡은 일본어책으로 아직 지하실에 숨어 사는 일본 경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식이었다. 하지만 모든 건 추측일 뿐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만의 비밀을 만들기도 했다. 어느 아파트 화단 구석진 곳에 천 원 지폐들과 NBA 선수 카드 몇 장을 묻어놓고, 이건 우리만 아는 거야, 같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사실은 바로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는 다른 비밀도 유통하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는 회사 다녀서 맨날 매니큐어 바르는데 그래서 손톱이 썩는 병에 걸렸어. 우리 아빠는 아침에 화가 나서 식탁 유리를 깬 적이 있어. 젓가락을 내리치니까 유리가 갈라졌어. 어제 아침에 안방에 갔는데... 엄마아빠가 팬티를 벗고 자고 있었어. 나한텐 잠옷 입으라고 하면서.


비밀이 늘어가는 동안 몇 개의 계절이 지나갔다. 신도시의 집값이 뛰자 우리들은 하나씩 분당을 떠났다. 서로의 비밀을 나눠가진 채 헤어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날 밤 만났던 옆 동네의 아이들을 우리는 다시 볼 수 없었다는 거다. 놀이터에서도, 학교에서도, 매일 다니는 길 위에서도 다시는 보지 못했다. 헤드랜턴에 비춰져 빛과 어둠 사이에서 일그러지던 인상만 남았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다가 그런 기억이 툭 삐져나왔다. 나는 놀이터를 빠져나와 청계천에 갔다. 지금 사는 집에서 걸어서 오 분이면 청계천이라 밤 산책을 가곤 한다. 요 며칠 틈틈이 비가 내려 물 흐르는 소리가 좋다. 청계천을 걸으며 만나는, 비슷하지만 다른 풍경들 중에서 교각의 흔적이 남아있는 지점을 좋아한다. 한때 청계천 위에는 고가도로가 있었고 그 위로 많은 것들이 유통되었다. 서울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로 수많은 차량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달리는 동안 서울은 더 빠르고 극적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길은 없고, 그 길을 받치고 있던 교각만이 숱 없는 나무처럼 우두커니 허공을 떠받들고 있다.


나는 교각을 보며 내가 가본 적 없는, 개발 이전의 청계천을 생각한다. 한때 여기 많은 판자집과 철물점과 잡화점과 작은 공장들이 가느다란 골목과 골목 사이로 촘촘히 모여있었을 것이며, 그 속에서 해외에서 밀수되거나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온갖 비밀스러운 것들이 유통되었을 것이다. 그 수상한 틈들 사이에서 '청계천을 다 뒤지면 우주왕복선을 만들 수 있다' 같은 농담 섞인 얘기들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이제 그곳은 없다. 지금의 청계천에선 모든 것이 확실하다. 이곳은 한 줄기로 뻗어있는 통로이다. 숨을 곳도 숨길 곳도 없다. 이곳에서 유통되는 건 영원할 것처럼 흐르는 물과 헤매고 싶은 사람들의 발걸음 뿐이다. 한때 이 곳에서 숨가쁘게 붐볐던 모든 것들은 단단한 콘크리트 아래 납작하고 평평하게 마감되었다. 나는 밤이 되면 그 위를 걷고 싶어진다. 그 아래 묻힌 것들을 두드리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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