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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고래 Feb 13. 2021

아빠는 캪틴큐

부녀의 알코올 히스토리

술자리나 분위기를 좋아해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친정 아버지는 술 그 자체를 사랑한다. 사랑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냥 바라만 보아도 설레고 떨리는 걸 훌쩍 뛰어넘어, 없으면 못 사는 지경. 언제나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무표정한 아버지가 유일하게 활짝 웃을 때도 이 때다. 밥상에 술 한 병 올라오는 날. 흐린 날 구름이 몰려가 순식간에 사라지듯 그렇게 환하게 아버지의 주름이 펴진다.

환한 미소로 미지근한 소주를 콸콸 300ml 글라스 잔에 가득 따르며 밥을 한 수저 뜨신다. 9년 전 내가 인도에 살 때 딸을 찾아온 아버지 배낭에 무겁게 들어있던 것도 참이슬 팩소주 30개였다. 큰아버지와 함께 마실 것을 직접 준비해 오신 것이다. 당연히 어머니의 눈살은 자연스레 찌푸려진다. 어머니는 결혼하고서도 술 취해 귀가하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느라 잠을 거의 못 주무셨다고 한다. 어디 전봇대 아래 쓰러져 있을까, 나쁜 일이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다. 구로역 벤치에 잠들어 막차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엄마는 늘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한 번은 화가 나신 엄마가 아버지의 양주 ‘캪틴큐’를 집에 남은 한 병을 다 드셨다고 했다. 35도의 불타는 분노를 식도로 다 넘겨 보낸 어머니를 보고도 아버지는 꿈쩍도 안 하셨다고.

마시면 이틀뒤에 깨어난다는 전설과 괴담이 가득한 양주. 출처: 다음 나무위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버지 레벨에는 못 미치지만 술을 사랑하는 젊은 청년을 둘째 사위로 맞이한 아버지는 조금 더 자유롭게 집에서 술을 즐겼다. 둘째 딸과 아내의 잔소리는 배가 되었지만, 은근한 즐거움은 더 커졌다.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제대로 잔소리를 해본 적은 없다. 나는 아버지의 진한 알코올의 피가 섞인 큰딸이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는 뜨거운 알코올의 혈관을 느낀 건 스무 살이었다. 대학 신입생이 되자마자 남들처럼 곧장 술의 세계로 들어갔다. 펜대로 굳은살이 벤 고3의 손가락은 술잔을 매일 들게 되었다. 오티, 미팅, 소개팅, 온갖 자리에서 다양한 술을 마셨다. 맥주는 비싸서 거의 못 마셨고, 요구르트나 오이즙을 탄 소주와 막걸리를 주로 마셨다. 한 학기 내내 정말 술을 마셨지만 한 번도 거하게 취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오티 때 선배들이 따라주는 소주를 못 마셔 쩔쩔매는 친구의 잔을 몰래 비워준 적도 있었다. 그때 느꼈다.


‘아, 위험하다. 나는 누구의 딸이던가.’

엄마는 지금도 말한다.

“너는 한 번도 취해서 실수한 적이 없었지.”

술꾼의 딸을 인정하는 엄마의 회상.

“그래서 내가 너 교회 간다고 해서 좋아했던 거야. 교회 다녀서 유일하게 좋은 점이었지.”

그렇다. 나는 재수를 한 후 새로 입학한 학교에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신앙을 갖게 되면서 술과 청춘의 철없는 놀이를 뒤로하고 열심히 캠퍼스 생활을 했다. 금주는 교리의 절대 항목이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10년간 금주를 하였다. 취한 상태에서는 (잘 취하지도 않았지만) 主님을 예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酒님 아님.)


그러다 오히려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면서 술을 한두 잔 기울이게 되었다. 말벗도 없고, 잠도 못 자고, 극한 노동 끝에서 맞이하는 맥주 한 잔은 구원과도 같았다. 主님도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했다. 主님도 즐거운 잔치와 휴식에서는 포도酒를 즐기지 아니하셨던가.


어릴 적 아버지가 술에 취해 사 오시던 통닭 냄새가 아직도 선명하다. 은박지로 둘둘 싼 통닭의 기름이 종이 가방에 베어 투명해질 때 들어오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께 오늘 문자를 보냈다.

“아빠에게 술이란 뭐야?”

단톡에서 한 마디도 안 하던 아버지의 빠른 답장. 7분 만에 왔다. 이례적이다.

“인생 상담사이며 나의 만족, 나의 대화 상자.”

엄마가 옆에 있었다면 또 눈을 흘겼겠다. 나는 허허 웃음이 나왔다.


설날인 오늘도 아버지는 알코올이 주는 자신감으로 멀리 있는 손주들에게 지갑에 있는 모든 현찰을 다 꺼내 보이셨다. 영상통화 건너 캪틴큐 정복자의 얼굴이랄까. 그리고는 진짜로 세뱃돈을 계좌로 보내셨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보내는 명절은 아니지만 배부른 취기에 주고받는 즐거운 마음들, 엄마 빼고는 모두 즐겁게 웃는 명절이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찌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희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_전도서 9장 7절.  

홀로 차린 설 명절 밥상. 모두 떡국을 지겨워서 돼지갈비찜과 홍게찜, 도토리묵무침으로. 여섯 식구 2.5kg 돼지갈비 클리어.



수고로움 레시피



대충 막 하지만 이상하게 맛있는 이주부 밥상



(※참고: 기본 베이스 양념이 다 맛있어서 그런지 그럭저럭 맛이 납니다. 집된장과 국간장은 한살림 선생님들 따라가서 일손 거둔 거밖에 없지만 직접 만든 것들이라 훌륭합니다. 대부분 유기농 재료로 하려고 노력합니다. 아빠의 건강 때문에 현미밥이 대부분입니다. 정확한 계량은 하지 않는 편이어서 맛이 뒤죽박죽입니다. 빠른 시간에 후다닥 차리는 게 특징입니다. 따라 하지 마세요. ><)


<간단 안주>

1. 담백한 크래커를 준비한다.

2. 아래의 재료를 쌓는다.

3. 올리브, 치즈, 살라미, 토마토 등.

4. 왼손에 안주, 오른손에 술이면 누가 아재라 했는가.

#아재인증


금요일 밤 일주일 피로를 보상받는 시간. 사진찍느라 식어버린 맥주 & 간단 스낵. 올리브, 치즈, 살라미, 크래커. /이주부
/이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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