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말이 이렇게 불편해질 줄은 몰랐다

아이를 보호한다는 말 뒤에 숨은 어른의 기준에 대하여

by 김이후

아이를 키우고 나서 뉴스 읽는 방식이 달라졌다. 전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넘겼을 문장에서, 요즘은 자주 멈춘다. 틀린 말은 아닌데, 마음이 먼저 걸린다. 예전 같았으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을 기준이, 이제는 쉽게 통과되지 않는다.


요즘 부모들에게서 아동 인권에 대한 인식 수준은 점점 높아져 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아동 인권을 말할 때 "모든 아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지지받아야 한다"는 말이, 어느 순간 하나의 기준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가볍게는 학생들이 소외받지 않게 교내에서 생일파티를 금지시키고 선물이나 편지를 제한한다. 무겁게는 교실에서 생기는 사소한 마찰조차, 어른들이 먼저 ‘사건’으로 인식하게 된다. 누군가는 내키지 않을 수 있고, 누군가는 상처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논리는 분명하다. 반박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사 속 정책에 대한 납득보다 먼저 장면들이 떠올랐다. 생일을 앞두고 괜히 달력을 들여다보던 기억, 누구를 초대할지 혼자 고민하다가 결국 몇 명을 더 적어 넣던 순간, 크리스마스 편지를 쓰다 지우다 끝내 구겨버렸던 종이 한 장. 서툴고 어설펐지만, 그 시간들은 나에게 관계를 배웠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그 장면들에는 모두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 누군가는 생일파티에 초대받지 못했고, 누군가는 편지를 받지 못했다. 그 자리에 자기 자녀의 얼굴을 넣어보면, 충분히 소외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장면을 만들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 더 기뻐하거나, 덜 기뻐하는 순간 자체를 없애버리려 한다. 판단하지 않아도 되고, 개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깔끔하고 안전하다. 그리고 이상할 만큼 편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편안함의 중심에는 아이가 아니라 나 자신이 있었다. 우리 아이는 소외받지 않기를 바란다는 명분 아래, 나는 모든 관계에 공정함을 요구하고 있었다. ‘공정함’이라는 표현은 그럴 때 아주 유용하다. 모두에게 같다는 이유로, 어떤 감정도 다루지 않아도 되게 만든다. 사실은 상처받기 싫은 어른들의 마음이 아이들에게 투영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다만 이건 아이들이 아닌, 어른인 내가 편해지는 방식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아이들 사이의 어색함과 불균형이 사라진 자리에는, 어른의 부담도 함께 사라져 있었다.


그 지점에서 ‘무균실’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깨끗하고 안전하지만, 스스로 견뎌낼 일은 거의 없는 공간. 감염의 위험은 없지만, 면역이 자라기 어려운 곳. 우리가 아이들에게 만들어주고 싶은 공간이 점점 그런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다치지 않는 대신, 스스로 회복해 볼 기회도 줄어든다.


“원칙은 큰일에나 적용할 것. 작은 일은 연민으로 충분하다.” 이 문장은 나에게 답을 주기보다 기준의 위치를 다시 묻게 했다. 아이의 생일은 큰일일까. 손 편지는 그렇게까지 공정해야 할 사안일까. 아니, 어쩌면 더 솔직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이런 장면들을 이렇게까지 관리하고 싶어 졌을까.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공정함은, 모두를 같은 자리에 세우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앞서가고, 누군가는 느렸고, 그 차이를 완전히 없애려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 차이로 누군가가 너무 밀려나지 않도록 돕는 어른이 있었다. 번거롭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저마다 관계 속에서 배우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서툴다. 기쁨을 나누는 법도, 감정을 조절하는 방식도 매번 어색하다. 누군가는 먼저 웃고, 누군가는 뒤늦게 섞인다. 서운해졌다가, 다시 괜찮아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 흐트러진 장면들 속에서 아이들은 관계를 배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장면들을 너무 빠르게, 우리의 기준으로 재단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들이 다칠까 봐서라기보다는, 어른인 우리가 그 불완전함을 견디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아이의 하루는 대부분 사소한 일로 이루어져 있다. 생일, 편지, 서운함, 화해, 어색한 웃음. 그 작은 일들을 하나씩 제거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무엇을 남기게 될까.


나는 여전히 공정함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다만 이제는 그 말을 꺼내기 전에 한 번 더 멈추게 되었다. 이 기준이 아이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불편해지지 않기 위한 선택인지. 아이를 키우며 내가 가장 많이 배우는 건, 어쩌면 그 질문을 피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 예전의 기록인 [아이를 키우고 나서야 불편해진 공정함]에 부모가 되어 깊어진 고민과 시선을 더한 글입니다.

https://brunch.co.kr/@doc18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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