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블랙의 모험
고양이 블랙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철썩이는 검은 호수 너머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울었다. 몇 년 전 어느 날 요트를 타고 가족들과 여행하던 중 만난 아름다운 페르시안 고양이를 떠올렸을까. 블랙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하염없이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었지. 풍성한 하얀 털, 푸른 눈동자, 도도한 핑크빛 코. 그녀가 타고 있는 요트를 향해 힘껏 점프했지만 짭짤한 바닷물에 빠져 허우적 되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야아아아아아~~~~옹”
블랙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러보았지만 야속한 별빛만 희미하게 깜박였다. 지난 15년을 말해주듯 블랙의 검은 윤기 나던 털은 어느덧 희끗희끗하게 빛바래 있었다.
“블랙, 이제 그만 들어와.”
주인집 아줌마가 블랙을 불렀다. 블랙은 집 안으로 들어와 따듯한 벽난로 앞에 웅크려 앉았다. 불꽃이 타닥이며 타올랐고 블랙을 이글거리는 두 눈에서 빛이 났다. 블랙의 집은 호숫가에 위치한 리조트용으로 지어진 이층 저택이었다. 블랙을 나직한 목소리로 반겨주는 주인아줌마는 삐걱이는 흔들의자에서 추리 소설을 즐겨 읽었다. 주인아저씨는 목수였다. 볕이 좋은 날이면 블랙은 집 앞 풀밭에서 나비를 쫓고 검은 주인집 자동차 보닛 위에서 따듯한 온기를 한껏 빨아들이는 것을 즐겼다. 블랙은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털도 많이 빠지고 시력도 나빠졌다. 하지만 블랙의 밝게 빛나는 두 눈동자에서는 때로는 순수함, 때로는 영민함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차 한 대가 길가에 섰다. 한 남자가 내려서 황망히 블랙의 집 앞으로 다가왔다.
“계십니까?”
그 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주인아저씨는 눈을 비비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긴 검은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누구시죠?”
“해밍 로드로 가는데 길을 잃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죠? 그리고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현관문 앞 전등 아래로 중년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사분이었다. 주인아저씨는 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신사는 급히 화장실을 찾았다. 아줌마는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오셨다. 가로수가 없는 거리는 달빛만 희미하게 보였다.
블랙은 두 눈을 빛내며 신사를 경계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신사의 품에는 날이 시퍼렇게 선 칼날이 언뜻 비쳤다.
블랙의 눈앞에서 두 주인아저씨와 아줌마가 쓰러졌고 정적이 흘렀다. 수술용 장갑을 낀 신사는 칼을 행주에 닦고 타고 온 차를 몰고 유유히 사라졌다. 블랙은 나직하게 울었다. 블랙을 사랑해주던 두 집사들은 미동도 없었다. 블랙은 차갑게 식은 두 사람의 주변을 맴돌았다.
“야아아아아아아옹”
블랙의 집은 외진 곳에 있어 인적이 드물었다. 블랙은 바닥난 사료를 등지고 집을 나왔다. 벽난로 안 땔감도 다 타들어가 재만 남아 집은 얼음같이 차가웠다. 그날 밤은 유난히 길었다. 바람은 채찍 같았고 블랙의 작은 발이 닿는 길은 얼어있었다. 블랙은 어디론가 부지런히 길을 따라 움직였다. 리조트로 지어진 오래된 빈 집들이 황량했다. 블랙은 열심히 걸었다. 한참을 걸어 시내가 나올 때까지. 배 고프면 들쥐 사냥을 하기도 했지만 늙은 몸은 날렵함을 잃어 매번 먹이를 놓쳤다.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을 때 샴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몸에 상처가 많고 꼬리 끝이 잘려있었다. 샴 고양이가 말했다.
“난 나오미라고 해.”
샴 고양이 나오미를 따라 어느 외딴 오두막집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사료와 우유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블랙은 나오미의 집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날이 어둑해지자 주인아저씨가 들어왔다. 주인아저씨는 술에 취해 블랙을 발견하지 못했다. 블랙은 어디에선가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블랙의 주인아저씨와 아줌마가 살인당하던 날 맡았던 냄새였다. 그 남자였다. 한 밤 중 블랙의 집으로 들어왔던 그 중년 신사였다! 블랙은 큰 소리로 코를 골며 자는 그 남자를 한참 노려보았다. 나오미가 말했다.
“먹을 건 충분히 주는데 기분이 나쁠 땐 날 발로 차고 어떤 날은 가위로 내 꼬리를 잘랐어.”
블랙은 미동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