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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물병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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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an 22. 2018

노안(老眼)

미간을 잔뜩 찌푸렸습니다. 눈에는 힘을 바짝 주고요. 카톡 메시지 하나를 읽으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럴수록 글자는 더 뿌옇게 흐려지더군요. 아주 자연스럽게 안경을 올려 보니, 허 참 신기하게도 글자가 잘 보입니다. 평소보다 많은 업무로 눈이 피로했나 봅니다. 잠깐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바쁜 일이 끝나고 좀 쉬면 나아지겠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처음에는.

     

그러고 나서도 핸드폰을 들여다볼 때면 여지없이 안경을 벗고 있네요. 충분히 휴식을 취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 신기한 증상의 원인이 점점 확실해집니다. 심중에 떠오르는 단어를 차마 인정하기는 싫어서 의사 선생님의 진단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안과에 가서 다시 한번 눈에 힘을 바짝 주었습니다. 부릅뜬 눈을 이리저리 검사하고 의사 선생님이 드디어 팩트 폭격을 감행합니다.

     

“노안이 왔네요.”

     

순간 “그것 봐, 내 말이 맞잖아. 껄껄껄.”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멋쩍은 김에 웃음이 살짝 나왔네요. 의사 선생님도 웃으면서 말씀을 더합니다. “아직 돋보기 쓰시기는 그렇고, 가까이 있는 거 보실 때는 그냥 안경 벗고 보세요.”

    

그래요, 뭐 심각할 거 있나요? 가까운 게 안 보이면 맨눈으로 유심히 들여다보면 잘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이가 들면서 가까운 게 안 보이는 현상이 눈만의 문제일까?’

     

가장으로서의 저를 돌아봅니다. 식구들 먹여 살린다는 명분으로 평일엔 새벽까지 일하고 주말엔 피곤하다고 잠만 자는 저였네요. 가정의 먼 미래를 혼자만 응시하는 척하면서 정작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의 상처는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아내는 집안일로 뭐가 힘든지... 유심히 보지 못했네요. 분명하지 않은 미래에만 시선을 두다 보니.

     

직장에서도 크게 다를 바가 없네요. 몇 년 후의 먹거리, 거창한 비전을 찾는다면서 시선을 저 먼 곳에만 두었나 봅니다. 고된 업무에 허덕이는 옆 자리의 동료와 후배들은 정작 세심히 챙기지 못하면서. 마음의 노안은 이미 훨씬 전에 찾아왔던 모양입니다. 육체보다 마음이 더 빨리 늙고 있었네요. 미처 깨닫기도 전에.

     

안경을 벗고 깨알 같은 글자를 더욱 유심히 바라보듯 주변도 살펴봐야겠습니다. 주말에 시원하게 머리를 자른 이 차장에게 “이발하니까, 인물이 훨씬 사는데!” 칭찬이라도 건네야겠습니다. 딸아이가 이번에 새로 만든 액괴는 이전 것과 뭐가 다른지 따져봐야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싱싱한 눈으로도 못 보던 것들이 더 많이 보일 것 같네요. 노안, 뭐 심각할 거 있나요? 진심으로 들여다보면 더 잘 보일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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