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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어쓰기 없는 절망에 대하여

어쩔수가없다

by 박재우

영화 속 선출(박희순 분)의 홍보영상 멘트를 통해 알게 된 사실. 제지업에서는 펄프를 얻기 위해 무분별하게 산림을 훼손하는 게 아니라 펄프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키워진 나무들만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펄프용 조림지(Plantation)’에서 유칼립투스, 아카시아, 자작나무, 소나무 등 성장이 빠른 나무들을 계획적으로 심고 벌채하여 펄프 원료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폐지를 재활용하여 종이를 생산하고 있으니 생태계 유지를 위해 꽤나 노력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난다. 조림지의 환경 문제를 살펴보자. 펄프용 조림지의 특정 나무만 대규모로 심는 ‘단일경작’ 방식은 토양의 질을 떨어뜨리고 생물다양성을 크게 감소시킨다. 또한 빠른 성장을 위해 많은 양의 물을 소비하고 살충제나 화학 비료를 사용하면서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폐지 재활용은 어떤가? 종이 섬유는 재활용할수록 짧고 약해져서 무한정 재활용할 수 없다. 평균적으로 5~7회 정도 재활용이 가능하며 그 이후에는 품질이 떨어져 새 펄프를 섞어주어야 한다. 또한 폐지를 다시 펄프로 만드는 과정(해리, 탈묵, 표백 등)에서 상당한 양의 에너지와 물, 화학물질이 사용된다. 효율성의 관점에서 볼 때 재활용은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보니 종이의 생애 주기는 노동자로서의 우리 삶을 닮았다.


오직 ‘쓸모’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가장 빠르게 자라는 단일 품종의 나무들이 줄 맞춰 심어진 ‘인재 생산 농장’인 교육 시스템에서 길러진 우리들. 공정에 투입된 우리는 나무들처럼 가차 없이 껍질이 벗겨지고 잘게 부서져 죽처럼 변한다. 학생 시절의 미숙한 자아는 ‘조직 문화’라는 이름 아래 벗겨지고 개인의 생각과 가치관은 ‘업무 프로세스’라는 기계 속에서 균일하게 마모된다. 이윽고 표백의 시간. 조직의 색에 맞지 않는 생각, 튀는 개성은 화학약품에 씻겨나가듯 하얗게 지워진다. 고압의 롤러가 모든 수분을 짜내며 평평한 종이로 압착하듯 우리는 회사의 규율과 성과 압박 속에서 감정을 잃은 납작한 존재가 되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비로소 한 장의 쓸모 있는 ‘종이’, 즉 노동자가 된다.


구겨지고, 접히고, 무언가로 채워지면서 종이는 점차 낡아간다. 종이는 다시 수거되어 새로운 종이로 태어난다. 노동자 역시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되고, 다른 부서로 이동하며 자신의 쓰임을 연장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영원하지 않다. 재활용을 거듭할수록 종이의 섬유질은 닳고 짧아져 결국 잉크를 제대로 머금지 못하는 푸석한 종이가 되고 만다. 처음의 빳빳함과 순백의 가치는 희미해진다.


바로 그 순간, 사측의 차가운 저울이 작동한다. “이 종이는 이제 섬유질이 너무 약해 재활용 가치가 없습니다. 새 펄프로 만든 종이보다 효율이 떨어집니다.” 이 한마디는 한 분야에 수십 년을 몸담아 온 노동자에게 내려지는 사형선고와 같다. “당신의 경험은 이제 낡았습니다. 당신의 연봉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집니다.”


‘효율성 문제’라는 차가운 낙인이 찍힌 낡은 종이는 더 이상 재활용 공정으로 가지 못한다. 그저 폐기되거나 소각로로 향할 뿐이다. 한때 가장 쓸모 있었던 존재는 이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비용’이 된다. 조림지에서부터 오직 쓰임 받기 위해 길러져 공장에서 상품이 되고 몇 번의 재활용 끝에 결국 폐기되는 종이의 일생. 영화 속 만수(이병헌 분)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하필이면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감격하던 순간에.


재활용 불가의 판정 앞에서 동종업으로의 재취업만을 고집하는 만수.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진정한 비극은 단순히 실업 그 자체가 아니라 주인공이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데 있다. 만수는 25년간 ‘전문가’로 살아온 인물이다. 아내가 다른 길을 제안하자 그는 “제지는 25년간 나를 먹여 살렸어... 나에겐 다른 선택이 없어”라고 잘라 말한다. 그의 살인 계획은 무차별적인 폭력이 아니라 자신의 ‘전문 분야’로 돌아가기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하려는 ‘어쩔수없는’ 생존 전략이다. 지속 가능한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어쩔수없이’ 해고하는 기업의 사업 전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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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제목인 ‘어쩔수가없다’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 의식을 담고 있다. 이 말은 처음에는 기업이 자신들의 잔인한 구조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나중에는 만수 자신이 끔찍한 범죄를 합리화하는 자기기만의 언어로 변모한다. 이는 거대한 시스템의 압력에 짓눌린 개인이 결국 그를 파괴한 시스템의 비정한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하고 모방하게 되는 과정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이 만수에게 ‘숙명’이고 ‘불가항력’이라는 것은 띄어쓰기를 무시한 제목 표기에서 드러난다. ‘어쩔 수가 없다’라고 띄어 쓴 문장은 ‘어쩔’ 방법과 ‘수가’ ‘없다’는 논리적 단계를 거쳐 상황을 설명한다. 여기에는 판단과 인식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단어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space)만큼의 심리적 여유, 즉 상황을 분석할 ‘틈’이 존재한다.


‘어쩔수가없다’처럼 붙여 쓸 때 단어 사이의 모든 틈을 제거함으로써 이 문구는 하나의 거대하고 견고한 운명의 덩어리처럼 보인다. 이는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분석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즉 빠져나갈 틈이 없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불가항력의 상태를 제목 자체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은 듯한 압도적인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생존을 위해 만수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전략을 모방하는 것은 그의 취미인 ‘분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만수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철저히 통제당하고 관리되는 객체이다. 그의 업무, 성과, 심지어 미래까지 모두 그의 의지 밖에서 결정된다. 이렇게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주인공이 유일하게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분재이다.


그는 철사로 가지를 뒤틀고 가위로 잎을 잘라내며 나무의 성장과 형태를 인위적으로 제어한다. 이는 회사가 규율과 성과 압박으로 자신의 삶을 재단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재현하는 행위이다. 회사에서는 권력의 ‘객체’였던 그가 분재 앞에서는 나무의 생사여탈권을 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 작은 세계 안에서 그는 신(神)과 같은 존재가 되어, 무력한 현실에서 오는 좌절감과 통제 불능의 불안감을 해소한다.


철사의 압박에 부러지는 나뭇가지 같았던 그는 고시조(차승원 분)의 시체를 철사로 고정해 ‘분재’처럼 만든다. 이는 앞으로의 삶에서는 ‘주체’가 되어 스스로 세운 계획을 더욱 철저히 통제하고 관리하겠다는 의지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어지는 선출(박희순 분)의 살인에서 사고사로 위장하는 그의 능숙한 처리는 철사의 모양을 잡는 손끝처럼 과감하고 꼼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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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펄프용 목재처럼 길러진 개인의 정체성이 직업과 동일시되고, 그 직업이 사라졌을 때 한 인간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파괴의 대상이 된 개인이 시스템의 비정한 논리를 모방하여 동족인 노동자들을 제거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제시하여 씁쓸한 웃음을 짓게 한다.


이 블랙코미디의 농도를 더욱 짙게 하는 것은 만수와 범모(이성민 분)의 아내들이다. 만수의 아내 미리(손예진 분)는 남편이 사람을 죽여 앞마당 사과나무 밑에 그 시체를 묻어 둔 것을 눈치채지만 모르는 체한다. 시체의 양분을 흡수하여 나무가 자라듯 경쟁자의 빈자리에 가정의 풍요가 세워질 것을 알기에. 범모의 아내 아라(염혜란 분)는 남편 죽음의 진실을 끝까지 은폐한다. 그녀의 부정함을 감추기 위해. 그 덕에 만수는 살인의 혐의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녀들 모두는 가정과 개인의 욕망을 위해 ‘어쩔수없이’ 공모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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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어쩔수가없는’ 우리들 덕분에 말 많고 탈 많은 자본주의 시스템은 오늘도 굳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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