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누엘 칸트는 아이들이 일에 대한 충동과 열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학교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일에 열중할수록, 그리고 살아있음을 느낄수록 우리는 삶을 더욱 자각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_ <왜 우리는 행복을 일에서 찾고, 일을 하며 병들어갈까>, 요하임 바우어 지음, 책세상
처음엔 칸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교육의 효과인 건지, 부모님의 영향인 건지, 친구들이 다 그랬으니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분명 '일'이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세계에서 일이란 회사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부모님은 “xx이네 아빠는 oo회사 다니잖아”로 친구네 소득수준이나 집안 환경을 파악했고, ‘00 회사’라는 회사 이름은 처음 만나는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의 백그라운드를 판단하는 지표가 되었다. 난 자연스레 직장인의 꿈을 꾸기 시작했고 이왕이면 대기업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에만 들어가면, 어떤 일도 재미있을 것 같았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외장하드에는 아직도 <입사지원서> 폴더가 있다. 대학 4학년 졸업반, 취준생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이었던 2005년 내가 지원했던 기업에 제출했던 자기소개서를 모아둔 곳이다. 저장해둔 기업의 자기소개서 파일 수만 32개, 저장하지 않았던 기업들까지 합치면 대충 50여 개에는 원서를 넣었던 것 같다. 그 폴더에 들어가면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기업의 이름은 다 있다. 지금 보면 그저 웃음이 나오는 것들이지만, 10년 전 원서를 넣을 때만 해도 모두가 간절히 가고 싶었던, 합격 문자만 간절히 기다리던 기업들이었다.
하지만 직장인이라는 꿈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고1 땐 스카이, 고2 때는 서울 내 중위권 대학이, 고3 때는 서울에 있는 대학만이라도 가길 원한다는 말처럼 원서를 접수하는 족족 떨어지니, 나의 꿈은 대기업에서 중견기업, 중견기업에서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기업으로 점점 내려갔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던 인간인가 처음으로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먼저 취업을 한 친구들 앞에서 자괴감도 느꼈다. 그럴수록 취업은 더 간절해졌지만, 사람들의 합격 수기를 읽을 때마다 취업 비법은 내게 더 오리무중이 되어만 갔다. 그리고 취업 시즌이 끝나간다는 11월 즈음 취업 재수 쪽으로 마음을 거의 굳힌 순간, 기적적으로 한 중견기업의 서류 합격 문자를 받았다.
그렇게 나의 꿈의 직장 생활은 시작되었다. 처음 3개월은 연수원에 들어가 동기들과 놀고 있는데도 월급이라는 것이 들어왔다. 우리 회사는 대단한 회사라는 세뇌 교육과 대기업을 흉내 내는 극기훈련 등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내 이름으로 의료보험증이 나오고, 사원증과 명함이 나오고, 월급이 들어오니 제법 직장인이 된 느낌이었다. 팀으로 배치받고 첫 출근을 하던 날엔 9시까지 출근이었음에도 새벽 6시부터 일어나 준비를 했고, 한 시간이나 일찍 회사 근처에 도착해 예전부터 하고 싶고, 부러웠던 '정장 입고 스타벅스 커피 한 손에 들고 출근하기'를 시도했다.
그래도 난, 운이 좋았던 편이라고 생각한다. 내 평생 이런 일을 하게 되리라 단 한 번도 생각 못 해봤지만, 그래도 처음 2-3년간은 나름 재미가 있었다. 내 언어, 내 아이디어가 들어간 상품을 개발하고, 그것이 언론에서 호평을 받으며 기사화되고, 필요로 하는 소비자들의 손에 들어가 나쁘지 않은 후기를 양성해가는 과정은 지금껏 살면서 경험해 보지 못한 짜릿한 경험이었다. 회사생활 역시 나쁘지 않았다. 팀 공통 업무를 효율화하기 위해 양식도 만들어보고, 업무 프로세스를 바꿔보기도 하고, 또 그것이 의도치 않게 사내 공모전에 당선되어 월급에 버금가는 상금을 타기도 했다. 난 회사에 들어오니 이제야 날 알아준다며, 역시 난 회사형 인간이고, 나름 숨은 인재였던 나를 뽑았던 건 회사 당신에게 큰 행운이라며 거만한 생각까지 하게 됐다.
그런 나의 생각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던 건 4년 차에 접어들면서였던 것 같다. 승승장구하던 회사가 성장을 멈추고 하락세에 접어들고 분위기가 급변하자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똑같이 일을 했는데도 시장의 반응은 예전 같지 않았고, 더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돌아오는 인사평가는 떨어지고 있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선임들의 자리는 다른 누군가로 채워졌고, 누군가가 떠난 어떤 자리는 끝까지 채워지지 않았다.
매번 새로울 것만 같았던 일이 사실은 같은 일의 반복이었고, 나의 힘으로 만든 상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내가 아닌 ‘회사’가 만든 것임을 그제야 알게 됐다. 회사에는 각 부서별로, 각 자리별로 역할이 있고 그 안에서 사고만 안 치고 버텨주면 그대로 굴러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내가 앉은 그 자리도, 내가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누가 앉아도 그 정도 성과는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정치적인 이유로, 트렌드라는 이유로 때로는 어떤 부서가 때로는 다른 부서가 돌아가며 힘을 얻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때 마침 내가 운이 좋아 그 부서에 있어 다른 팀의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 만약 다른 팀에 배치되었더라면 절대 그런 퍼포먼스를 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내가 잘 해서, 내가 잘 나서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내 자리라고 여겼던 그 자리는 누가 와서 앉아도, 누가 와서 일 해도 그 정도 성과는 낼 수 있는 자리였고, 또 언제 든 다른 누군가로 인해 충분히 대치될 수 있는 자리였다.
많은 자기계발서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나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강연에서 꼭 빼놓지 않고 나오는 말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것이었지만, 내가 본 회사에서 중요한 건 회사의 자본력과 인지도였지, 그것을 채우고 있는 구성원이 아니었다. 같은 제품이 나와도 브랜드가 유명한가 안 유명한가에 따라 소비자의 선택이 달라지고 인식이 달라지는 것처럼, 같은 인재더라도 이름 있는 회사에 다녔으면 똑똑한 사람이고 작은 기업에 다녔으면 그저 그런 인재가 되는 것이었다(이 사실은 이직 시장에 나가면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그 사람이 그 기업에서 설렁설렁 다녔는지, 열심히 다녔는지는 이력서 상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그 기업의 이름만으로 그 사람이 평가된다).
그러니 ‘일에 열중할수록 삶을 더욱 자각하게 될 것’이라던 칸트의 말은 전혀 다른 부분에서 맞는 말이기도 했다. 일에 열중할수록 나의 삶은 그저 어떤 ‘회사’에 들어가서 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는, 사회의 냉혹함을 자각하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다른 하나는 보다 경제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다. 쉽게 말하자면 가능한 한 설렁설렁 일하는 사원이 되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인간은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것을 목표로 한다. 월급이 정액제인데 죽어라고 일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_<위풍당당 개청춘>, 유재인 지음, 이순
중고등학교 6년을 달려 대학에 입학했더니 사실 대학생활은 내 가 상상했던 그것이 아니었듯이, 어학연수에 인턴까지 하며 대학 6년을 달려 입사한 회사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나는 절대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D 대리도 사실은 나와 같은 과정을 거치며 자신만의 회사 처세술을 습득한 것이라는 것을, ‘나 같은 쪽팔려서 나가고 말지’라고 생각했던 이곳저곳 발령받는 어느 팀이든 마다하지 않고 가서 버티는 Y차장도 사실은 업계에서 이 회사가 그나마 이름이 괜찮고, 나가봤자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버티고 있다는 것을 나는 회사에서 깨달았다.
이런 사실을 조금 일찍 깨달았던 나의 몇몇 동기들은 ‘회사’가 아니라 일찍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났고, 1인 기업을 차려 원하는 회사의 이상향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친구도 있었으며, 기업의 형태가 아닌 프로젝트별로 구성해 자기가 원하고 하고 싶은 프로젝트들을 하나둘 해나가기 시작했다. 잘 되든 안 되든, 많이 벌든 못 벌든 분명한 건 그들을 만나면 에너지가 가득했다는 것이다. 4~5년 차, 모이면 회사 욕 밖에 할 줄 모르는 우리들과 달리 그들의 언어는 긍정과 희망으로 가득했고, 우리와 달리 꿈이 있었다. 그래봤자 ‘직장인’이 꿈이었던 나와 그들은 많은 부분에서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부러웠음에도 결국 난, 직장인의 길을 포기하지 못했다. 내겐 갚아야 할 빚과, 꾸려나가야 할 살림과, 키워야 할 두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 회사를 박차고 나가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찾은 이들처럼 실패해도 괜찮을만큼, 못하면 한이 될 정도로 너무나 하고 싶은 '일'이란 것이 없었다. 주어진 일을 하는 것, 그래서 정해진 월급을 받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래봤자 월급쟁이지만 그럼에도 월급쟁이의 길을 걸어가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포기에서 선택된 결과였지만 그렇게 마음을 먹자 많은 것들이 달라지긴 했다. '왜 날 인정해주지 않아'라며 끓던 인정 욕구도, '왜 저건 저렇게 결정하지? 이게 더 나은데'라며 분노하던 일 욕심도, 회사 곳곳에서 발견되는 불합리함에 대해서도 그냥 내려놓게 되었다. 왜냐하면 난 월급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고, 그 월급을 받는 대가로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있으니까.
욕심내지 말고 받은 만큼 적당히 일하기. 난 이제 누군가의 눈에 닳고 닳은, 비겁한 선배가 되어 있겠지만 그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월급쟁이들의 마음이며, 오래 버틸 수 있는 월급쟁이들의 마음가짐 아닐까. 출근할 곳과 일할 수 있는 자리, 그리고 매달 들어오는 월급. 지금 난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