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상사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한 세 사람이 있다.
상무로 승진시켜주겠다는 미끼로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시킨 것도 모자라 새벽 6시가 아닌 6시 '2분'에 CCTV에 찍혔다고 생트집 잡는 '사이코' 상사를 둔 닉, 어느 날 갑자기 회장님 후계자로 나타나 회사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말도 안 되는 업무를 지시하는 '낙하산' 상사를 둔 커트, 환자를 마취시키고 희롱하는 것도 모자라 약혼녀가 있다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와 하룻밤 보내자며 들이대는 '색광녀' 상사를 둔 데일이 바로 그들이다. 바로 영화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 속 주인공들이다.
이 영화는 직장상사에게 시달리다 못해 그들을 죽이기로 결심한 세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코미디 영화다. 우리나라와 정서상 맞지 않는 부분도 있고 코미디 영화이다 보니 많은 부분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일 떠넘기기와 책임 회피는 물론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막말을 일삼고, 부당한 요구를 하고, 고용까지 위협하는 직장 내 꼴불견 상사들의 행태는 대한민국의 직장 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실 그대로이다.
특히 일반 사무직인 닉의 사례는 더더욱 공감 가는 포인트가 많다. 닉의 꿈은 상무다. 그 단 하나의 목표로 회사에 입사한 순간부터 자신의 모든 걸 받쳐 회사에, 아니 상사에 헌신한다. 상사가 처리 곤란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며 승진만을 위해 열일 한다. 새벽 6시에 출근하면서도 2분 늦었다고 욕하는 상사에게 늦어서 죄송하다고 말하며, 아침 8시에 상사가 따라주는 위스키도 마시고 토할 망정 그 자리에서는 흔쾌히 원샷한다. 하지만 상사는 그런 그의 간절함을 이용할 뿐이다. 상사는 다른 자리로 이동하며 닉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는 대신 자신이 상무까지 겸하기로 했다고 직원들 앞에서 발표한다. 대신 회사를 생각해 상무의 연봉까지 다 받는 것이 아니라 85%만 받기로 했다는 멘트와 함께 말이다.
이런 사이코 밑에서 일하는 닉도, 직장 내 성희롱을 버티며 일하는 데일도,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낙하산 밑에서 일하는 커트도 버티는 이유는 회사 밖은 더 냉혹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등학생일 때 같은 학교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던 친구가 리먼 브라더스에 들어갔다 회사가 망하자 매춘업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걸 보며 회사를 때려치우는 대신 서로의 상사를 죽여주기로 약속한다. 그다음 영화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까지 상황상황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들이 발생하고, 좌충우돌하는 장면들을 코믹하게 그려낸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저 사람은 어떻게 저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상사가 꼭 있다. 아무리 사내 정치가 중요하다지만 정치로만 올라가기에는 살벌한 피라미드식 조직 구조에서 살아남은 사람인데 능력도 없고, 인간성도 별로고, 윗사람한테 알랑거리거나 밑에 사람을 괴롭히는 게 전부인 상사를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그들의 과거가 궁금해진다. 내가 상사를 만났을 땐 그는 이미 상사였으니, 그가 사원이었던 시절 어떻게 일했고, 그의 상사는 그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말이다. 그래도 사원이나 대리 시절에는 똘똘하였던 것은 아닐지, 적어도 그때는 배려심도 있고 인간적이지 않았을지 막연한 희망 아닌 희망을 품어본다. 그래야 지금의 상황을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 피험자들은 교도관과 수감자 사이의 권력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남에 따라 금방 자신의 역할에 빠져들었다. 교도관이나 수감자의 역할 연기를 위한 애초의 대본은 참가자 자신의 권력과 무력감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왔다. 부모의 상호작용에 대한 관찰(전통적으로 아빠는 교도관, 엄마는 수감자), 의사, 선생님, 상사 등의 권위에 대한 자신의 반응, 그리고 감옥의 삶을 그린 영화 따위에 의한 문화적 세뇌 등에 기인한다. 사회가 그들을 훈련시켰던 셈이다. 우리는 그저 그들이 역할 연기를 하면서 보여주는 즉흥연기를 데이터로 기록하면 되었다.
_ <루시퍼 이펙트> 347쪽
1781년,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지가 궁금했던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세기의 실험이라 불리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하게 된다. 이 실험은 심리학 실험이라는 전제 아래 평범한 학생들의 지원을 받았고, 그 학생들을 감옥처럼 만들어 놓은 실험실에 몰아넣은 뒤 무작위로 수감자와 교도관으로 역할을 주어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연구자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역할 지침도, 규칙도 주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교도관과 수감자로 나누어주고, 그들에게 어울리는 옷을 나누어줬을 뿐이었다.
실험이 시작되자 처음에는 학생들은 다 같이 어울려 이야기하고 놀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자 실험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학생들 중 누구도 교도소 경험을 한 적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교도관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실제 교도관처럼, 수감자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실제 수감자들처럼 교도관들의 귄위에 복종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교도관 역할의 학생들은 이것이 실험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정말 교도관처럼 행동하기 시작했고, 수감자들을 가학적으로 대하며 그 방법도 더욱 악랄해져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도관의 가학행위가 극에 달하고, 수감자들의 정신쇠약 증세가 심해지자 결국 실험은 1주일 만에 중단된다.
이 실험은 필립 짐바르도의 저서 <루시퍼 이펙트>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영화 <엑스페리먼트>로도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사실 이 실험에 자원한 참가자들은 대부분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온 것이었다. 역할을 잘 해낸다고 어떤 인센티브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실험의 목적도 몰랐기 때문에 실험 자체에 대한 어떤 목적의식도 없었다. 그저 주어진 시간 동안 감옥에서 보내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스스로가 주어진 역할과 시스템 속에서 그에 맞게 행동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 안에서 서로 규칙을 만들고, 권위를 만들며 그것에 복종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필립 짐바르도는 이것을 ‘권위에 대한 학습’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권위를 학습한다. 가정에서는 부모에 대한 절대복종, 학교에서는 선생님에 대한 복종, 회사에 가서는 상사에게 복종을 배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귄위를 가진 위치에 서면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각자가 권위의 모습을 그린다. 아무도 그 역할은 이러해야 하며, 이런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쳐주지 않지만 보아온 것들로 저절로 학습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오르면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토대로 귄위를 휘두르게 된다. 그것이 옳은 방향이든, 그른 방향이든 말이다.
우리는 흔히 얼마나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사람인가로 그 사람의 권력을 측정한다. 회사 내에서 회장님이 혼자서도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이유가 그것이고,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도 큰 평형대에 사는 분들이 더 권력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_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93쪽
자리는 사람을 바꾼다. 일렬로 동료들과 쪼르르 앉았던 내 책상이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놓이는 순간, 내 책상의 크기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커지는 순간, 회사 내 나의 공간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넓어지고 독립된 나만의 공간이 생기는 순간 사람들은 나의 권위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제 내가 보고를 위해 누군가의 자리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게 보고를 하러 온다.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해도 직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자리만으로도 권위는 다져진다.
거기에 정보 장악력은 권위를 더욱 공고하게 다져준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정확하게 회사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팀장이 되고, 임원이 되면 회사 내 중요한 결정에 의사 결정자로 참여하게 될 수도 있고, 열람할 수 있는 정보도 이전보다 훨씬 많아진다. 팀장은 부하 직원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알고 있지만, 상사는 그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알고 있는 정보들이 있다. 그래서 정보를 많이 쥔 상사는 권위의 대상이 되고, 상대적으로 적은 정보를 쥔 부하 직원은 그 사람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자리와 정보뿐이겠는가. 예산 규모부터 팀 운영비까지 ‘돈’도 오로지 상사만의 권한이다. 그는 직원들이 쓰는 택시비에서부터 간식 구입비까지 알고 있지만, 직원들은 상사가 법인카드를 어떻게 융통하는지 알 길이 없다. 거기에 상사는 ‘인사평가’라는 평가의 권한까지 쥐고 있다. 나를 관찰하고, 평가를 내리고, 그 평가가 나의 승진에서부터 연봉 인상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면 상사의 권위에 대들 수 없다. 불합리한 요구도, 말도 안 되는 업무 지시도 그저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우리, 같은 을끼리는 갑질 하지 맙시다”
_ 드라마 <욱씨남정기> 중에서
어쩌면 지금의 내 직장상사는 원래부터 그런 사이코나 미친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했을 것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며,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직원이었을 것이다. (정말 그랬는지 알 길은 없지만 그래야 맞다고 생각하고, 그래야 한다고 믿고 싶다.) 그런 그가 거듭 승진을 하고 팀장이 되었을 땐 제일 먼저 그 누구보다 멋진 팀장이 되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후배들을 챙기고, 합리적으로 일처리를 하며, 소신 있게 행동하는 상사, <미생> 속 오 과장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믿음이 곧 환상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하면 부하 직원들은 그 이상으로 일을 해야 하는 고통에 빠져들었을 것이고, 소신 있는 결정을 내려 조직에서 밀리기 시작하면 내 직원들이 승진에서,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당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해를 해주면 더 많은 것을 이해해달라고, 편안하게 대해주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까지 넘어왔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노력과 달리 정작 사람들은 자기 같은 상사를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배신감마저 느꼈을지 모른다. <미생> 오 과장 같은 상사를 드라마에서는 모두가 응원했지만, 실제 그런 상사 밑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상사가 된 그들은 더 좋은 상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자기 자리를 지키는 데 더 힘을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날들은 줄어들테니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해 위에는 복종을, 아래에는 충성을 요구했을 것이다. 나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아래 직원들은 압박하고 그로부터 얻어낸 성과를 위에 보고함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아내려 했을 것이다. 자리를 지키는 동안 누릴 수 있는 것은 누리자는 생각이 들었을 테고, 그렇게 남보다는 ‘나’만을 생각하는 상사가 되어갔을 것이다.
어차피 ‘좋은 상사’는 없다. 내가 만났던 상사들 중에서도 ‘딱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라는 생각이 드는 상사는 없었다. 잠깐이나마 작은 조직 속에서 나 스스로가 상사의 역할을 했을 때도 난 좋은 상사는 아니었다. 내게 일을 ‘지시’하고 나를 ‘평가’하는 이상 상사는 결코 편하지도, 좋아지지도 않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상사들은 굳이 ‘좋은 상사’가 되려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더 사이코스럽고 더 또라이같은 상사들이 첩첩산중으로 쌓여 있을 테니 말이다.
다만 드라마 <욱씨남정기> 속 남 과장이 외친 말처럼 ‘같은 을끼리 갑질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기도 고용된 처지에) 고용을 가지고 협박하거나, (자기가 해야 할) 개인적인 일을 해줄 것을 요구하거나, (그게 자신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걸 모르는지) 욕설과 비하 발언으로 비인간적인 대우를 하는 것 등 말이다.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나를 배신자 취급했던 팀장보다, 등 두들겨주며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 많았다고 한 팀장이 더 오래 기억에 남고 두고두고 연락을 하고 지내는 것처럼, 적어도 상하관계가 끝이 났을 때는 인간 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