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생긴 뒤로 아이들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꼭 읽게 된다. 그날도 뉴스를 서핑하다가 한 기사에서 눈이 멈췄다. "피곤한 대한민국, 영유아도 수면부족"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기사의 내용은 이랬다. 안영민 을지병원 소아과 교수가 미국 필라델피아 어린이병원 연구팀과 함께 세계 17개 나라 영유아 3만 명의 수면시간을 조사했더니 한국 영유아의 수면시간이 유독 짧았다는 것이었다. (2016년 2월 한국의영유아(0~36개월) 수면시간에 관한 연구)
연구팀은 한국, 아시아 국가(일본 중국 홍콩 인도 등), 서양 국가(호주 캐나다 미국 영국 등) 등 3개 그룹으로 나눈 뒤 영유아들의 수면시간을 비교했다. 그랬더니 한국의 경우 아시아 국가의 아이들보다 26분, 서양 아이들보다 1시간 8분 덜 자고 있었다. 낮잠시간 역시 서양 국가보다 40분 적었고, 잠자리에든 시간은 평균 10시로 외국의 아이들보다 많게는 1시간 30분이나 늦게 잠들고 있었다.
이 뉴스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단순히 적게 자고 있는 아이들의 수면시간 때문이 아니었다. 수면부족의 원인으로 아이들의 수면습관을 꼽은 연구팀의 원인 분석 때문이었다. 연구팀은 잠잘 시간에 늦게까지 TV를 보거나, 부모와 함께 자는 아이가 많은 것을 수면시간 부족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물론 그 이유가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기껏해야 36개월 된 아이가 얼마나 늦게까지 TV를 볼 수 있으며, 부모가 함께 자는 것이 왜 아이들의 잠을 방해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원인이라면, 그것만 개선하면 아이들과 같이 8시 30분에 잠에 들 수 있을까? 적어도 내게는 불가능해 보였다.
큰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 그러니깐 15개월부터 유치원에 가기까지 아이는 아침 7시에 일어나 어린이집 등교 준비를 했다. 8시에 어린이집에 등원했고, 퇴근이 남편보다 이른 내가 저녁 7시쯤 데려왔다. 집에 온 아이는 저녁을 먹고, 목욕을 하고, 엄마 아빠와 놀다 9시 30분쯤 잠자리에 들었다. 연구결과에 나온 전형적인 수면 패턴을 가진 대한민국의 영유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가 밤늦게까지 TV를 봐서 늦게 자고, 나와 함께 자기 때문에 수면이 부족한 것이냐하면 그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 저녁 8시 30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부모들에게 저녁 7시 퇴근(후 집 도착)은 꿈의 시간이다. 그나마 나는 다른 직장인들에 비해 직장도 가깝고, 야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빠를 때면 6시 30분에도 데리러 갈 수 있지만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는 7시에 집에 도착하는 것도 쉽지 않다.
아무튼, 그렇게 7시에 아이를 데리러 왔다고 치면, 밥 먹이고 씻기는 것만 한 시간, 하루 종일 떨어져 지내 안쓰럽고 보고팠던 아이와 조금만 놀아도 한 시간이 필요하니 그것만 해도 이미 9시다. 게다가 아이는 바로 잠 드는 것이 아니니 잠 잘 분위기를 조성하고 누워서 뒹굴거리기를 30분을 하다보면 빨라야 9시 30분에나 잠을 자게 된다. 그러니 잠드는 시간은 늦어질 수밖에 없고, 수면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어떤 부모가 36개월도 안 된 아이를 덜 재우고 싶고, 늦게 재우고 싶겠는가. 대한민국의 맞벌이 부부라면 그저 주어진 현실 속에서 아이도, 어른도 함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뿐이지.
“맞벌이의 고충인가 싶네요. 각자 회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어요?”
“그렇죠. 또 그런 상황에서 대개의 남자들은 여자의 양보를 너무 쉽게 생각해요. 여성이 차장 정도 직급이
되려면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피상적으로만 생각할 뿐이죠.”
_ <미생 2권>, 86쪽 중에서
<미생> 속 선 차장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만 해도 아이가 없던 때라, 머리로만 이해할 뿐 일하는 엄마의 고충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아이는 왜 그렇게 자주 아픈지, 일하러 회사에 나왔으면서 왜 그리 자주 아이 일로 전화통화를 하는지, 왜 그들 머릿속엔 늘 아이와 관련된 문제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들 애 키우면서 일하는데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저리도 자주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지, 나는 나중에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를 몇 번이고 다짐하며 그들을 이해하는 ‘척’만 했다. 실제로 내가 그렇게 될지는 상상도 못 한 채 말이다.
두 아이를 낳고 키우다보니 아이에게는 생각보다 자주, 그것도 아주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다. 잘 놀다가도 새벽녂부터 갑작스레 열이 39도로 오르기도 했고, 출근 길 엘리베이터에서 갑자기 울며 토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에게 변수가 생길 때마다 난 늘 갈등해야 했다. 그냥 아픈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것인지, 아니면 “죄송한데 오늘 애가 아파서 휴가를 써야 할 것 같아요”라고 회사에 양해를 구할 것인지. 많은 경우 후자를 택했는데 그 사이 나는 “죄송한데요”와 “아이가...”를 반복하는 바로 그 애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회사에서 아이 이야기를 입밖에 내지 않으려고 버티고 버텼다. 야근이 필요하거나 주말에 일이 있어 나가야 할 때도 아이 핑계를 대지 않았다. 그나마 아이는 함께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편이 있었기에 서로 시간을 조율하며 아이를 돌볼 수 있었고, 급할 때는 친정 엄마, 여동생 손을 빌리며 버텼다.
하지만 금요일 퇴근 후 갑작스럽게 수습해야 하는 일이 생겨 뒷자리에 아이를 태우고 회사에 자료를 찾으러 갔을 땐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가는 길에 차 안에서 잠든 아이가 내가 없으면 분명 깨서 울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제발 잠깐만 버텨달라’며 아이를 차에 두고 사무실로 뛰어 올라가 자료를 챙길 때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몇 분은 실로 몇 시간 같았고, 결국 차로 돌아와 깜깜한 차 안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을 땐 나도 같이 울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서 차장, 부장, 팀장을 하는 여자 선배들을 볼 때면 이 모든 시간들을 어떻게 버텨왔는지가 상상이 안 될 때가 많다. 이제 겨우 5년 차 엄마인 나도 버겁고, 힘겨울 때가 많은데 그들은 그 생활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해오고 있으니 말이다. 직장인과 엄마 사이의 모드 전환, 일과 육아에서 오는 육체적인 한계, 일에 대한 집중과 양육 과정에서 결정과 판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을 어떻게 분배하고 두 가지를 모두 잘 해내 왔는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안 든다.
그들도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이 때문에 눈물 흘리고,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때려치우고 싶었던 순간들이 많았을 것이다. 둘 다 잘하려고 노력하지만 아이에게는 엄마 노릇 제대로 못하는 엄마로, 회사에서는 애 키우느라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회사원으로, 양쪽 모든 곳에서 편견의 눈들과 싸워가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왜 여자로 태어나 이렇게 힘든 시간을 견뎌야 하는지 스스로를 원망도 해보고, 왜 좀 더 가족과 아이에 대한 배려가 있는 문화를 가진 회사에 들어가지 못했나 회사를 탓해보기도 하고, 함께 견디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당신은 나보다는 낫잖아라고 괜한 남편에게 원망을 퍼부은 적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그렇게 두 가지 추에서 균형을 잡아보려고 애쓰며 하루하루를 버텨 왔을 것이다. 일이 좋아서, 돈을 벌기 위해서 등등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지금 일을 함으로써 나도, 남편도, 우리 아이도 더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으니깐 말이다. 나는 내 이름을 잃지 않고, 나 자신의 쓸모를 인정받으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 그 에너지로 남편과 아이들을 대할 수 있으니깐 우리 가족은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 그것 때문에 하루하루를 버티며 열심히 살아온 것이다.
우리를 키우면서 자기 자신도 키워 나가야 하는데, 우리는 자신을 철저하게 소진시켜야만
아이가 큰다고 믿어 왔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남겨 두는 여성은 이기적인 엄마라고, 모성이 결여된
엄마라고 확신했다. 우리는 어쩌면 어머니 세대의 자녀관을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답습했는지도 모르겠다.
_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237쪽
회사 속 을들의 이야기를 담은 JTBC 드라마 <욱씨남정기> 5화에 낯설지 않은 장면이 등장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 한 과장이 갑자기 육아 보이콧을 선언하고 지방으로 내려가신 시어머님 때문에 온전히 아이에 관한 책임을 갑자기 안게 된 것이다. 그러니 회사에서는 지각을 일삼는 민폐 과장으로, 집에서는 못난 엄마이자 아내가 된 것이다. 그녀는 분명 주어진 상황 속에서 두 가지 모두를 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건 두 가지 모두 민폐만 끼치고 뭐 하나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 드라마를 함께 보던 남편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왜 아이를 낳는 걸까? 애를 낳지 않았으면 저런 고민 없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연이어 토로한 육아에 대한 그의 고충들. 처음으로 육아에 관해 듣는 남편의 이야기였다. '아, 남편도 지금 이 시간들이 쉬운 것만은 아니구나'. 순간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늘 엄마라서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이 더 많다는 것만 생각했을 뿐, 지금이 순간 남편도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잊고 있었다. 그도 분명 회사에 애 때문에 양해를 구해야 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아이가 아픈데 내가 휴가를 쓰지 못할 때, 내가 야근을 해야 하거나 주말에 출근을 해야 할 때 우리는 서로 조율하며 아이를 키워오고 있었으니까. 그에게도 '나는 왜 아빠가 되었을까', '난 제대로 된 아빠 역할을 하고 있나', '회사 생활은 어떻게 해야하나' 등등에 관한 고민이 있었다. 일하는 부모라면 누구나 하는 그런 고민들을 말이다.
사실 아이를 왜 낳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리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다. 원래 목표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인데 남들도 다 아이를 낳으니까 낳았고, 아이가 생긴 뒤로는 아이가 주는 행복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이유를 따져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하는가. 매번 그럼에도 월급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그래도 단순하게 월급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내게는 내가 하는 일을 인정받고, 한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며, 여전히 사회에 쓸모가 있다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그건 어느 순간 생긴 것이 아니라 태어나 지금까지 살면서 집에서, 학교에서, 이 사회에서 살아가며 체화된 욕구였다. 그러니 결혼을 했다고, 아이가 생겼다고 한순간 접을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가 둘이 되고, 6년차 엄마가 되며 생긴 새로운 원칙은 있다. 만약 예전 직장에서처럼 내가 일을 함으로써 그것이 남편에게, 내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나 자신을 갉아먹는다면, 월급이 어마어마하다 해도 당장 그만둔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돈을 벌러 나가는 최소한의 자존심이며, 그까짓 월급쟁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보람을 느끼기 위함이다.
<미생> 속 선 차장도, <욱씨남정기> 속 한 과장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고 최소한의 보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 소박한 소원이 있다면 그들처럼만이라도 최소한의 것을 지키며 오래 오래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드라마와 달리 더 가혹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