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신중히 생각하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뒤 임금 인상을 요청하러 과장을 만나러 갈 결심을 하고
과장을 만나러 가는데 항상 단순하게 표현해야 하므로 단순화해서 과장의 이름이 그 자비에 씨이고 과장님
혹은 x 씨로 불린다고 하면 이제 당신은 x 씨를 만나러 가는데 이때 x 씨는 자기 방에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이고.
_ <임금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 중에서
제목부터가 모든 직장인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조르주 페렉의 소설 <임금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은 놀랍게도 한 문장으로 완성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월 691프랑(90만 원 정도)을 받는 대기업 말단 사원이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그 지난한 과정은 소설에 등장하는 단 한 번의 마침점을 만나야 끝이 난다. 그래서 이 책은 중간에 내려놓을 수가 없다. 주인공 사원이 과장을 만나 임금 요청을 하기까지 독자들은 끝까지 숨 막히는 과정을 따라가야만 한다. 다행인 것은 그래봐야 100쪽에 불과한 분량이라는 것과 출판사에서 독자의 이해를 위해 친절하게 도표를 만들어 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 사원이 임금 인상 요청을 하는 건 쉽지 않다. 우선 ‘그까짓’ 사원이 과장과의 약속 자체를 잡기가 쉽지 않다(소설에서 임금을 관장하는 사람의 직책이 과장인데 우리의 현실에서는 아마도 인사팀장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무슨 일 때문인지 그는 늘 바쁘고 자리에 없다. 복도에 서 있다 우연을 가장한 채 부딪혀 보기도 하지만 선뜻 입을 떼기란 쉽지 않다. 천신만고 끝에 그의 사무실에 입성하더라도 먼저 앓는 소리부터 꺼내는 과장의 입담에 사원은 자기 이야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한다. 회사는 어렵고, 그래서 고민이 많다는 과장 앞에서 어떻게 감히, 그저 한 개인의 월급 얘기를 꺼낼 수 있단 말인가. 같이 회사의 앞날을 걱정하며, 더 열심히 일하겠다는 말을 하고 돌아서는 것이 사원이 할 수 있는 일일 뿐이다.
이 소설에 마침점이 하나인 것은 그만큼 임금 요청의 과정은 지난하며, 한 개인이 도전하기에는 마음먹기도 힘들고, 마음을 먹었어도 당당하게 그 말을 꺼내기까지는 수많은 주저함과 망설임을 거쳐야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칫 말을 잘못 꺼냈다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을'의 위치가 자신의 노동의 대가인 임금에 대한 정정당당한 인상 요청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끝이 나지 않는 문장처럼 일개 노동자의 마음은 답답하고, 속이 타들어가고, 마음 안에서 생각이 무한 반복되며, 포기를 할까 다시 용기를 내볼까 백만 번 마음이 바뀐다.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직장인이라면 대부분 연봉제를 표방한 회사에 다니겠지만 실제 협상이나 인상 요청 등의 과정을 겪어본 이들을 많지 않을 것이다. 그저 경영학 책에나 존재하고 소설에나 등장하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뿐. 처음 회사에 들어가는 신입사원이라면 이미 회사가 제시한 연봉 조건을 보고 들어간 것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그다음 해가 되어도 회사에서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봉제란?
근로자 개개인의 능력과 업적을 평가하여 연간 임금액을 결정하고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능력 중시형의 임금제도
연봉제의 취지는 당신이 1년간 보여준 업무 성과에 따라 매년 연봉을 협상하겠다는 것이지만 그 의미가 무색하게 대부분의 연봉제 회사에서는 이미 회사가 정한 임금이 쓰인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행위 정도가 연봉 협상의 대부분이다. 그나마 인상이 되면 다행, 요즘 같은 불경기에 함께 허리를 졸라매자며 동결을 결정한 경우라면 그나마 사인할 기회도 없어진다(그나저나 ‘함께’ 졸라매자며 왜 내게는 함께 할 의지가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주어진 월급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받아들인다.
처음 내가 하는 노동에 대한 대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건 첫 이직을 하면서부터다. 이직을 하면서는 그나마 '연봉 협상'이라는 행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경력직 이력서에는 대부분 '희망 연봉'을 적는 란이 있었고, 이전에 내가 받았던 금액과 이직할 직장에서 원하는 임금을 제시하며 나의 '몸 값'을 제시해야 했다. 받고 싶은 금액이야 당연히 '무조건 많이'였지만, 그렇게는 쓸 용감함(?)은 없었기에 참으로 난감했다. 얼마를 제시해야, 어떤 이유를 근거로 제시해야 합리적으로 보이면서도 이 협상에서 더 많은 연봉을 얻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이 들었다.
만약 노동자에게 "당신의 임금은 얼마요?'하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나는 고용주에게서 하루에 1마르크씩 받고 있고"하고 대답하고, 다른 사람은 "나는 2마르크씩 받고 있고"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속해 있는
노동 부문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일정한 일을 한 대가로 (중략) 그들의 각각의 고용주로부터 받는
서로 다른 화폐 액수를 언급할 것이다. 그들이 언급하는 액수는 다양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그들은 모두 일치할 것이다. 그것은 임금은 일정한 노동 시간, 또는 일정한 노동을 제공하는 대가로 자본가가
지불하는 화폐 액수라는 것이다.
_ <임금 노동과 자본> 40-41쪽 중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임금 노동과 자본>에서 임금은 '노동력의 가격에 대한, 인간의 살과 피 외에는 머물 장소가 없는 독특한 상품의 가격에 대한 특별한 이름'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임금은 여러 다양한 요소에 의해 정해지는데 그중에서도 ‘자본가의 이익, 이윤에 대한 비율로’ 임금이 정해진다고 했다.
노동자는 자본가와 합의한 금액 아래 나의 ‘노동력’을 팔고, 그 이후에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상품에 얼마만큼의 이윤을 붙여서 팔아 이윤을 남긴다는 얘기다. 그러니 많은 이익이 예상된다면 자본가는 노동력에 보다 후한 금액을 산정할 것이고, 마진이 거의 남지 않는다면 임금을 깎아서라도 이윤을 남기려고 할 것이다.
이 이론을 지금의 현실에 대입해보면 지금 내 연봉이 왜 이것밖에 안되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시장 규모 자체가 큰 기업에서 일한다면 아무래도 기업은 월급을 후하게 산정할 수 있다. 매출과 영업이익 자체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분기에 영업이익만 6조 6천억 원(2016년 1분기 실적 발표에서 공개한 액수)을 낸 삼성전자에서 일하는 사람과, 영업이익은 차치하고 한 달 매출 3~4억 도 힘들게 맞추며 일해야 하는 회사는 이윤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노동자에 대한 임금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동차를 만들어서 파는 회사와, 책 한 권을 만들어서 파는 회사는 투입되는 자본금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는 것처럼 매출도, 영업이익도, 그 업계에서 산정되는 평균 연봉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괜한 억울함과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같은 해, 같은 회사에 입사한 동기인 S와 나는 그저 다른 계열사에 배치되고 시장 규모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그가 있는 회사는 연매출 8-9000억, 내가 있는 회사는 600억이었다) 해가 다르게 연봉의 차이가 벌어지고 10년인 지난 지금 2,000만 원 가까이 차이가 벌어졌던 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에 비해 덜 열심히 일한 것도 아니었고, 그보다 더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게다가 연봉이 ‘몸 값’으로 불리며 취업시장에서 나를 돈으로 평가해 제시할 때마다 내가 그까짓 가치밖에 안 되는 것 같아 괴로웠다. 언론에서는 100대 기업 평균 연봉은 7,741만 원이라고 하고(2014년 금융감독원에서 조사한 결과), 누구 네는 인센티브만으로 만 대출금을 다 갚았다고 하는데 대체 내 연봉은 왜 이것밖에 되지 않고, 그것마저도 “너무 높이 쓰셨네요. 저희는 이렇게까지는 못 드려요”라는 말을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받으면서도 대체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는 당신한테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월급 때문에 일하는 거, 처음부터 ‘일’의 흥미고 뭐고 무조건 많이 주는 회사에 악착같이 들어가 거기서 월급쟁이를 시작할 걸 수백 번도 더 후회하고 후회했다.
노동자의 기여와 생산된 가치가 같은 시간 지평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 쉽게 말해 노동자가 오늘 하루
여덟 시간 동안 일했다면 그는 오늘 하루 동안 생산된 생산물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노동이나
생산이 시간에 걸쳐 누적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_ <일하기 전에 몰랐던 것들>, 121쪽
세 번째 이직을 앞두고 내가 두 회사라는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오랫동안 알고 지낸 한 회사 사장님과 편한 저녁 식사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사장님은 감사하게도 내게 함께 일해볼 것을 제안해주셨고, 그러면서 본인 회사의 장점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셨다. 그러다 사장으로서 바라보는 직원들의 이야기로 넘어가 요즘 친구들이 열심히 일을 해주지 않아 그것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사장의 입장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갈 수 있는 부분이었다. 본인 입장에서야 본인은 밤잠 못 자고 회사 일만 고민하는데, 내 피 같은 돈을 받아가는 직원들이 내 맘같이 일해주지 않으니 당연히 속상했을 것이다. 그러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직원들이 회사에서 온라인 쇼핑하는 거 모르는 줄 알아요? 나 다 알아요. 그래도 암말 안 해요. 나 그렇게 쪼잔한 사장 아니에요.”
물론 업무시간은 회사가 내 노동력을 사 간 엄밀한 회사 소유의 시간이다. 그러니 업무 외 딴짓을 하는 건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이란 기계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시간에 책상에 앉아 있는다고 성과가 나오는 것도 효율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 식으로 서로 시간을 따지기 시작한다면 야근도, 업무 시간 외 회의도, 회식도 모두 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시대의 임금이란 고용주가 예측한 시간 내 성과 도출과 성과의 정도에 따라 ‘이 정도면 줘도 되겠네’라고 판단한 것이라 생각한다. 고용주 입장에서는 시간 내 성과만 받으면 목표는 달성하는 것이니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기업을 운영해본 경험은 없지만 누군가를 고용해 임금을 줬던 적이 있다. 바로 첫째 아이를 낳고 베이비시터를 구했을 때 일이다. 그때 내가 시터 이모님께 드린 임금은 한 달에 150만 원. 내가 기대한 목표는 아이의 안전과 위생, 때에 맞춰 잘 먹여주고, 졸릴 때 재워주며 안전하게 하루를 보살펴 주는 것이었다. 아이를 맡기는 일은 단순하게 일을 주고 성과를 보는 것과는 달리 돈을 주면서도 을의 위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난 아이만 건강하고 이상이 없으면 시터 이모가 집에서 어떤 행동을 하든 터치하지 않았다. CCTV를 달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 돈이 아깝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주는 사람의 입장이 되니 아까운 순간이 더 많았다. 생돈 150만 원이 통장에서 빠져나갈 때, 돈을 주지만 애 맡긴 죄인이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할 때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시터 이모님 월급을 주려고 다른 데가서 월급을 받아오는 건지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또 역으로 내가 이 돈을 받고 아이를 봐주러 간다면 150이 참 적은 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휴가도 내 맘대로 내지도 못하고, 매일 집 안에 갇혀 9~10시간씩 말도 못 하는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기저귀를 간다고 생각하니 150이라는 돈이 참 적게 느껴졌다.
임금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입장 차이는 아마도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월급쟁이 생활을 박차고 나가 사업을 하는 선배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일이 “인건비가 부담스럽더라. 내가 월급을 참 많이 받고 다녔던 거였어”였다. 받을 때는 한없이 적게만 느껴지던 그 월급이 주는 입장이 되어보니 부담스러운 금액이 되어 있었다.
만약 내가 지금 속한 이 회사에 좀 더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고, 지금 당장은 적은 돈 같아 보이지만 5년 뒤, 10년 뒤, 20년 뒤까지 회사라면 지금 내 눈앞에 찍힌 이 정도 월급에 충분히 감사하며 다닐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1년 뒤도 보이지 않는 조직에서 일을 하다 보니 지금이라도 더 많이 받아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월급에 집착하고, 내 연봉에 좌절감을 느낀다.
월급쟁이로 살아가는 한 아마도 난 평생 내 연봉에 만족하며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남의 연봉 탐내지 말고, 그저 내 통장에 돈이 들어온다는 사실에 위안 삼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월급날이 지나 통장에 돈이 남아 있으면 이번 달 아끼고 잘 살았다고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주고, 어쩌다 회사에서 상품권이라도 받는 날엔 소소한 기쁨을 맛보았다고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그래봤자 월급쟁이이지만, 그럼에도 월급쟁이를 택한 월급쟁이의 맛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