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 옷을 사지 않았다.
어차피 하루 종일 아이 보고 살림하니,
편하게 티셔츠 하나에 레깅스 하나 쓰윽 입는 것 외에는 모든 게 거추장스러웠다.
티셔츠가 티 쪼가리가 되고 레깅스가 추리닝처럼 헐거워질 만큼,
빨아 입고 돌려 입으며
기나긴 집콕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계절이 변하고 봄이 왔거늘,
여전히 나는 티 쪼가리와 헐거워진 레깅스의 조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외출할 일도, 갈 곳도 없는 일상이니
딱히 옷에 대한 결핍을 느끼지 못했다.
한 동안 옷을 사지 못했다.
아이 둘을 두 달이 넘도록 집에서만 먹이다 보니 식비와 생필품 비용이 배로 늘었다.
주문하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 또 비어 버리는 냉장고를 채워대느라 바빴다.
나의 가계부는 소박하고 소심했다.
아이들 바람도 쏘여 줄 겸
남편 친구의 집을 방문하기로 한 날,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섰다.
나의 꼴이 구질스러웠다.
아직도 옷걸이에는 겨울 패딩 점퍼가 걸려 있었다. 작년에 입었던 옷들은 시들었고, 나는 초라했다. 내가 참 싫어하는,
불성실이 들킬 것 같은 차림이었다.
옷을 좀 사야 할까?!
오래도록 망설이고 찔끔찔끔 사들이는 친정 엄마의 쇼핑 패턴을 매우 답답해하는 나는, 오래도록 망설이고 찔끔찔끔 사들이며 살고 있다. 오늘은 좀 용기를 낸다. 나의 한계 하나를 깨 버리고 싶다.
얇은 봄 외투 하나에 밝은 색 바지 하나, 레깅스(포기하지 못하는!!) 하나. 그리고 티셔츠는 기존 것들을 싹 다 버리겠다는 결심으로 다섯 벌이나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래서 총합이 179,200원.
다행히 내 취향이 그리 고급지지는 않은가 보다. 분수에 맞게 취향이 조절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자고 일어난 옷을 그대로 입고 하루를 보내기 일쑤였다. 어차피 금세 더러워질 옷들이라며, 아이들 또한 내복 바람으로 하루를 보내게 내버려 두기도 했다. 하지만,
외출 일정이 없어도 옷을 갈아 입고,
나갈 일이 없더라도 딸아이의 머리를 정성스레 묶어 본다.
옷이 사람의 하루를 리드한다
옷을 입고 뭔가 하루를 위한 세팅을 마치고 나니, 나갈 일이 생긴다.
무력함을 뚫고 나갈 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옷이 나의 하루를 리드하는구나.
그러니 티 쪼가리를 벗고 티셔츠를 입는다.
주부니까, 집에 있으니까 대충 입고 산다는 생각을 반복적으로 거절하며 산다.
주부에게도 주부적인 심미안이 필요하다.
깔끔하게 세련되게 차려 입고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나도 나의 하루 일과를 위한 복장을 성의껏 갖춘다. 아이를 돌보기에 불편하지 않고 살림을 하기에 거추장스럽지 않은 실용성이 여전히 가장 중요하지만, 한 번씩 거울 앞에서 나를 점검하며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었는가 스타일을 살핀다. 목이 늘어난 티를 입지 않고, 묻은 얼룩을 종일토록 방치하지 않는다. 옷차림이 뭐라고. 좋아하는 옷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날에는, 주부로서의 삶의 만족도와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것을 느낀다.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쾌적하고 그리고 눈에 보이기에 좋은 상태로 가꾸고 유지하는 일, 물건을 아무렇게나 사 들이고 방치하는 대신 신중하게 들이고 소중하게 돌보는 일, 남편과 아이들의 취향을 살피고 존중하는 일, 주부의 미적 안목이 발휘되어야 할 영역은 여느 디자이너 못지 않을 것이다. 솔로 시절에도 좀처럼 멋부릴 줄 모르던 나는, 이제사 예쁜 아줌마가 되겠다며 늦바람이 들었다.
디자인에 대하며, 안목에 대하여, 감각에 대하여, 나는 내 직업(전업주부!)을 통해서야 지평을 넓히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