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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 Mar 16. 2020

하루를 망치지 않는 기술

코로나와 일상, 많은 하루를 망친 후에

육아와 살림이 메인인 삶이다. 

코로나 덕에 육아도 살림도 가중되었다.

나는 레고 하기 싫은데 아들이 자꾸 시켜ㅜㅜ. 공룡집 만들라고 하지만, 내 마음 담은 작품을 만든다. 엄마는 여기 앉아 커피마시고 싶다.


코로나 아니어도 육아와 살림이 버거운 나다.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에 입소하기에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기다렸던 3월은

이렇게 나를 배신했고

일상은 단 하루도 유보할 수 없이

나를 거세게 떠밀었다.


많은 시간을 헤맸다.

삶의 가치를 성찰하고 우선순위를 헤어릴 틈도 없이 당장 해야 할 살림과 당장 채워줘야 할 두 아이의 필요에 의해서만 움직였고,

아이의 낮잠 시간엔 내가 먼저 무력함으로 나자빠지곤 했다.

늘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었고,

그것에 억눌려 무력함이 습관이 되었다.

결국은 내가 녹아 없어져버리는 것 같은,

몸도 털리고 영혼도 털리는 탈진을 경험했다.


이럴 땐, 그냥 훅 무너져 버리는 게 내겐 묘약이다. tv 틀어 놓고 단 것 짠 것 맘껏 들이키며

몸이 축나도록 늘어져 있다가,

바닥을 쳤다 싶으면 슬슬 일어나

다시 기어오르면 된다.

이게 나의 무너지고 일어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제 더 이상은 바닥을 칠 수 있는 시간이 없고

슬슬 기어오를 여유가 없다는 게 아이를 키우는 내 인생의 변화였다.


어쨌든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이제는 다음 주면 개학을 할 거라고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내 살길을 찾는 게 현명하다.


한 달이 넘는 기간을 집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최악의 나를 보았다.

형편없는 엄마의 모습, 유리같이 나약한 자아.

그 와중에, 나만 이래? 나만 힘들어? 나만 이렇게 유별나? 하며 힐끗거렸던 순간들을 뒤로하고,


그냥 나를 인정하며 내가 찾은 나의 살길.




1. 나를 제일 먼저 돌본다.


우선순위는 육아도 아니고 살림도 아니었다.

육아의 주체이고 살림의 주도자인 나의 '존재'가 단단하지 못할 때,

그것들은 흐물흐물해지고 나의 자아는 형체를 잃고 녹아내린다.

육아는 분노로 살림은 지긋함으로 변색된다. 그러니 육아와 살림보다 먼저 지켜내야 할 것은

나 자신이었다.

돌보지 못한 자아는 탈이 나고 만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기에 자책하지 않고 야무지게 나의 몸과 마음을 먼저 챙긴다.

내 배를 먼저 채워야 자식 먹일 에너지가 솟더라, 나는.  

내가 먼저다. 이 우선순위에 예외를 두지 않는다. 너희를 위해서라는 변명을 덧붙이며.



2. 지치기 전에 쉰다.


지치면 쉬었다.

그런데 지쳐 버린 후에는 쉴 힘도 남아 있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아이 하나가 어린이집에 가 줄 땐, 남편이 퇴근하면 잠시 카페 다녀올 체력적인 여유가 있었다. 피곤과 무력에 코로나 우울증까지 덮친 탓일까. 이 기간의 피로는 깊고 짙었다.

카페, 커피, 책이면 예외 없이 에너지가 솟던 나는 카페 갈 에너지조차 없이 지쳤고 커피를 마실 수 없게 속이 탈 났다. 곁에 둔 책은 읽을 틈을 주지 않는 아이들 곁에서 오히려 스트레스와 상실감을 가중시켜 치워 버렸다.


아, 지치기 전에 에너지가 남아 있을 때 쉬어야 하는구나. 조금 일찍 일어나 내 시간을 확보했고, 둘째 아이가 낮잠을 자면 첫째는 그냥 tv를 보여준 채 틈새 시간을 냈다.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집안일은 그 시간에 스위치를 꺼버렸다. 무조건 읽거나 쓰거나 죄책감 없이(커피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아서, 특히 믹스커피 마실 땐 건강 염려를 하곤 했다) 커피를 마셨다.


쉬는 것도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3. 집안일은 수시로 수습한다.


집안일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게 오히려 자주 치우게 되었다. 남편은 여전히 어차피 다시 어질러질 집을 쫓아다니며 치우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도 안 치우려고 해 봤다. 그러나 어질러진 곳은 더 어질러지더라. 더 어질러진 그곳에 내 물건이 숨고 내 발이 차이고, 아이들은 또 다른 곳을 어질러 놓더라. 나는 그냥 어리석어 보여도 시지프의 그 허무한 노동을 성실히 이행하기로 했다. 그게 내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 더 나았다. 수시로 치웠다. 내 스트레스를 아이가 아닌 치우는 데 해소시키겠다는 마인트 컨트롤을 해 가며 유쾌하게 치워댔다. 며칠을 반복하니 습관이 되고 한 번 치울 때 큰 에너지가 들지 않았다.


블록놀이를 할 땐 얇은 이불을 토이 매트처럼 깔아주고, 한 번에 후룩 모아 제 상자에 넣어 주었다. 물론 그 밖으로 던져 내기도 하고 여전히 난리는 난리지만, 습관화하겠다는 나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잡동사니 바구니도 곳곳에 비치해 놓았다.

끊임없이 장난감과 물건들을 내려놓고 흩어 놓는 아이들.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뭔가 좀 어수선하다 싶은 순간이 오면, 장난감과 물건들을 '마구' 담아 '일단' 주변을 깨끗하게 만든다. 그럼 바닥은 금세 청소기를 돌리거나 걸레질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시간과 에너지가 된다면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제자리 원상 복귀 바로 실시. 시간이 없고 에너지가 없다면 일단 아이들 손이 닿지 않게 올려둔 후, 틈이 날 때 제자리에 원상 복귀시킨다.

순식간에 할 수 있으니 수시로 부담 없이 가능하다.

감당할 수 없는 상태로까지 가지 않게 하는 예방책이 된다. 아이들도 곁에서 보고 배우게 되는 효과도 있다.


4. 에너지를 인정, 과감하게 포기한다.


아이들의 기본적인 돌봄 외에 다른 욕심이나 부담은 유보한다. 첫째 아이는 한글 공부를 좀 시켜야 할 것 같은 부담, 둘째 아이는 슬슬 기저귀를 떼 주어야 할 것 같은 부담이 있었다. 일단 모르겠고, 어린이집 보내고 내가 좀 숨통이 트이면 그때 하기로 했다. 사실 아이들을 온종일 끼고 있는 지금이 기회이기도 한데, 나는 못하겠다. 자랑은 아니다만, 내겐 하루 분량의 에너지가 고만큼밖에 안 되더라.






예상하지 않았고 계획하지 못했던 시간이지만,


혹독한 시간은 성장과 단련의 기회가 되는 게

맞긴 맡는 것 같다.

하루하루 지나며

육아에 대해 살림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돌보는 일에 대해 내공이 쌓이는 것 같다.


둘째 아이를 예정대로 3월에 훅 어린이집에 보내고 자유를 얻었다면 지금 나는 어땠을까.

뭘 하고 있었을까.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일상이 회복되었을 때,

그 시간의 가치는 훠얼씬 값지고

촘촘한 날들로 채워질 거란 좋은 예감이 든다.


할 수 없는 게 많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도 여전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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