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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 Oct 31. 2020

직업 의식, 투철한

엄마의 책상  

일과 공부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자기 위해, 두 개의 책상을 사용하며 대학원 시절을 보냈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나는 반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두 개의 책상을 바삐 오가며 보냈다. 

일이 급하지 않은 시간에는 논문을 쓰고, 

일이 급할 때는 일을 했다. 교수님들의 호출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자리를 뜨지 않았다. 처음에는 산만했고, 조급했고, 불안했지만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 

마음이 적응하고 몸이 적응했다. 

공부 책상에 앉을 때는 공부할 수 있었고, 

일 책상에 앉을 때는 일할 수 있었다. 

공부 책상은 점점 더 공부 책상다워지고 

일 책상은 점점 더 일 책상답게 자리를 잡아갔다.


두  개의 책상을 쉼 없이 오가며

무사히 논문 심사를 통과했고, 

탈 없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살림과 육아의 잔재물을 떨쳐낼 수 없는 

지금 나의 책상을 본다.


두 개의 책상 씩이나 가질 수는 없는 엄마는, 가계부와 육아 달력을 오른쪽으로

좋아하는 책들과 노트를 왼쪽으로 

편을 갈라놓아 본다. 


그때만큼 체력과 깡과 자유는 없지만, 

널찍한 두 개의 책상도 없지만, 

엄마로 또한 나로 

오른쪽 왼쪽 경쾌하게 오가며 

멀티플레이를 펼쳐 본다. 


전업맘이고 싶고 동시에 워킹맘이고 싶은,

뭐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는 나의 자아가 찢기고 분열되는 동안, 나는 여전히 책상 앞에 있었다. 


전업주부로서 살지만, 직업의식 내지는 직업 정신에 대해 느슨하지 않다.

출근할 때처럼 이른 기상을 하고,

등하원 외에는 특별히 나갈 일이 없는 일상이지라도

머리를 감고 옷을 바꿔 입으며 몸단장을 새로 한다. 마음을 다지며 에너지를 충전한다.

전업주부가 자신의 직업 정신 내지는 직업의식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꼴값처럼 여기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남의 장단 맞추며 배려의 아이콘으로만 존재하던 시간의 허망함을 경험하며

꼴값이라도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뻔뻔함이 나는 이제 좋아졌다.

남편과 아이들을 소중히 여긴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전제 이상의,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나와 남편과 아이들의 옷차림에 대한, 소비에 대한, 살림과 연관되는 환경 문제에 대한,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시간 배분과 활용에 대한, 미래에 대한 철저한 철학을 세워 나간다. 경험을 통해 독서와 미디어를 통한 공부를 통해, 대화를 통해 '전업주부'로서의 삶의 철학을 다듬어 나간다. 그것은 단순히 살림과 육아에 대한 효능감을 주고 실용 가치를 더해 주는 것 이상으로 내게 행복을 주었다. 그 과정이 학위를 위해 취업을 위해 공부하던 시간과 비교할 층위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시간을 통해 나는 흐물거리다가 다 녹아 없어져버린 나라는 인간에 대해 다시 정체성을 세우고 내구성을 더해갈 수 있었다.  



하루하루 우여곡절이 파란만장했던 시간이었다만, 나는 두 개의 책상을 바퀴 달린 의자로 휘릭휘릭 옮겨 다니던 치열한 기억이  즐겁다.

돌아보건대, 

공부와 일을 병행한 것이 오히려 득이 된 것 같다. 머리와 몸을 번갈아가며 사용하는 동안 머리와 몸은 번갈아가며 쉴 수 있었다.

공부머리가 지칠 때쯤엔 일부러 일머리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일하는 동안이 공부의 쉼이었고 공부하는 동안이 일에 대한 휴식이 되며 묘하게 밸런스가 맞춰졌다.


죽음이 있기에 삶과 생명이 의미인 것처럼, 가족이 있기에 내가 의미가 된다.

 제한된 시간 속에 있을 때 한 시의 가치가 살아나듯, 나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것이 기필코 나를 찾아내고 건져 내는 계기가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혼자로 살며 충분히 나로 살아갈 수 있었던 날들 동안에는 정작 단 한 순간도 온전한 나로 살지 못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소름이 끼쳤다. 잃어가는 것들에 대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간절해지는 역설의 원리가, 여기에 있었다. 나다움을 예찬하는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원망 대신, 지금이라도 나답게 엄마답게 주부답게 살아가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나.


주부에게 자기만의 부엌 이상으로 필수적인 공간/가구는 자기만의 책상인 듯하다.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 나의 자리 나의 책상이 필수적인 것처럼, 나의 일터인 집에도 나의 책상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 생각이 미치고 나니, 옷방 한 구석에 박혀 있는 작은 책상을 거실 한 복판으로 끌고 나올 열정이 생겼다. 나는 스스로에게 더 떳떳해졌고 이제 나의 책상은 거실 한 복판, 우리집에서 가장 채광이 좋은 자리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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