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책상
일과 공부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자기 위해, 두 개의 책상을 사용하며 대학원 시절을 보냈었다
전업주부로서 살지만, 직업의식 내지는 직업 정신에 대해 느슨하지 않다.
출근할 때처럼 이른 기상을 하고,
등하원 외에는 특별히 나갈 일이 없는 일상이지라도
머리를 감고 옷을 바꿔 입으며 몸단장을 새로 한다. 마음을 다지며 에너지를 충전한다.
전업주부가 자신의 직업 정신 내지는 직업의식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꼴값처럼 여기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남의 장단 맞추며 배려의 아이콘으로만 존재하던 시간의 허망함을 경험하며
꼴값이라도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뻔뻔함이 나는 이제 좋아졌다.
남편과 아이들을 소중히 여긴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전제 이상의,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나와 남편과 아이들의 옷차림에 대한, 소비에 대한, 살림과 연관되는 환경 문제에 대한,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시간 배분과 활용에 대한, 미래에 대한 철저한 철학을 세워 나간다. 경험을 통해 독서와 미디어를 통한 공부를 통해, 대화를 통해 '전업주부'로서의 삶의 철학을 다듬어 나간다. 그것은 단순히 살림과 육아에 대한 효능감을 주고 실용 가치를 더해 주는 것 이상으로 내게 행복을 주었다. 그 과정이 학위를 위해 취업을 위해 공부하던 시간과 비교할 층위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시간을 통해 나는 흐물거리다가 다 녹아 없어져버린 나라는 인간에 대해 다시 정체성을 세우고 내구성을 더해갈 수 있었다.
죽음이 있기에 삶과 생명이 의미인 것처럼, 가족이 있기에 내가 의미가 된다.
제한된 시간 속에 있을 때 한 시의 가치가 살아나듯, 나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것이 기필코 나를 찾아내고 건져 내는 계기가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혼자로 살며 충분히 나로 살아갈 수 있었던 날들 동안에는 정작 단 한 순간도 온전한 나로 살지 못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소름이 끼쳤다. 잃어가는 것들에 대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간절해지는 역설의 원리가, 여기에 있었다. 나다움을 예찬하는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원망 대신, 지금이라도 나답게 엄마답게 주부답게 살아가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나.
주부에게 자기만의 부엌 이상으로 필수적인 공간/가구는 자기만의 책상인 듯하다.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 나의 자리 나의 책상이 필수적인 것처럼, 나의 일터인 집에도 나의 책상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 생각이 미치고 나니, 옷방 한 구석에 박혀 있는 작은 책상을 거실 한 복판으로 끌고 나올 열정이 생겼다. 나는 스스로에게 더 떳떳해졌고 이제 나의 책상은 거실 한 복판, 우리집에서 가장 채광이 좋은 자리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