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소개팅이 들어왔다. 오래 알고 지낸 지인의 직장 후배인데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으니 한번 만나보라며 연락처를 건네주셨다. 몇 번의 카톡으로 약속 장소를 정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소개팅남을 만나러 갔다. 대기업 회사원이라기에 딱딱한 사람이지 않을까 하고 예상했던 외모와 다르게 반쯤 삭발한 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한 남자가 등장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그가 첫인상만큼이나 인상 깊은 첫 질문을 했다.
“그런데 저 두 달 후에 미국으로 가는 거 알고 계세요?”
“아니요? 미국에 왜 가시는데요?”
“아, 저 곧 퇴사하고 미국으로 유학 갑니다. 항공기 조종사가 되려고요. 그런데도 소개팅에 나온다고 하셔서 신기했어요. 하하”
처음 듣는 이야기다. 지난주에도 만나는 사람 없냐며 압박을 주시는 부모님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는데, 지금 나는 결혼이 한시가 급한 노처녀인데 이 사람은 곧 퇴사하고 유학을 간다고? 주선자는 이에 대해 사전 설명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자유분방한 나랑 어울린다고 하셨던 건가. 내가 지금 원하는 사람은 결혼 상대자인데 말이다. 실망한 내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상대방도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예의를 차리기엔 이미 늦었고 딱히 그럴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럼 언제 돌아올 예정이세요?"
"아직은 정해진 게 없어요. 그쪽에서 취업하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요"
“아니 그럼 그쪽은 두 달 뒤에 떠나는 사람이 소개팅은 왜 나온 겁니까?
하.. 나온 김에 그냥 술이나 한잔 해요”
날씨도 포근한 봄날의 금요일 저녁이었고, 그날따라 술은 더 달았다. 이미 소개팅은 물 건너갔으니 서로 기대하는 것도 숨길 것도 없어서인지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유쾌한 술자리를 가졌다. 처음 보는 사람과 이렇게 속 깊은 대화를 하고 즐겁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1차, 2차 대화가 깊어질수록 주선자의 예상대로 우리는 서로 호감을 갖게 되었다.
MAN ON THE PASSION
외모든, 스타일이든, 일이든, 취향이든 뭔가에 '확신'이 있는 사람은 멋집니다. 그런데 확신은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는 순간,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하지요. 남과 비교를 통해서가 아닌, 스스로를 파악하고 다양한 시도와 경험을 통해 만들어가는 자기 확신은 '성장'의 또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 어느 잡지에서 본 글
이번 만남을 계기로 내가 호감을 갖게 되는 이성 상을 알게 되었다. 일이든 취미이든 무언가에 '열정'이 있고 자기 '확신'이 있는, 취향이 확고한 사람.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꿈을 찾아 떠난다는 그의 확신과 열정을 응원했고 그 역시도 내 응원에 고마워했다.
그 후 우리는? 해피엔딩이면 좋았겠지만 그는 예정대로 유학을 떠났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듯이 나는 또다시 외로운 노처녀 신세가 되었다.
이번 연애도 실패했다고 친구에게 하소연하듯 고백을 했다.
"왜 하필 또 미국이야?"
대학시절 첫사랑을 만나 오랜 연애를 하고 그 사람과 결혼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임용 대기상태였고, 그는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현실적인 문제로 우리는 함께 떠날 수 없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함께 보냈지만 가고자 하는 길이 달랐기에 현실을 살아가느라 헤어지게 된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이별의 상처로 그 후 오랜 기간 누군가를 만날 용기도 내지 못했고, 이 사정을 알고 있는 친구에게 이번 연애도 실패했음을 알리고 우리는 나름의 추리를 해보았다.
"네가 역마살이 있는데 공무원 한다고 떠나지를 못하니까 만나는 남자를 떠나보내는 게 아닐까?"
(이리저리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그런가.. 내가 떠나야 하는 건가. 그런데 수많은 나라 중 왜 꼭 미국인 거야?"
유명한 교육기관이 미국에만 있는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도 꼭 미국이었다. 낯을 가려서 친구가 많지도 않고 소수의 사람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인데, 고민상담을 해주고 있는 이 대학 동기도 친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아 여름방학 때 잠시 연수를 다녀온다고 미국으로 떠나서는 아예 편입을 하고 한참 후에나 돌아와 다시 만나게 된 친구였다. 입사 후에도 어렵게 친해진 직원은 얼마 후에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미국으로 떠나는 걸까. 도대체 미국이란 나라는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는 걸까..
그렇게 나는 미국병에 걸렸고, 결혼이 어렵다면 내가 미국으로 떠나보자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는 미국으로 떠나지도 않았고(미국병을 치료해보고자 여행은 다녀왔다), 이 글에 등장하지도 않은 인물과 결혼하고 애도 낳아 기르고 있다.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담으려 했던 글을 내 아픈 연애사로 시작하니 나중에 남편에게 공개할 수 있으려나 걱정도 되지만 그 시절의 나는 그랬다.
연애를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고, 결혼을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어른들의 말씀대로 인연은 다 나타나게 되어있으며, 지나간 연애의 흑역사도 다 나를 키운 시간이고 그 과정을 거쳐 내가 성장했다고 믿는다.
사람 간의 인연은 예측할 수가 없다. 상처받기 싫다고 사람을 겪어보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해 깊게 알 수가 없다. 결혼이 연애의 성공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여러 이별을 거치 고나서야 내 인연을 만나 (드디어) 결혼에 골인했고, 같이 산 지 5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는 날이 있다. 그리고 아직도 나는 이 관계를 통해 성장하고 있다. 그러니 연애를 고민하고 있는 분이라면 두 달 뒤에 떠난다는 사람과도 두려워말고 연애를 시작해보시길 바란다. 그 인연이 당신을 새로운 길로 안내해 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