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결혼을 못하냐고 물어보신다면
"이모! 나 결혼할 남자가 생겼어"
"어머 축하해~ 어떤 사람이야? 만난 지는 얼마나 됐어?"
"나이는 동갑이고, 만난 지 두 달 됐는데 2년 후에 결혼하려고"
"야! 2년 만나고 2개월 후에 결혼한다고 해야지. 두 달 만나고 2년 뒤에 결혼한다는 게 말이 되냐?
그런 거 떠들고 다니지 말고, 청첩장 나오면 얘기해~!!"
막내 이모의 예상대로 그 남자와의 청첩장은 'ㅊ'조차도 새겨지지 못한 채 나는 또 이별을 했다.
대한민국 평범한 가정의 장녀로 태어나 부모님 말씀 잘 들으며 공부도 그럭저럭 해서 인 서울 대학에 들어갔고 특별하게 사춘기랄 것도 없이 큰 사고도 안치는 착한 딸로 살아왔다. 대학교 졸업 전에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해서 주위의 부러움을 사며 입사했고, (월급을 제외하면) 회사 생활도 만족스러웠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내가 계획한 대로 물 흐르듯이 무난하게 살아져 왔다.
그런데 한 가지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 바로 '결혼'이었다. '사회 경험도 해봐야 하니 20대는 너무 빠르고, 30대 초반이 적당하겠다. 32살에는 결혼을 해야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미 30대에 진입했건만 결혼할 남자는커녕 연애조차 3개월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요즘 젊은 사람들처럼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모쏠도 아니다. 대학생 시절 첫사랑을 만나 긴 연애도 해봤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별의 아픔에 오랜 기간 연애를 두려워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은 누구와도 연애를 하겠다는 오픈마인드에 금사빠이기도 하다. 호감 가는 사람을 만나면 곧바로 결혼을 꿈꿔보지만 그 기간이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내 기준이 그렇게 높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연애는 했지만 차마 결혼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차마 결혼할 수 없었던 놈들에 대해 풀어보려고 한다.
1. 꿈만 꾸는 놈
내 취미는 10년 후 내모습을 상상하는 일이다. 이상적인 미래를 그려보기 좋아하는 나는 제일 좋아하는 노래도 존 레논의 'imagine'이다. 이런 내가 끌리는 사람 또한 이상적인 꿈을 꾸는 사람이었지. 그런데 몽상가와 망상가의 차이는 아름다운 꿈을 이루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느냐, 아니면 말도 안 되는 꿈만 꾸고 있느냐 일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내 취향이 확고하고 그것에 열정이 있는 사람에게 나는 끌린다. 그렇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나 이상적인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열정을 좋아하는 것이지, 그럴듯해 보이는 비전만을 말하는 사람은 3개월이면 들통나게 되어있다. 연애 초 그런 놈의 말에 현혹되어 기대를 걸어보지만 하는 일이라고는 매일 술 마시고 놀면서 찬란한 미래를 꿈만 꾸는 놈이었다니.. 패스!
2. 바람피운 놈(최악)
앞에서 설명했듯이 나는 착한 딸에 모범생으로 살아왔다. 그러니 친구들이라고 해봐야 대학 동기나 공무원인 회사 동료들이라 비슷하게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만난 이 남자는 호감형의 외모에 여러 분야의 지식도 풍부해서 대화가 즐거웠고 유머도 넘쳤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분위기 좋은 곳으로도 자주 데려갔고 무엇보다 내 기분도 잘 맞춰줘서 모든 걸 털어놓게 되는 편안한, 그리고 만날 때마다 즐거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도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낌새가 보였다. 내 일정을 다 파악하려 했고 약속도 자주 바꾸고 뭔가 숨기는 듯해서 몰래 핸드폰을 열어보니 나 말고 다른 여자의 기분도 잘 맞춰주고 있었다.(하하) 바람이라니.. 절대 용서가 안되지. 이 놈과의 이별 장면에선 내 생에 처음으로 사람을 앞에 두고 욕을 해봤다. 이번 연애도 실패했음이 쓸쓸했지만 뭔가 속 시원하기도 했던 그 순간. 바람피우는 놈은 무조건 패스!
최근에 회사 직원의 자녀분(딸)이 연애도 결혼도 생각 없는데 만약 만난다면 무조건 자기한테 맞춰주는 사람을 만날 거라는 얘기를 하셨다. 그 말을 들은 기혼 여성들의 동시다발적인 대답들.
"절대 안 돼요, 그런 놈들이 더 무서워요!"
(다 맞춰주며 참고 있는 사람은 다른 데서 터져요)
역시 경험을 해본 자들의 인생의 연륜이 묻어 나오는 답이라고 생각한다.
3. 허세만 가득한 놈
지방에서 나고 자라 서울 생활을 하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서울 사람의 허세를 못 알아들어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하지만, 그 덕에 편견을 가지지도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같은 지방 사람의 허세는 너무도 잘 보여서 논외로 한다.)
"나 ㅇㅇ 고등학교 나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고등학교가 부자동네에 동문도 빵빵한 학교였다.)
"아 네~, 저는 ㅇㅇ 고등학교 나왔어요, 그래서요?"
"우리 부모님이 ㅇㅇ 아파트에 사셔서요~"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긴 대형 평수만 있는 고급 아파트란다.)
"(그게 뭔데.. 좋은 거야?) 저희 부모님은 전원주택에 사세요. 밤에는 별도 보이고 마당이 넓어서 좋아요"
은근한 자랑이 먹히지 않은 걸 알았는지 그 남자는 테이블 위에 외제차 키를 올려놓는다.
젊은 나이에 외제차 타는 남자들이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본인의 사업이 성공해서 산 차라면 당연히 높이 샀겠지만, 그 회사에 다니며 그 정도 나이면 모아둔 돈이 뻔할 텐데 부모 돈으로 산 차를 타고 으스대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우리 부모는 그만큼 부유하지 않아서 더 거부감이 들었던 걸까. 경제 수준이 안 맞아 패스!
4. 재미없는 놈
이 사람은 관심사가 정치와 정책이야기다. 공무원이라는 직업 상 정치적 중립의무를 명분 삼아(실제로 관심도 없다) 정치 이야기는 피해 보지만 정책 이야기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다. 무능해 보이기 싫어서 억지로 대화에 참여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칼퇴근과 육아휴직을 위해 공무원이 되기로 했고, 퇴근 후에는 노는 게 원칙이다. 노는 시간에 일 얘기하는 거 내 원칙에 위배된다. 바르고 착한 사람이었지만 나와 맞지 않는다. 재미없어서 패스!
5. 엄마 아들인 놈
좋은 대학 나와서 대기업에 다니고 강남에 집도 있다며 결혼하기 좋은 사람이라고 친구의 소개로 만난 이 남자. 오, 나도 드디어 부자 친구 덕을 좀 보는구나 싶었다.(외제차 싫다던 나 놈 어디 갔니) 소개팅도 지쳐서 그냥 결혼이 하고 싶었다. 그 남자의 생활은 윤택해 보였다. 그의 집 근처에서 데이트를 할 때면 나도 강남 사람이 된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이런 사람이랑 결혼하면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살긴 하겠다 싶었다.
얼마 후 그의 어머니가 나를 보자고 한다.(마침 김장을 하신다고 한다.) 요리에 똥손인 나지만 우리 시골집에서는 김장 때 100포기는 일도 아니다. 이런 테스트쯤이야 훗, 내 실력을 보여주지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김장이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김장의 꽃은 절인 배추에 싸 먹는 수육 아니겠는가. 그의 어머니도 노란 배춧잎에 수육을 맛있게 한쌈 싸셨다. 그리고 그 쌈은 맞은편 그 남자의 입으로 들어갔다. (읭?? 내가 뭘 본거지??)
정신을 차려보니 그와의 대화엔 유독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지금은 엄마가 위층에 사시면서 아침상을 차려주시는데 결혼하면 그것부터가 걱정이라고 했다. 나는 왜 그의 어머니가 차려준 아침상을 잘 얻어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내가 그 상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왜 못했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혼 후에도 나는 일을 할 거고, 좋은 집에 산 다한들 내 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을 텐데 그게 중요할까? 아니다. 나는 아침상을 차리지 않을 자유가 더 소중하다. 어머님의 소중한 아들을 빼앗지 않을게요. 저는 떠납니다. 엄마의 소중한 아들놈 님 패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지나간 그 남자들과 결혼을 안(못) 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남자는 이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러니 자연히 이별로 이어진 거라는 걸.
결혼이란 뭘까? 남녀가 만나 결혼식장에서 행진을 하면 결혼을 이룬 걸까? 내가 원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결혼이었던 걸까? 목표 지향적인 내가, 기한 내에 결혼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로 그 숙제를 해치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사실 나는 결혼할 준비가 되어있지도 않으면서 결혼을 하겠다고 설치니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결혼과는 거리가 먼, 전혀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들만 끌리게 된 건 아니었을까. 여러 고민 끝에 내가 아직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안됐다는 걸 깨달았다.
주위에서는 인연은 다 만나게 되어있으니 조급하지 말라고 조언하지만 아이 계획이 있는 여자들은 다르다. 산부인과에서부터도 만 35세부터는 '노산'이라는 낙인을 찍으며 필수로 받아야 할 검사도 추가된다고 한다. 한 해 한 해 소개팅의 횟수가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조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결혼이란 계획대로 되지 않는구나..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 라는걸 뼈저리게 깨닫게 된 나의 그 시절. 다섯 번째 만남을 끝으로 나는 더 이상 결혼할 남자를 찾지 않기로 했다.
결혼에 대한 압박을 잠시 뒤로 하고 그냥 내 인생을 살아보자 결심했다. 그동안 착한 딸로 살아왔으면 됐지 부모님의 잔소리 따위 이제 더 이상 너무 신경 쓰지 말자, 내가 결혼을 안 한다고 했냐고,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안되는걸 어찌하냐고 말이다. 결혼을 압박하는 아빠와는 잠시 거리를 두기로 하자. 그렇게 나는 결혼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떠나기로 했다.
최근에 유튜브 채널 '양 브로의 정신세계'에서 "결혼하면 불행해지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영상을 보았다. 부모의 그늘 아래에 살면서 혼자 있는 게 불안해서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결혼을 하려는 사람은 다른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니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불행의 도피처로 결혼을 선택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그때의 내가 그랬다. 누구라도 한놈만 걸려라. 의지하려는 마음보다는 결혼이라는 과제를 해치우고 싶었지만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놈(남)들과 결혼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분들의 문제가 아니고, 결혼에 대해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내가 차마 결혼을 선택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을 나중에라도 과거의 그분이 보게 된다면, 동의받지 않고 글의 소재로 사용한 것에 대한 사죄를 구한다. 하지만 이별에 대한 후회는 없다. 내 기준을 외면하고 결혼을 했다면 나도 그도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이었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들 또한 그와 잘 맞는 인연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결혼이 꼭 행복의 조건도 아니고 말이다.
불안하면서도 당당했던 그 시절을 돌아보니 그래도 나만의 기준이 있었구나. 무작정 휘둘렸던 것은 아니구나 싶어서 새삼 예전의 내가 대견하기도, 안쓰럽기도 하다. 결혼이든 인생이든 행복을 위해서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고 나만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기준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 예전의 나를 돌아보며 지금의 내가 또 배우고 있다.
당신이 가장 존중해야 하는 사람은 언제나 당신 자신이다. -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김수현
나만의 기준으로 하루하루를 채우며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기. 누구와 살든 그게 내 행복의 조건이다.
매일 아침 차분한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출근해서 동료들과 소소한 대화을 나누며, 퇴근해서는 가족들과 티비 앞에서 빈둥대는 일상 속 나는 요즘, 대체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