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작가님들! 제가 거의 두 달 동안 엄마 환영식을 준비하면서 수술 후 회복 중인 몸이 결국 안 좋아졌어요. 그래서 글을 쓰질 못했습니다. 이제 다시 마음 잡고 쓰려고 합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
엄마가 고관절 수술을 하고 우리 집에서 요양을 하셨던 때가 떠오른다. 2년 전 큰 아이 수능이 끝났던 바로 다음날, 나는 엄마를 요양병원에서 퇴원시킨 후, 우리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엄마는 워커를 짚고서야 겨우 몇 걸음 뗄 수 있었다. 나는 궁리 끝에 안방에 침대를 들여놓고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내 하루가 엄마 중심으로 돌아갔다. 삼시 세끼를 제대로 먹이고, 간식을 챙기고, 목욕을 시켜드리고, 엄마 심부름을 하다 보면 하루가 어찌나 빨리 지나가던지. 장보기와 설거지, 세탁 등 일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남편이 해외에 주재 중이라 나 홀로 입시생을 챙기고 학교 봉사를 하면서 가정을 돌보느라 이미 몸이 지칠 때로 지쳐 있던 나에게 엄마까지 챙기는 일은 커다란 부담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생활리듬이 달랐다. 엄마는 일찍 주무셨고, 나는 모든 집안일이 끝나면 그때서야 글을 쓰고 일을 할 수 있었다. 매일 새벽까지 일을 하고 침대에 누우면 엄마가 규칙적으로 숨을 내쉬고 작게 코 고는 소리가 내 귓가를 맴돌았다. 결국 거실에 나가 소파에서 자면서 매일 피곤한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내 성격상 엄마 상을 대충 차릴 수가 없었다. 엄마가 계신 동안에는 최소 9첩, 보통은 12첩 반상을 차려 드렸다. 처음부터 호화로운 식탁을 차렸던 것은 아니다. 엄마는 수술 전에도 방학 때마다 우리 집에 오셨는데, 식탁 앞 대화는 늘 같은 패턴이었다.
"엄마, 맛있어요?"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 내 목소리는 어린아이처럼 작아졌다.
"맛없다. 네가 직접 만든 것도 아니잖니."
그 말이 떨어지면 목구멍으로 밥알이 넘어가지 않았다. 화도 났다. 내가 아픈 몸을 이끌고 얼마나 힘들게 장만한 상인데!
학교 선생님이었던 엄마는 무뚝뚝하고, 표현을 아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을 배려해서 말하는 성격도 아니다. 내 학창 시절에는 매일 공부하라고 성화였다. 시험에서 만점을 맞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틀린 개수만큼 회초리를 휘둘렀던 엄마. 그 회초리 자국은 피부가 아니라 마음에 새겨졌다. 대학교에 가서 많은 경험을 한 후에 겨우 옅어졌는데… 역시, 엄마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엄마가 맛있게 드시는 모습, 딱 한 번만 보고 싶었다.
엄마의 맛있다는 표현, 딱 한 번 듣고 싶었다.
나는 결국 반찬 가짓수를 늘리게 되었고, 몇 년에 걸쳐서 한 상을 거하게 차리는 것이 내 의무처럼 자리 잡았다.
그 이후 내가 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되고, 수술을 하게 되면서도 가끔씩 엄마는 우리 집으로 오셨고, 그때마다 나는 엄마를 돌봐드려야 했다. 어느새 현관에서 엄마가 누르는 벨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 스스로가 장녀 콤플렉스인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수술한 금년에도 어김없이 동생들은 나에게 돌봄의 의무를 지키라고 요구해 왔다.
남편이 귀국했기에 더 이상 안방에서 함께 지낼 수도 없는데, 어떡해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남는 방이 있었지만, 창고로 쓰인 지 오래… 산처럼 쌓여있는 짐들을 바라보니 한숨부터 나왔다. 아직 수술 후 회복기에 있는 나에게는 방 정리가 무리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나에게도 행운이 따라왔다.
생각지도 않게 우리 집 일을 도와주러 오는 아주머니와 좋은 인연을 쌓으면서, 많은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힘을 합쳐 엄마가 오시기로 한 추석 연휴 2개월 전부터 짐을 치우기 시작했다. '엄마 환영식 준비'라고 프로젝트 이름까지 붙이니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큰 아이와 둘째 아이의 작아진 옷들과 더 이상 안 입겠다고 던져놓은 수많은 옷들을 정리하고, 온갖 교재들과 책들, 문구류, 선물들 등등 산처럼 쌓여있던 짐들을 하나씩 치워 나갔다.
짐을 치운 날이면 입안에 어김없이 물집이 잡혔고 어깨며 팔과 허리가 쑤셨지만, 말이 통하고 나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주는 아주머니가 있어 견딜 만했다. 내 몸이 너무 힘들어지고 마음이 헛헛해지는 날은 방 정리를 잠시 멈추었다. 지인을 만나거나 독서모임이 있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추석 연휴 전날, 기적처럼 모든 짐이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붙박이장의 서랍도 비우고 깨끗하게 닦았다. 침대 위 시트와 프랑스산 이불과 베개도 새로 깔아놓았다. 침대 옆에는 역시 프랑스산 빨간 벨벳 앤틱 암체어와 팔각형 탁자를 마련해 엄마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했다. 암체어에는 역시 빨간 색깔의 쿠션을 배치해 허리가 아픈 엄마가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꾸몄다.
아담한 화장대도 구입해서 자리를 잡아놓았다. 하얀 레이스 커튼도 세탁해서 예쁘게 장식해 두었다. 수납장 위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핑크빛 꽃들이 화려하게 조각된 램프와 반짝반짝 빛나는 꼬마 LED조명도 갖다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트색 벽 전체와 가구들을 모두 닦았다. 남편도 침대 맡 협탁 위에 허브 방향제가 들어있는 도자기를 협찬해 주었다.
문 앞에 서서 깨끗해진 방을 다시 바라봤다. 핑크빛 램프에서 은은한 빛이 퍼지고, 민트색 벽과 남색 침대가 어우러져 아름답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남편에게 의견을 물으니 만면에 미소를 띠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이상했다. 분명 엄마를 위해 꾸민 방인데, 내 마음속 무언가가 함께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추석 연휴가 되자, 엄마는 남동생과 함께 오셨다.
"짜잔! 엄마, 여기예요!"
나는 들뜬 목소리로 흰 방문을 활짝 열었다. 엄마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셨다.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시는 엄마의 시선을 따라가며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벨벳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으셨다. 남동생도 팔짱을 낀 채 무표정했다. 나는 애써 웃으며 기다렸다. 침묵이 길어졌다. '역시나.'라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이상하게도 실망보다는 담담함이 밀려왔다.
"엄마, 의자는 어때요? 편해요?"
항상 의자가 불편하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계셨던 엄마를 위해 특별히 구입한 고급 의자가 마음에 들지 궁금했다.
"아주 편하다."
며칠이 지나 한참 후에야 엄마는 식탁에 앉아 밥알을 씹다가, 불쑥 "방이 정말 화려해"라고, "이렇게까지 잘 꾸몄을 줄은 몰랐어. 마음에 든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순간 나는 숟가락을 들고 있던 손을 멈췄다. 목이 메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엄마는 당장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 마음속으로는 다 느끼고 계신다는 것을.
엄마가 지낼 환경을 최상의 수준으로 만들면서, 어느새 나도 변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엄마와 싸우지 않고 잘 지내고 싶었다.
엄마의 주름진 얼굴을 볼 때마다, 엄마의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걸 느낀다.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문득 "우리는 부모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부모는 우리가 이해할 만큼 기다리기에는 너무 늙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해가 아니라 받아들임이 찾아(주 1)" 왔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한평생 우리 삼 남매를 낳고 키우느라 희생하신 우리 엄마.
비록 표현은 잘하지 못하고, 나에게 쓴소리도 많이 하시지만, 나에게 엄마는 소중한 존재이다.
아직 살아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 한편은 든든하다.
내 나이 벌써 오십이다.
이제는 엄마의 말과 행동에 상처받기보다, 그 안에 숨은 마음을 읽으려 한다.
물론, 엄마를 보살피며 내 몸과 마음은 힘들어질 것이다. 당장 혓바늘이 돋고 어깨와 손가락이 쑤셔 다시 물리치료와 침, 부항 치료를 시작했다.
그래도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딸, 엄마를 외롭지 않데 하는 딸이고 싶다.
엄마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잊지 말아야겠다.
주 1) 미치 앨봄(Mitch Albom),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Tuesdays with Mor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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