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이건 무조건 가야 해!' 신청 버튼을 누르던 순간의 열망은 어디로 갔을까.
정여울 작가의 북콘서트를 앞두고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신청할 때의 흥분과 달리, 막상 날짜가 코앞에 닥치자 내 몸이 불만을 늘어놓는다. 엄마를 돌보느라 몸이 이미 한계치를 훌쩍 넘어선 것이다. 치열하게 고민을 한 끝에 결국은 가기로 한다. 내가 사는 곳에 북콘서트가 자주 열리는 것도 아니고, 유명 작가를 만날 기회를 흘려보내면 그런 행운은 평생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위해 화장대 앞에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미간에 흉하게 주름이 잡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내 얼굴,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은 하나. 엄마 오신 후 매일 받은 스트레스가 얼굴에 그대로 새겨진 것이리라.
북콘서트는 너무나 재미있었다.
정여울 작가의 지적이면서도 날것 그대로의 솔직한 강연에 진하게 공감이 갔다. 사회심리학을 좋아했던 과거의 나와, 그 시절의 열정이 소환되었다. 이드 id와 에고 ego, 수퍼에고 superego 간의 관계 모델을 생각하며 그녀가 펼쳐내는 에고와 셀프, 사회화와 개인화에 대한 개념을 흥미롭게 들었다. 에고와 셀프라는 렌즈로 재해석한 『데미안』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가 특히 재미있었다. 학창 시절 내 영혼을 뒤흔들었던 『데미안』이었기에 더 끌렸다. 그녀는 작년에 『데미안 프로젝트』를 출간했다. 나도 다시 헤르만 헷세의 명작들을 펼쳐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10대의 눈으로는 데미안이 일탈과 반항의 아이콘처럼 보였는데, 오십의 내가 다시 읽으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리라. 게다가 어린 시절 타이거 맘으로 내 거의 모든 것을 장악했던 엄마와 k-장녀인 나의 모습이 정여울 작가의 경험담 속에 그대로 재현되었고, 대학원 시절 교수 사회에서 일찌감치 세상 물정을 익혔던 내 기억 또한 자동 재생되는 듯했다.
두 시간을 훌쩍 넘긴 강연이 끝나고 사인을 받는 자리에서 정여울 작가는 개별적인 질문을 세심하게 해 주었다. 나는 글을 쓰고 있고, 최근에는 소설도 배우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글을 끝까지 쓰라며 용기를 주는 그녀의 말을 듣는 내가 마치 아이돌 팬 사인회에 간 팬이 된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새로 장만해 간 반 고흐의 금박 다이어리에 사인을 해주며 그 책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고흐에 대한 책도 이미 출간했었다. 『빈센트, 나의 빈센트』. 그 책도 읽어 보아야겠다. 사인받은 페이지를 정성껏 오려서 그녀의 책 표지 안쪽에 곱게 붙여두리라. 문학평론도 하는 그녀의, 전문성이 담긴 글쓰기 강좌를 듣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늦은 오후, 집에 돌아오니 남편이 웬일로 일찍 와 있었다.
엄마가 오신 후 신난 남편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먼저 말했다. 그런데 엄마는 방금 현관문을 연 나에게, "어서 가서 도와라"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적으로 화도 나고 여전히 내 처지를 헤아려주지 않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저 이제 쉬어야 해요!" 나는 안방 문을 닫고 들어갔다.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있는데 엄마가 방에 들어오셨다. 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얘기했다.
"엄마, 제가 무슨 노예예요?"
엄마는 내 거센 질문에 당황했는지 커다란 눈만 껌벅껌벅거리셨다. 나는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내 생각을 조곤조곤 얘기했다.
"엄마, 저 환자인 거 아시죠?"
"..."
"그런데 엄마 오신 후에 엄마 보살피느라 제 상태가 어떻게 되었어요?
저 입병 네 개로 늘어났어요. 혓바늘 안 선 날이 하루도 없었다고요. 어제 부황 뜨면서 아줌마가 뭐라 했어요?
저보다 엄마 몸이 훨씬 좋다고 하셨잖아요. 엄만 몸 관리 잘해서 100점이라고요."
엄마는 가만히 듣기만 하셨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걸까?
"그런데 제가 지금 막 들어왔잖아요. 그럼 제가 뭘 해야겠어요?" 엄마는 여전히 말이 없으셨다.
"저는 지금 쉬어야 해요.
그런데 어떻게 엄마가 저한테 부엌일 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어요? 저 정말 섭섭해요."
"... 나는 최서방 들으라고 한 말이지."
"그럼 오히려, 저는 쉬라고 말씀을 해주셔야죠. '체력 좋고 튼튼한 남편이 해준다니, 너는 쉬어라~'라고 얘기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아무것도 안하니 미안하잖니. 너라도 도와주라는 거였지."
"..."
대화는 맥없이 끝나버렸다. 엄마에게 가장 만만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사실 정여울 작가 북콘서트 날도 참석하기로 한 지인들은 점심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엄마 점심 상을 차려드리기 위해 거절했다. 북콘서트에서 만난 지인은 내 몸을 걱정해 주는데, 정작 우리 엄마는 자신의 위신, 자신의 몸만 챙긴다니….
작년까지는 엄마가 와 계시는 긴 시간 동안, 직책을 맡고 있는 학교 공식 모임과 학부모 상담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이번에는 그나마 내 목소리를 내고 내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엄마가 오신 후 2주 반이라는 기간을 돌이켜보니, 나는 항상 일에 쫓기다 기진맥진해져서 침대에 쓰러지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로만 지휘하시는 엄마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나를 발견하고 '현타'가 오곤 했다. 삼시 세끼를 차려서 식탁에 올리고 치우는 것만 해도 나에겐 충분히 벅찼으니까.
정여울 작가가 얘기한 k-장녀 신드롬에서 나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걸까? 그래도 예전보다는 장족의 발전을 한 나 스스로가 대견하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함을 느낀다. 좀 더 나를 생각해야 한다. 최근 스트레스가 쌓여서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종종 있었는데, 병이 재발될 수 있어 두렵다.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지. 그리고, 엄마의 무심한 말을 들어도 화가 나거나 상처 입지 않도록 더 마음을 갈고닦아야 하겠지. 우선, 엄마에게 '솔직하되 엄마 마음은 다치지 않게' 내 마음을 전하는 기술을 잊지 않고 발휘해야 할 듯싶다. 마치 학부모나 학생 상담을 하듯이 말이다.
얼마 전에도 엄마에게 내 생각을 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도 장녀라서 외할머니에게 성심성의껏 다 하고도, 좋은 소리는 별로 못 들어서 힘들어했잖아요?"
"그렇지, 내가 팔 남매의 맏딸에, 아빠 남매가 열명이나 있었잖아. 그 고생은 말해 뭐 해." 엄마는 자신의 고생 경험을 풀어놓기 시작하셨다. 나는 엄마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시기 전에 재빨리 대화의 주제를 붙잡았다.
"그것 봐요. 그런데 왜 저한테만 수고했다, 힘들었다, 고생했다는 얘기를 안 해주세요?
동생들은 뭐 하나만 해도 그렇게 칭찬해 주시면서?
제가 매일 9첩, 10첩 반찬 차려드리는 건 너무 당연하시죠?"
"최서방이 해준 음식은 그리 맛있다 해주면서 제가 하루 세 끼 차려주는 식사에 대해서는 왜 아무 말씀을 안 해주세요?"
"그냐 사위와 딸이 어떻게 똑같니? 뭘 그리 따져?
엄마가 해주시던 음식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엄마가 음식을 하지 않은 기간이 벌써 15년 가까이 되었고, 그 기간은 오롯이 내가 엄마에게 음식을 해드렸다는 뜻이니까. 매번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을 고민하고 일방적으로 맞춰갔으니까. 덕분에 팔십 노모의 손이 오십 딸의 손보다 더 고와졌다. 고흐의 해바라기는 바로 사랑받고 싶었던 나의 자화상임을 깨닫는다.
마침 옆에서 부항을 떠 주시던 아주머니도 내 말을 거들어주었다.
"어머니, 저도 장녀인데~, 왜 다들 장녀한테만 그리 모진 거예요? 어머니는 큰 딸한테 칭찬 좀 해주셔야 해요. 이렇게 착한 딸이 어디 있어요~"
이번에는,
내 몸을 덜 혹사시키고,
내 마음이 상처 입지 않도록 하면서,
엄마와 좋은 관계로 지내고 싶을 뿐이다.
나를 돌보지 못한 나에게,
엄마를 돌보는 것에만 신경 쓰지 말고
나를 잘 돌보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엄마에게 휘둘리던 나의 알을 깨고 나와야만 한다.
엄마에게 갇혀 있던 작은 세계를 깨고 장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모녀간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는 어른스러운 자세가,
나와 엄마 모두에게 진정으로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될까?
고민하면서 하나씩 실천하다 보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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