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드디어 온다.
숨이 턱턱 막히고 얼굴을 타고 쉴 새 없이 한 줄기 물이 흘러내린다.
자꾸만 도망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처음 책을 만났을 때, 가슴이 먹먹하게 짓눌려 감히 다음 장으로 넘기지 못했다. 책장에 도로 꽂혀 무려 일 년을 기다린 '소년이 온다'. 이 책은 나에게 지식의 초라함과 무력감이라는 벽을 느끼게 한, 몇 안 되는 잔혹한 책 중 하나다.
가을이 되자, 나는 다시 이 고통스러운 책을 꺼내 든다. 45년 전 그 그 찬란했던 5월을 되새긴다. 한강 작가 특유의 응축된 문장과 생생하게 직조된 경험의 파편들이 내 머릿속을 휘젓는다. 첫 번째 읽기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두 번째 읽기에 들어선다. 문장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곱씹어보며 텍스트를 해체하듯 분석한다.
예스러운 단어들. 그리고 '80년대에는 누구나 알고 있었을 테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생소한 잊힌 단어들이 나를 압박한다. 내가 알고 있던 초라한 지식이 발가벗겨진 듯 답답해진다. 다시 절망과 이해 불가능의 거대한 벽을 만난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정교한 은유이자 중의로 표현된 것을 알고 충격에 빠졌던 것처럼, 한강 작가가 펼쳐낸 장면과 행동 또한 극도로 함축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 짧은 책의 무거운 의미를 어떻게 다 이해할 것인지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 비극의 벽 앞에 나는 무릎 꿇고 흙을 파헤친다. 절망 속에 드러눕는다.
1장. 어린 새, 첫 문장부터 나를 먹먹하게 한다.
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청 앞 은행나무들을 지켜본다.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불쑥 바람의 형상이 드러나기라도 할 것처럼, 공기 틈에 숨어 있던 빗방울들이 일제히 튕겨져 나와, 투명한 보석들같이 허공에 떠서 반짝이기라도 할 것처럼. (중략)
아름다움과 잔혹한 현실이 엇갈리며 비극을 완성한다. 소년이 바라보며 생각한 접시꽃, 은행나무 하나하나가 다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여러분, 적십자병원에 안치되었던, 사랑하는 우리 시민들이 지금 이곳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여자의 선창으로 애국가가 시작된다. 수천사람의 목소리가 수천 미터의 탑처럼 겹겹이 쌓아올려져 여자의 목소리를 덮어버린다. (중략)
저 무겁디무겁게 올라가다가 절정에서 결연히 쓸려내려오는 그 곡조를, 너도 낮은 목소리로 따라 부른다.
저 무거운 노래의 후렴이 다시 까마득한 탑처럼 쌓아올려졌다가 쓸려내려오는 동안, 서른개의 관들이 차례로 트럭에서 내려질 것이다.
까마득한 탑처럼 쌓인 그날의 비극, 울분과 억울함, 반복되는 역사의 굴레에서 진혼들이 망령이 되어 나를 헤집는다. 그 고통의 날, 나는 그저 행복했다. 아무것도 몰랐다.
문득, 대학생이었던 과거의 나를 마주한다. 백양로 어디쯤, 어쩌면 문과대 건물 계단에서 그녀를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까. 그 시절, 가을바람과 낙엽을 보면 괜히 우울해져 일상의 루틴에서 벗어나버렸던 나의 나태한 모습이 지금 다시 죄책감처럼 재현된다. 역사적 부채를 상징하는 이 소년이 나에게 완전히 오는 것을 자꾸 피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내 안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소년을 어찌 뿌리칠 수 있을까?
그날의 동호를, 선주를, 진수를, 은숙을, 정대와 이름 없이 스러진 수많은 혼들의 아픔을 이미 알아버렸는데.
나는 다시 털고 일어선다.
이제는 키보드를 두드릴 시간이다.
잊으려 했던 모든 것을 붙잡고 기록으로, 내 글로 응답할 시간이다.
#한강 #소년이온다 #아픈역사 #외면하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