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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Nov 26. 2021

사이비와 무신론자

1.

고등학교 기숙사엔 사감 선생님이 상주했다. 사감은 유명 문학 작품 <B사감과 러브레터>의 사감처럼 히스테릭한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깐깐하고 고집스러운 면이 있어 우리들의 뒷담화 대상이 되었다.


2.

그녀는 나와 룸메이트의 방을 두고 ‘너희 방은 그렇게 더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청소가 된 것도 아니라서 늘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라는 쪽지를 남겼다. 그 때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종교적 색채를 발견했다. 깐깐한 성격만큼 그녀가 종교를 믿는다면 얼마나 신실할지 상상하니 오싹해져서 곧 그만두었지만.


3.

우리 집안은 가끔씩 불교를 재채기하는 무교 집안으로 사람들 자체가 종교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런 것 치곤 나는 꽤 자주 기도를 드렸다. 다른 집안보다 잦은 제사에 참석해서 조상님께 절을 하는 그런 것도 기도라고 할 수 있다면.


4.

룸메이트는 천주교를 믿었다. 우리가 종교로 갈등을 빚은 적은 없다. 내가 무교인 것은 신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다는 것을 뜻했기에 나는 그녀가 종교가 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해주기 전까진 물어볼 필요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세례명과 그 뜻을  말해주었지만 나는 늘 그것을 잊어버렸다.


5.

어느날 밤에 사감은 우리를 자기 방으로 초대했다. 사실 그 밤에 무엇 때문에 사감이 우리 방으로 찾아왔는지, 아니면 우리가 사감의 방으로 찾아갔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방에서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때의 사감은 점호 시간의 고집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동네에서 좀 배웠다는 티를 내고 다니는 인자한 노부인 같았다. 그녀는 선뜻 우리에게 방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복도에선 각 방에서 애들이 떠드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리고 있었다.


6.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사감은 그 날밤 말동무가 필요했던 것이 틀림없다. 방에 들어간 후론 사감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늘어놓은 이야기를 들은 기억 밖에 없다. 야밤에 잘 알지도 못하는 이를 붙잡고 털어놓는 이야기란 뻔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너무 강하지 않은 어조로 한탄했다. 그녀는 내가 그 날 받은 인상처럼 그 시대 평범한 여자들보다 훨씬 많이 배웠고 훨씬 큰 꿈을 꾸었으나 그 시대 여자였기에 결혼과 출산 이후 자신의 능력이 쓰일 곳을 찾지 못했다.


7.

11시면 기숙사 복도의 불은 모두 꺼진다. 11시가 되기 10여분 전에 사감은 우리보고 그만 돌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그냥 가기는 좀 그랬던지 그녀는 갑자기 오늘 이 귀중한 대화의 밤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고 했다. 종교가 있냐는 질문에 룸메이트만이 반갑다는 듯이 반응을 했고 둘은 세례명을 교환했다. 그 옆에서 가만히 있던 내게 사감이 '너는?' 하고 물었지만 '없어요.'라는 말 이외엔 응수할 것이 없었다. 그러자 사감은 기도를 안 드릴 수는 없으니 나에겐 조상신에게 기도를 드리라고 했다. 사감이 외는 성모와 주님을 향한 기도문을 들으며 나는 김명실 할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8.

잊고 있던 사감의 추억이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약 5년 후, 내가 서울에 처음 왔을 때이다. 나는 코엑스에서 영화를 기다리며 쇼핑몰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때 내 또래로 보이는 한 여대생이 다가와 길을 물었다. 그녀는 이 근처에 유명한 카페를 찾고 있다며 그 이름을 댔다. 나는 이 곳에 오늘 처음 왔기에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여대생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 그래요? 저도 여기 처음인데. 낯선 곳에 혼자 와서 좀 무섭고 쓸쓸하기도 했거든요. 영화 다 보실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같이 노실래요?


9.

영화가 끝난 후 나는 고풍스러운 유럽식 궁중 인테리어에 파르페를 파는 가게로 들어갔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 여대생과 무슨 할 말이 있을지는 몰랐지만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어떤 면모를 볼 수 있을거란 예감 때문이었다. 내가 그날 밤 사감의 방으로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달랐던 것처럼.


10.

내가 파르페를 한참 퍼먹고 있는 동안 그녀는 영화가 어땠는지를 물었다. 나는 그 영화가 어떤 점에서 인상 깊었는지를 열띠게 말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그녀는 다른 할 말이 있어보였다. 영화에 대한 내 이야기를 흘려들은 후 그녀는 눈빛을 달리하며 이렇게 물었다.


- 요즘 불안하거나 힘들지 않으세요?


11.

그 후 그 질문을 열심히 백업할 댄서들이 나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 불운, 그리고 풀리지 않는 인생…. 나는 여대생의 체면을 생각해 면전에다 대고 웃지는 못했다. 긍정도 부정도 보이지 않고 열심히 듣는 내게 그녀는 확신의 펀치라인을 날렸다.


- 척을 졌다는 말 들어보셨죠? 이게 다 조상들한테 척을 져서 그런 거거든요.


하지만 나는  말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감과의 밤이 떠오르고 말았다.  천주교 신자가 성스러운 기도문을 읊는 동안 떨떠름하게 서있다가 이름도   못할 김명실 할아버지 일가의 조상들께 감사 기도를 드린  . 나는 웃고 말았고 여대생의 표정도 덩달아 환해졌다. 그녀는 확신의 펀치라인으로  쓰러뜨렸다고 믿는 표정이었다.


12.

믿음과 믿음의 대결보다  치열한 것이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거짓 믿음과 무믿음의 대결이다. 그것은 최악과 차악을 견주어야 하는 선거와 같은 것이다. 정답의 기준은 명확하지만 오답의 기준까진 다들 생각해보지 않기에 이 싸움은 치열하다. 사이비에게 무신론자는 이렇게 말했다.


- 난 조상들이랑 척 안 졌어요.


- 하지만 마음이 불안하고 일이 잘 안 되는 건 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어요. 처음엔 믿기 힘드시겠지만요.


- 난 사실 조상한테 더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봐요.


- 힘들고 잘 안되는 일이 없으세요?


- 그게 없는 인생이 어디있나요?


13.

파르페나 먹으라는 나의 갈무리에 사이비 여대생은 황급히 자리를 떠 버렸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서 나는 녹은 파르페 안에 담긴 막대 롤리폴리를 씹으며 생각했다. 여대생은 왜 내 미소에서 자신이 이겼다는 확신을 얻었던 걸까. 여대생은 아마 그 미소를 구원을 향한 열망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14.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역엔 사람이 많았지만 저 멀리서 사이비의 익숙한 실루엣은 금방 눈에 띄었다. 무신론자 때문에 오늘 하루를 허탕친 사이비의 어깨는 처져 있었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구원을 원한 사람이 그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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