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에요, 과연?
뭐라카노
00아, 지우개 좀 빌려줄래?
17세의 봄, 같은 반 남학생으로부터 들었던 가장 충격적이었던 한 마디. 온실 밖으로 나왔던 당시, 내가 제일 당황했던 친구들과의 첫 대화였다. 일단 사람마다 개인 차가 있겠지만, 나 때는 그랬다. (라떼 아니고 그냥 진짜 내 관점) 첫 번째, 내 이름을 성을 떼고 부른다는 점. 보통이었으면, 적어도 같은 반 남사친이 날 부르는 케이스였다면, "야" 또는 "000“ 뭐 두 개를 합쳐서 "야 000”이었을 것. 두 번째 "빌려줄래?"라는 표현. 보통의 내 인생이었다면 "빌려도(경상도 사투리)", "지우개 있나?"라는 표현 등을 들었을 텐데, 오글거리는 마치.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문장으로 "빌려줄래?"라는 말을 듣게 되었던 것.
이 두 개의 관점에서 나는 저 말이 어색하면서도 충격적이었다. 문장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당황했고 같은 반 친구도 내게 뭐 자기가 잘못 말했냐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눌한 서울말로 내 상황을 설명했다. 그만큼 내게 그 서윗한 서울말은 어색했고, 시크한 경상도 사투리가 17세 땐 익숙했다. 물론 지금도 사투리가 익숙하다고 친구들은 말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급식 세끼, 기숙사, 그리고 서울말
말투도 말투였지만, 온실 밖을 처음 나왔던 그때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기숙학교였고, 학교가 끝나면 바로 기숙사로 들어가 최소 월~금은 가족보다 친구들 얼굴을 많이 보는 생활환경을 제공했다. 아침-점심-저녁 모두 '엄마 밥'이 아니라 '급식'이었다. 거기다가 친구들은 영어는 기본적으로 잘하는 아이들이었고, 전국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때 공부 좀 잘한다는 친구까지 섞여 있었으니 경쟁은 피할 수 조차 없었다. 좀 더 부가적인 설명을 하자면 중학교 때부터 기숙생활을 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나는 그들과는 조금 다른 '머글'로 느꼈던 것 같다. '독립'의 첫걸음이었고, 나의 선택이기도 했지만, 내 꿈을 향해 어쩌다 보니 '할 수밖에 없었던 독립'을 시도하게 된 것이었다.
내가 적응이 안되었던 것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언어. 같은 한국어지만 그때 까지만 해도 낯간지러운 서울말로 24시간 중 수면시간을 제외하고 대화를 해야 한다는 점. 둘째, 여중을 나온 내가 공학인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점. 이성에 눈을 뜬 건 아니었지만, 일단 그 여중과는 다른 분위기의 공학이 조금 어색했다. 그리고 마지막, 가장 컸던 것. 내 스케줄의 인터미션마다 엄마가 없다는 것. 마마걸 같은 발언이겠지만, 그게 엄청난 영향력을 차지했다. 분명 중학교 때만 해도, 수업이 끝나면 엄마가 집에서 기다렸다. 때로는 학원 앞을 찾아오기도 했고, 학원 중간중간에 도시락이나 먹을 것을 사서 차에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그만큼 나와 엄마는 24시간 붙어 다녔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입학 후, 내 삶은 180도 달라졌다. 학교 앞은 커녕, 거주지에도 엄마는 없었다. 당시의 2G 폰으로 전화를 해야 간신히 듣는 게 엄마 목소리였을 뿐이었다.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합격"이라는 한 글자가 내 인생을 180도 바꿔놓은 것이었다. 그 180도가 전해준 긍정이 컸지만, 인사이드 아웃에서 보여주는 사람의 감정의 종류처럼 180도에도 수많은 감정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곁에 없는 것만이 차이점이 아니었다. 엄마는 나를 그 고등학교로 일종의 유학을 보내신 뒤, 워킹맘이 되셨다. 학원에서 일을 시작하셨고, 더더욱 바빠졌고 우리는 그렇게 물리적인 거리뿐 아니라 시간적 여유 조차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두 명을 서울로 올려 보내고 적적한 시간을 채우기 위한 'Working'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 크고 난 뒤에 어느 정도 경제를 깨닫고 난 뒤 생각해보면, 유달리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당시의 비싼 학비를 위해서 워킹맘이 되신 것도 이유의 일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이 나를 이끌었고, 온실 속의 화초는 밖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