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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P, 인생 진행 중

plologue. Life In Progress

by 디디


‘내가 나를 아는 게 그리 중요한 일인가?’

대답은 예스.


살면서 부딪히는 순간이 올 때마다, 나는 꽤 자주 지난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지금 벌어진 문제나 상황이 마치 과거의 나로부터 온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때마다 내가 선택한 건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더더욱 굳게 먹는 것. 아픈 거 들춰봐야 아프기만 하지. 지난날의 아픔이나 상처는 단단한 상자에 넣어 마음 깊은 구석 잘 보이지도 않는 어딘가에 꽁꽁 숨겨둔 채 현재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날까 봐 두려워하며 입을 닫고 관계를 닫고 살았던 날들. 2-30대의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고 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믿을까. 안 괜찮은 날들이 훨씬 많긴 했지만, 겉으로 괜찮은척하면서 살다 보니 또 그렇게 살아지긴 하더라. 특히 프리랜서일 때에는 일에만 집중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덕분에 일하며 제법 자유롭고 꽤 괜찮은 시간을 보냈다. 커리어적으로도 꽤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동안 쌓은 경험치만큼 나도 분명 성장한 거나 다름없으니, 이제는 나도 사업자등록을 하고 내 이름으로 된 회사를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 프리랜서였다.

프리랜서로만 10년을 보냈다. 그리고 40대를 사업자등록과 함께 시작했다. 프리랜서를 벗어나니, 이전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을 일들을 전부 해야 했다. 먼저 용기 내서 제안을 해야 하거나 평소에 해본 적도 없는 홍보를 있는 힘껏 해야 했다. 10개월이 지나가는 지금,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은 원래도 많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고 일은 늘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며, 별 성과 없는 것 같은 홍보도 지지부진하다. 하지만 일을 좀 더 제대로 해보기로 했으니 이것저것 관련 세미나도 듣고, 마케팅 강의도 들어보며 나의 비즈니스 모델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시간도 늘었다.


겉으로 봤을 땐 크게 달라진 건 거의 없지만 속으로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회사를 위한 생각과 일에 대한 고민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스스로에 대해 더 깊게 알게 되어간다는 것. 진짜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선 그 상자를 꺼내야 했다. 꽁꽁 숨겨둔 상자 앞을 철벽처럼 세워뒀던 벽을 허물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 와서 잘 숨겨둔 상자를 굳이 꺼내서 들춰보려는 이유는 하나다. 나를 잘 알고 싶어서.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를 격려해주고 싶어서.


우리는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토록 ‘사업자등록을 낸 행위’에 의미사장이자 직원인 1인 기업인 내가 ‘사업자등록’이라는 행위에 이토록 의미를 부여했던 이유도 어쩌면 그 공식적인 인정을 받고 싶어서였으리라. 하지만 진짜 인정은 타인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된다는 사실. 나는 그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확실히 ‘마흔이 되면 두 번째 사춘기가 찾아온다’라는 말은 틀리지 않는다.




나는 디자이너다. 수많은 디자인 분야가 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편집, 출판 관련 그래픽 디자인을 오래도록 해왔다. 이 분야 작업을 위해서는 빠질 수 없는 디자인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건 바로 ‘인디자인(Indesign)’이다. 인디자인이 처음 출시되던 해, 대학에서는 그 프로그램으로 과제를 제출해야 했다. 배워본 적도 없는 프로그램을 몸으로 익혔다. 교수님이 툴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지 않은 건, 아마 부딪히며 배우는 것만큼 빠른 습득은 없다고 생각해서이지 않았을까? 다행히 그때의 경험은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경험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었다. 디자인 분야 가릴 것 없이 이것저것 많은 디자인을 해나갔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디자인 작업에서 이 프로그램은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툴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프로그램을 쓰다 보면 아직도 모르는 기능이 종종 발생한다는 것. 필요한 기능을 하나씩 습득할 때마다 점점 능력이 향상되는 걸 느끼게 된다. 인디자인의 툴을 배우듯, 나의 삶도 조금씩 편집해가고 있다. 반복되는 수정과 저장을 통해 나를 다듬어가는 일.


WIP. Work In Progress. 작업 진행 중. 디자이너는 물론 무언가 만드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사용해 볼 법한 단어. 인생 또한 이 단어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프로그램을 오래도록 사용해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기능을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내 능력치가 진행 중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처럼, 그동안 몰랐던 나를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삶 역시 진행 중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책을 디자인하는 일. 새 창을 열고, 판형과 여백을 정하고. 그리드와 스타일을 통해 기준점을 잡는 일. 0.1pt의 미세한 차이와 남들 눈에 비슷해 보이는 수많은 서체들 속 디테일의 차이를 발견하는 일. 지난한 수정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내보내기 기능을 통해 인쇄용 파일을 만들어내는 일. 매일같이 여는 인디자인 창 속의 기능들을 살펴보다 내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장 가까운 ‘내 일’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면 나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그리고 이 마음이 이어져, 나와 비슷한 누군가에게도 조용한 격려가 될 수 있다면—. 그 마음으로 이야기를 기록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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