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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1년 만에 제법 규모 있고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할 수 있었다. 비록 쥐꼬리만큼 작은 월급이었지만 오롯이 ‘일’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었던 회사 생활과 달리, 우리 집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제 막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한 내가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나의 아버지는 내게 대출을 대신 받아줄 것을 부탁했다. 아. 입사한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았는데. 그렇지만 신용불량자라 직접 대출이 어려운 아버지를 대신해 내가 받는 것일 뿐, 원금과 이자는 아버지가 매달 갚을 거라고 했으니- 어려운 집안 사정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뿐이었다.
내 이름으로 대출을 받고 내 번호로 매달 문자가 날아왔지만, 아버지는 제법 꼬박꼬박 이자를 해당 계좌로 송금했다. 그래 내 역할은 다 했으니 별 문제없겠구나 생각했다. 200만 원, 300만 원, 그게 대부업체 대출인 줄도 모르고 부탁하면 부탁하는 대로 응하는 게 나의 최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는 직접 내가 사인을 해야 대출을 해주는 조건이 있으니, 담당자에게 연락이 오면 사인을 잘하면 된다는 부탁을 받았다. 이번에도 역시 당연히 알겠다고 했다. 나는 사인만 하고 이름만 대는 것이고, 아버지가 다 갚아나간다고 했으니까. 사인을 위해 서류를 가져온 담당자를 회사 1층 카페에서 만났다. 그때 서류 한 번만 잘 챙겨볼걸.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그 사인은 그동안 받았던 대출금 이자를 갚기 위해 받는 또 다른 대출이었다. 엄청난 고리대금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내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자를 내야 하는 날엔 하루에도 몇 번씩 문자와 전화가 날아왔다. 돈이 들어올 때까지 그들은 지독하게 연락을 했다. 어쨌든 대출을 받은 건 나니까. 독촉을 받은 나는 다시 아버지에게 독촉하는 상황. 회사에 도무지 집중을 할 수 없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때로는 사랑보다 부채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고리대금 대출인 줄도 모르는 멍청했던 나였지만, 그래도 이미 벌어진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같이 갚아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가족 모두에게 오픈하고 조금씩이라도 같이 갚자. 그럼 조금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그러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가진 것 없는 상황일 때 재혼한 것도 모자라 그런 상황까지 새어머니에게 그 힘듦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다더라. 아니 그럼 나는요. 그리고 이미 재혼하신 지도 10년이나 되셨는데요.
그때의 나는 정말 벼랑 끝에 있는 느낌이었는데,
아버지의 그 한 마디는 나를 벼랑으로 미는 것 같았다.
단지 집안에서의 균열만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인생에서 또 다른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금 더 나은 보수를 기대하며 들어갔던 회사는 내가 입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당연히 월급도 밀렸고, 소송까지 진행하려 했지만 민사로 넘어가버려 그조차 할 수 없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의 일이다. 가진 것 하나 없이 결혼해 반지하에 겨우 살며 빚부터 갚아나가던 그때 월급이란 절대 끊기면 안 되는 수입원이었다.
사라진 회사로부터 나와 2주 만에 당장 들어갈 수 있는 회사에 들어갔다. 안타깝지만 거기서도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대체 회사 생활이라는 것이 왜 이렇게 녹록지 않을까. 첫 단추부터 꼬여서 그런 걸까. 하지만 내겐 선택지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월급이 안 나오면 월급이 나오는 회사를 찾아 옮겨 다녔다. 그렇게 옮겨다닌 회사만 총 5곳, 7년 간의 회사생활은 프리랜서 시작과 함께 끝이 났다.
가끔 내가 선택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한 것이 정말 최선이었을까 생각한다. 어차피 선택은 이루어졌기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것들 뿐이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늘 같은 곳에 머무른다.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그 한마디. 그로 인해 내가 내렸던 선택. 내가 좀 더 참았더라면 내 삶이 지금과는 달라졌을까? 아니 삶이 지속되긴 했을까?
햇수만큼 옮겨 다녔던 회사 생활, 독립해 10년이란 시간을 보냈던 프리랜서 생활에는 늘 불안과 함께였다. 프리랜서일 때의 수익은 회사생활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상대적으로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나는 그 회사에 오래 다니고 싶었다. 정해진 틀을 중요시 여기는 내게 탄탄한 조직 생활은 안정감 그 자체였으니까. 그런 내가 어떻게 이 오랜 시간을 프리랜서로 버텨왔으며,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혼자서 책임감 있게 일을 꾸려보겠다고 1인 회사의 길을 자처했을까.
인생은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주어진 환경에 따라 때에 맞는 환경 설정이라면 어떻게든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한참 꿈을 그릴 수 있었을지도 모를 나의 이십대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내게는 꿈은커녕 당장의 생계가 우선이어야 했던 시절. 그 거친 시절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대견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글로 써 내려갈 수 있는 것조차 내겐 큰 발전이고 용기이며 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