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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Sep 07. 2020

이쪽으로 오신다고요?

어쩌다 보니 몸에 베인 을의 삶

나는 주로 집에서 일한다. 집이 곧 사무실인 셈. 직업 분야 특성상 많은 사람과의 협업을 통해 일이 진행되는 게 아니라, 주로 클라이언트(담당자 혹은 대표)와 나 즉, 일대일 관계에서 진행되다 보니 애초에 사무실은 그리 효율적이지 않았다. 더구나 일을 시키는 입장인 클라이언트가 내가 있는 사무실로 오는 경우는 없었다. 주로 내가 가야 하는 입장. 그래서 몇 년 전에 공유 오피스 생활을 해보다가 6개월 만에 사무실을 정리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늘 서울을 바라보며 사는 나에겐 사무실이 서울인 클라이언트의 미팅 요청이 은근히 반갑다. 막상 한 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을 할애해 클라이언트의 사무실에 도착하면, 20분도 안돼서 끝나버리는 회의에 허탈할 때도 있지만 별 수 있나. 정말 바빠 죽겠는 상황에 부르는 것도 아닌 데 가야지 뭐. 간 김에 서울 구경도 좀 하고.


사실 처음부터 이런 쿨한(?) 마음을 가졌던 건 아니다. 서울 외곽에 사는 내게 3시 미팅은 아무리 못해도 1시 반에는 무조건 나와야 하고, 1시 반에 나가려면 적어도 1시간 전에는 정리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니까 3시 미팅을 위해 3시간 전부터 준비를 해야 하지만, 막상 가면 2-30분 남짓한 미팅에 황당하고 허탈했다. 미팅만 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도, 결국 그날 하루는 이렇게 날아가버리는 셈.


그렇다고 미팅을 많이 하는 건 아니지만 열이면 열 내가 가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어쩔 수 없다면 이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이자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미팅이 잡히는 날엔 사전에 다른 일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전날 일을 더 해서라도 일정을 맞춰 놓고, 오랜만에 서울에 나가는 김에 서점에도 들르고, 평소 궁금했던 다른 장소들도 찾아가 보는 패턴을 만들었다. 미팅 겸 리프레시 데이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얼마 전 새로 만나게 된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미팅을 하기 위해 내가 있는 곳으로 직접 오겠다는 말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이쪽으로 오신다고요?”

“제가 실장님 계신 곳으로 가죠. 근처에 미팅할 만한 카페는 실장님이 찾아주세요.”

“아 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실까요? 괜히 제가 죄송해서요.”

“제가 이동이 수월하니 제가 움직일게요. 느지막이 미팅하고 저도 바로 퇴근하면 되니까 죄송해하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일을 맡기는 사람이 직접 오겠다니. 그것도 우리 집 근처까지. 물론 클라이언트의 사무실과 집 사이에 우리 집이 가운데 있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나에겐 굉장히 생소하고 새로운 기분이었다. 프리랜서로 일하며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라 얼떨떨했다. 이게 이렇게 묘한 기분이 들 일인가?


결국 첫 미팅은 평소에 자주 갔던 집 앞 스타벅스에서 이뤄졌다. 그 뒤로도 앞으로의 미팅은 계속 이곳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뭔가 내 생활권 안에까지 직접 찾아와 일을 맡겨주는 클라이언트가 고맙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했다. 철저히(?) 몸에 베인 을의 삶 때문에.


디자이너는 예술과 밀접해있는 직업이지만 그 앞에 ‘생계’가 더해지니, 생각보다 갑을관계를 받아들이는 건 수월했다. 돈 주는 사람이 갑. 그 돈을 받기 위해 원하는 바를 성실히 이행해주어야 하는 나는 을. 보통 갑이 있는 곳으로 을이 가게 마련이지, 갑이 기꺼이 을의 편의를 봐주진 않는다. 원치 않는 디자인 수정? 결국 해줘야 한다. 갑이니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인 디자인은, 늘 서로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어떠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클라이언트들은 디자이너를 오퍼레이터로 여길 때가 많다는 점. 이게 나에겐 가장 어려운 문제이자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숙제다.


철저한 갑을관계 속에 풀지 않은 숙제를 늘 안고 사는 와중에 만난 클라이언트의 말은 그래서 더욱 새로웠다. 그럼에도 그저 단순한 오퍼레이터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는 을인 내가, 조금은 대접받는 것 같아서. 고작 미팅을 위해 나의 편의를 봐준 것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긴 글을 쓰고 있다는 게 어쩐지 조금은 슬프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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