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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지연 May 14. 2023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두번째 긴긴밤


다시 읽은 긴긴밤은 왜 이렇게 슬픈가, 예전에 읽었을 땐 눈물이 날 정도는 아니었는데 자꾸만 왈칵 울컥하는 순간이 많았다. 이미 결말을 알고 보는 이야기라, 처음 읽었을 때보다 조금 더 노든의 생에 대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생각해보게 됐다.


언젠가부터 살면서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어떤 선택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많아졌다.

상상해본다. 내가 그렇게 선택하지 않았다면, 무언가 달라진 게 있었을까? 지금의 나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있을 수 있었을까?

가끔은 또 진심으로 고민해본다. 만약 어떤 과거의 한 순간으로 갈 수 있다면 언제 어느 순간으로 갈까?

친한 친구들과 좋아하는 단골 대화주제도 과거로 간다면 언제로? 간다면 지금의 기억을 갖고 갈 것인가, 잠깐 갔다가 돌아오는 게 좋은가 아니면 거기로 가서 아예 새롭게 살아볼건가 등이다.




지혜롭고 현명한 코끼리들과 평화롭게 살던 노든.

심사숙소 끝에 스스로의 앞날을 직접 선택하고, 바깥세상에서 아내와 딸과 함께 상상했던 것 이상의 행복을 느꼈던 노든.

그러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모든 걸 부수고싶은 마음으로 살다가 친구 앙가부와 마저도 헤어지고서, 그 길 위에서 만난 치쿠.


오래도록 치쿠와 함께 길고 길고 길고 긴 긴긴밤 동안

그저 살아내기 위해 앞으로 걷고 또 걸어야만 했던. 결국 알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바다에 가기까지 펭귄이 잘 성장하도록, 그리고 스스로 바다에 갈 수 있도록 해주었던ㅡ

괴테가 자녀에게 주어야 할 두가지라고 이야기했다는, 날개와 뿌리를 모두 펭귄에게 잘 전해 준 노든.


노든은 그 수많은 고행같은 고된 일들과

가슴 깊이 계속 헤짚을 수밖에 없는 아픔들과

가늠할 수 없는 비극적인 헤어짐들.

그리고 세상을 향한 분노가 있었던 후에도,

코끼리 고아원을 나오기로 했던, 바깥세상으로 나온 그 일을 “후회하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좋아하는 영화 <컨택트>가 생각난다. 우리가 결국 헤어진다 해도, 그래서 무척이나 가슴 아프고 슬프더라도, 온갖 고난과 환멸과 분노와 고행 속에서도


그럼에도 그랬기에

’내가 너를 만날 수 있었기에’


그저 오직 너일뿐인 너를 만나 함께 할 수 있었기에. 그 잠깐의 시간, 찰나의 순간에 너와 함께 존재할 수 있었기에. 그러므로 아무리 그 지난한 과정이 힘들고 고통스럽다 해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거라는, 너를 만나기 전의 나로는 돌아가고싶지 않은, 어쩌면 그래서 내 생의 의미가 비로소 생긴다는 게 정말로 정말로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너무나 너무나 아름답고 슬펐다.


”생각해 보면 나는, 원래 불행한 코뿔소인데 제멋대로인 펭귄이 한 마리씩 곁에 있어 줘서 내가 불행하다는 걸 겨우 잊고 사나 봐. 아까는 미안했다.
자, 이리 와, 안아 줄게.“

- 루리, <긴긴밤>




생각해 보니 나는, 내가 어떤 과거의 한 순간으로 가는 것을 상상할 때 그곳엔 늘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꼭 필요로 하고 좋아하는 내가, 과거로 가고싶은 순간들을 누군가와 함께 있던 순간들이다. 그 존재가 좋든 싫든, 밉든 애정하든 그 때의 네가, 그리고 그 때의 내가, 우리가, 그립고 보고싶은 것이다.


내 한 번뿐인 생에 나는 너와 이미 만났기에, 그리고 나는 이미 너를 만난 사람이기에. 이미 만나고 난 후에는 만나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기에.


그러므로 몇 번이고 돌아간다 해도, 또는 가지 못한다 해도, 나는 아마 달라지지 않고 지금의 나일 것이다. 맞아 다시 만나도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분명 너는 나를 알아보고, 나는 너를 알아보겠지.


그러니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이리 와, 안아 줄게.“





글 성지연 ㅣ 표지그림  oam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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