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생물학적 나이가 어느 기점으로는 쇠퇴하듯, 한 사람의 문화적 나이는 스무 살 무렵 쯤 결정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 그 시절 한참 들었던 음악, 좋아했던 책, 사랑했던 영화들은 어떤 한 사람의 ‘취향의 지평선’을 만든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더 깊어질 순 있어도, 더 넓어지진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에 사랑했던 것들을 늘 다시 보고싶었다. 그렇게 처음 만났던 순간들, 충격적으로 좋았던 감각들, 애정이 가득 그득 흘러 넘쳐서, 누군가에게 이런 것도 있어! 진짜 너무 너무 좋아!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마음들 말이다.
그리웠다. 그래서 다 늙은 사람이 라떼 이야기하듯, 언젠가부터 예전에 내가 지금보다 젊은 시절 좋아했던 예술작품들을 하나씩 다시 찾아봤다.
음 이건 내가 어떤 사람을 진짜 많이 사랑했을 때 들었던 음악. 좋다, 좋다, 좋긴 좋은데 에이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미련은 아니고 너는 진짜 나쁜 X였어, 아 괜히 기분 나빠진다 듣지 말자.
그래 ! 이건 내가 정말 좋아했던 드라마. 이거 정말 명작이지. 그 당시 시청률은 안 나왔더라도 매니아층이 꽤 두터웠다니까?진짜 보고싶을 때 애껴서 다시 보기 해야지. 아니 근데 어라, 이게 뭐야 내가 이렇게 고리타분하고 차별적이고 구태의연하며 고루함이 뚝뚝 떨어지는 작품을 좋아했다고? 너무 구리다, 구려. 아 이건 아니지,
알았다, 책이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님의 신작이다 ! 좋다. 좋다 그래 뭐 꽤 좋긴 좋은데 역시 아무리 그래도 작가님은 예전 그 때 그 책이 최고야. 이거 읽고 예전 그 책이나 한 번 더 보자.
그 때 그 시절에 사랑했던 작품들 중에 다시 봐도 보고 또 보아도 그 때처럼 엄청나게 좋은 건 많이 없었다. 작품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걸 보는 내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렀고,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고. 아니 어쩌면 지나간 사랑이 그렇듯, 작품이 그리웠던 게 아니라, 그 때의 내가 그리웠을 수도 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정말 애정하는 영화 중 하나로 꼽았던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를 다시 보기가 두려웠다. 대학생 시절에는 정말 좋아서 서너번은 봤었는데, 지금 다시 보고 다르면 어쩌나, 다름을 넘어 별로면 어쩌나. 그래서 늘 관심작품으로 해놓고 보지 않았다. 직면하고 싶지 않았다. 책상 서랍장 어느 한 구석에 모아둔 앨범처럼. 늘 가까이 두고 언제라도 볼 수는 있지만, 굳이 한 번도 꺼내지는 않는 옛날 일기처럼. 때로는 진짜 보고싶고 그리운데도, 보고싶고 그리운 대로 놔두고 싶었다. 그러다,
봤다. 그리고 웃기게도 이 영화를 보고 울었다. 아니 이게 이렇게 슬픈 영화였어?
예전에는 되게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고, 삶의 어려움을 딛고, 그럼에도 무언가 해 보려는 긍정성을 지닌 영화라고 마냥 생각했었다. 영화 속에 나오는 라이프지의 모토는 여전히 심금을 울렸다. 가장 명대사로 알려져있고, 나도 늘 그렇게 생각했던 유령 표범 앞에서의 숀 코넬 대사도 역시나 좋았다. 그런데, 지금 이 나이여서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아 저 장면에서 저 상황에서 저렇게 표정을 지었었구나, 저 장면에선 저런 크나 큰 용기가, 또 저 장면에선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있었겠구나, 진짜 아예 새 작품을 보듯 정말 새로웠고 웃겼다. 게다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는 몇 번이나 눈물이 났고, 어떤 장면에서는 엉엉엉엉 가슴 맺힌 것들이 터져나오듯 울게 됐다.
아니 뭐야 이거, 너무 좋잖아. 너무 좋다, 좋다, 좋아, 다행이다. 어쩌면 안도의 울음이기도 했다.
취향이라는 어떤 선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만 머물렀던 것은 나였고,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를 규정지어놓았던 것도 나였다. 이럴까 저럴까 그렇지는 않을까 머뭇거리고 망설이다 놓치고 있는 것도 나였고, 그저 계속 그 때처럼 똑같이 좋기를 바라는 말도 안 되는 이상적인 그림을 그리던 것도 나였다. 애초에 똑같을 순 없어. 우리는 지금 다시 새롭게 또 만나는거니까. 너도 그 때의 너가, 나도 이미 그 때의 내가 아닌 걸.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나도 어디로 갈지 나 자신도 그 누구도 모른다. 그리고 정말 좋았던 게 싫어질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그게 꼭 좋지 않아서 슬픈 것만은 아니다. 좋아했던 만큼 마음껏 싫어하는 자유를 누릴 수도 있다. 그만큼 내가 성장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내가 작가라면, 박물관에 고이 모셔져 보관만 잘 되어있는 작품이 아니라, 자꾸 꺼내어 봐서 낡고 반들반들하다 헤지더라도 자꾸 봐주고 자꾸 만져주고 자꾸 무엇이든 이야기를 해주길 바랄 것이다. 무엇이든 나눠주길 바랄 것이다. 이걸 보고있는 요즘 너는, 그래서 너는 좀 어때, 말을 걸고, 묻고, 네 이야기도 듣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그 지평선을 넘어볼 것.
폴짝, 가뿐히, 슬쩍.
그리 넘어가면 또 뭐가 있을지 모른다.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