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한 응원 ㅣ 이탈리아에서 만난 가죽 장인 메어준 응원
제 영어 이름입니다.
제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회사에서 저를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음원으로 등록한 제 싱글 앨범 예명도 비슷하게 썼습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지어진 이름이냐고요?
네, 꽤나 단순명료합니다.
영어 학원 선생님이 지어줬습니다.
열심히 학점을 따야할 때도 있었으니까요.
외국 유학 시절 얻은 멋드러진 이름이나, 유래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지만
사실은 누구나 한번쯤은 가지고 있을 영어학원에서 가장 친근하게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래도 최 다니엘, 강다니엘 유명하신 분들의 덕을 본 기분 좋은 애칭이기도 합니다.
"DANNY"
제가 매일 같이 들고 출근하는 가죽 가방에도
이 영어 이름의 색인이 들어가 있습니다.
매일 146번 파란 버스에 몸을 실을 때마다
삐걱대는 어깨 끈 소리가 매력적인 이 가방은 제 애착 가죽가방이 되었습니다.
제가 워낙 물건을 막 쓰는 터라 여기 저기 까지고 패였지만
나름 가죽 에이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명품 가방은 아니지만, 이래봬도 이태리에서 온 가방이죠.
이 가방과의 첫 만남은 2년 전
신혼 여행 때 로마의 한 가죽 가방상점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로마에서 골목 골목을 산책하다 우연히 발견한 상점이었죠.
유럽 특유의 앤틱한 느낌 물씬 풍기는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오래된 가죽 공예 상점이었습니다.
크기는 작았지만 대로변에 자리 잡아
오가는 사람이 많아 제법 관광객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죠.
산책하면서도 자꾸만 눈길을 주던 제 눈치를 알아차렸는지
제 와이프가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에 상점에 들러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가방 하나 사자! 서류가방도 없어서 매번 에코백 들고 출근하잖아!"
생각해보니 늘 제가 메고 다니던 에코백이 많이 해져서
가방 하나 마련하면 좋겠다 싶었던 거죠.
한참을 산책하다 빙 둘러 저녁까지 먹고
산책하듯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그 가죽상점에 들렀습니다
대로변을 사이에 두고 한쪽엔 가죽 공방이, 한쪽엔 부티크가 차려져 있었고
여주인장께서 운영하는 곳이었죠.
가죽 공방 안에는 가죽 재단부터, 무두질, 세공까지
가죽 가방 제작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짙은 가죽 냄새가 어우러지는
말 그대로 이곳이 이탈리아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부티크에선 작은 서류 가방부터 손가방
아주 큰 여행용 수트 케이스까지
한땀 한 땀 수제로 만든 가죽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제 눈에 한번에 들어온 건
무두질이 곧게 되어 있어 누가 봐도 반짝 거리는
서류 가방용 가죽 가방이었습니다.
이 가방 저가방을 둘러보아도
그 가방이 제일 마음에 쏙 들어왔죠
제 눈을 읽은 부티크 여주인께서 친철하게 다가왔습니다.
패인 눈가 주름에 살짝 얹은 돋보기 안경에,
약간 헝클어진 금발 머리에 살짝 마른 인상이었죠.
특유의 이탈리아 억양이 석인 영어로 저에게 마음에 드냐고 물어왔습니다.
쭈뼛거리는 저를 재쳐두고 와이프가 잽싸게 가격을 물어봤습니다.
여사장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죠.
"오 그건 1000유로가 조금 넘어요"
역시 예쁜 건 비싼 값을 하는 걸까요
겉으로 보기에 유려했던 가죽과 만듦새가 돋보이던 그 가방은
수제로 만든 완전 천연 가죽가방이었습니다
저는 제 주인을 찾아가도록 듣자마자 바로 내려놨습니다.
아쉬워하는 저와 눈이 마주친 주인장께서는
재빠른 눈짓으로 바로 옆 진열장에 있는 가방을 가리켰습니다
"오, 이쪽에 있는 것들은 어때요? 인조 가죽이지만 여전히 멋스러워요! 가격도 훨씬 저렴합니다"
제 보는 눈이 부족할진 몰라도, 가리킨 진열장에 있는 가방들도
충분히 멋스럽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제 눈엔 명품 못지 않았죠.
그 중에서도 바로 눈에 들어온 건 두 번째로 진열되어 있는 가방이었습니다.
갈색 바탕에 은은한 글로시함이 손에 들고 이리저리 둘러볼 때마다 빛나는 멋이 있었습니다.
잠깐 망설이고 있는 저희 부부를 보고 여주인은 이렇게 말했죠
"구매하면 가죽에 이름도 새겨줄 수 있어요. 딱 하나 밖에 없는 가방이 되는 거죠"
멋진 유혹이었습니다.
이태리 신혼여행에서 만난 딱 하나 밖에 없는 가방이라니
어떤 명품보다도 특별한 이야기가 피어오른 것 거죠
"이걸로 할게요!" 라며 바로 저희의 지갑을 열렸습니다.
그때 만큼은 웬만한 쇼퍼홀릭 못지 않은 자신감으로 대답했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돼요, 시뇨르?"
순간 이름을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되긴 했습니다.
한국 이름을 적자니 영어 철자가 너무 길어질 게 뻔했죠
그래서 바로 생각해낸 게 다니엘. 제 영어 이름이었습니다.
가방에 좀 더 애정을 담고 싶었습니다.
신혼여행에서 산 특별한 경험이었으니까요.
"대니로 해줘요!"
여주인은 능숙한 솜씨로 쇠로 된 색인들을 가져와
뚝딱뚝딱 조합을 완성하더니 예시용 가죽에 이름을 꾹 누르고 저에게 보여줬습니다.
"DANY"
앗, 이탈리아에서는 익숙치 않은 이름이라 그런지
제가 생각했던 제 영어 이름에서 N이 하나가 빠진 철자로 찍어서 준 겁니다.
그래도, 저는 다시 철자 조합을 만들어 달라기엔 수고스럽기도 하고
어딘가 이탈리아스러운 철자라고 생각해서인지(이건 그냥 제 생각이죠)
완전히 제 이름과 똑같지는 않지만, 그것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괜찮아요"
사실, 제 말버릇 중에 하나였습니다.
사양을 하든, 거절을 하든, 자못 만족을 하든
완전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쓰는 표현이었죠.
그러자, 여주인 딱 잘라서 다시 말합니다.
"노노. 이츠 낫 오케이 (It's Not Ok) (안 괜찮아요!)"
"If it is not you, It is not OK, OK?"
(이게 당신이 아니면, 안 괜찮은 거예요. 알겠어요?)
"If it is not you, It is not OK, OK?"
아, 그렇습니다.
저는 그저 철자하나 빠진 것 쯤이야 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여주인의 짧은 말에는 저에게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단순히 이름이 아니라, 괜찮다라는 말 속에 숨겨진
지난날들의 제 인생에 많은 순간들의 태도가 떠올랐기 때문이죠.
N하나 빠졌다고 괜찮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양보해도 괜찮다
수고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남들에게 폐가 되고 싶지 않아서
어쩌면 그런 양보가 저의 입버릇인 '괜찮아요'라는 때문에
진짜 내 모습이 이르지 못했던 순간들은 없었을까
어느 순간 주저하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죠.
단 하나 밖에 없는 로마에서의 이 순간은 물론이고
우리 인생의 그런 순간은 없었는가라는 생각과 함께 머리를 스쳤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순간들을 떠오렸습니다.
남의 눈치가 보여서, 혹은 익숙해져서,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누군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특히, 한국 사회에서 사는 우리들은 학생이니까, 장녀니까, 가장이니까, 엄마니까, 신입이니까, 늙은이니까
다른 이름에 스스로를 양보하고 있진 않은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어딘가 바꾸거나, 어딘가 빠진
우리의 모습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DANNY" 철자를 고친 색인 예시를 다시 보여주고는
여주인은 싱긋 웃었습니다.
"It's You, OK? (이게 당신이죠? 괜찮죠?)"
네, 이츠 오케이. 정말 괜찮았습니다.
잠시 멍하는 순간에 결제 카드까지 놓칠 뻔 했지만
그렇게 저에게는 소중한 추억과 함께 멋드러진 가죽 가방이 생겼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저의 이름을 가진 가방이었죠.
결제를 마치고 상점을 나가면서 저는 먼 타국에서 가르침을 준 그녀에게
"Thank You, Lucky to meet you(고마워요. 당신을 만난 게 행운이네요)"라고 인삿말을 건넸습니다.
주인장은 제 아내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Oh, Your're lucky to have her(그녀와 함께인 너가 행운이지!)"
서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에게 이보다 쿨한 축복이 또 있을까요.
저는 그날 정말 럭키였습니다.
저는 오늘도 DANNY가 새겨진 가방과 함께
바쁜 출근길에 오릅니다.
신혼여행의 단꿈에서 깨고나선
여전히 일상은 똑같습니다.
여주인의 말처럼
전혀 괜찮지 않은 날들도 계속되죠.
바쁜 야근에, 일상의 헛바퀴에 지칠 때도 있죠.
하지만 그 이후로 생각합니다.
어디에 이르든, 무엇을 하든
만약 그게 내가 아니라면
전혀 OK하지 않다는 걸요.
여러분도 그 어느샌가 양보한 스스로를
찾아보면 어떨까요. OK한 진짜 제 모습을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가죽 가방을 들고 출근합니다
생채기 나고 헤져도 있는 그대로 매력인 것처럼
나라는 존재도 헤지고 상처 받아도
다른 사람이 아닌 나로사는 법이니까요
내가 내가 아니면 그건 괜찮지 않으니까요
나는 나라서 참 괜찮습니다
"Danny,It's Lucky you!"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