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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왔으니까, 맑아진 거지

묵묵한 응원ㅣ지금 흐린 날씨를 마주한 당신에 대한 예보

by 쪼의 세상

요 사이 날씨가 짖궂습니다

봄 바람에 와락 기분이 좋아질 법도 한 계절인데

주말 사이에는 하루 종일 우중충하게 비가 장마의 예고편이라도 되는 듯이

쏟아 붓다 말다를 반복하는 날씨였습니다

바싹 말려둔 축구화를 들고 오랜만에 축구를 하러 가려던 찰나에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 주말 내 날씨 핑계 삼아 뒹굴 거렸습니다

올 여름은 조금 덜 덥다는데,

그 약속만 지켜준다면야 이번 주말 궂은 날씨는 조금 용서해줄까 싶기도 합니다.


'12: 45 PM 테이크 아웃해주세요'

괜히, 추적해진 날씨에 오늘은 점심에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회사 근처를 빙 둘러 사무실로 왔습니다.

멀리까지 갔다가 사거리 즈음에 왔을 때

얼마 전 날씨를 보며 들었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얼마 전엔 비가 왔다가 날씨가 갑자기 하루만에 쨍하고

좋아진 적이 있었습니다

맑았다가, 비가 왔다가, 다시 게었다가. 변덕스럽게 날씨가 술래잡기 할 때였죠.

봄 기운을 빌려 나들이 가기 좋은 날씨 덕에

와이프와 함께 드라이브를 재빨리 나갔던 적이 있습니다


들 뜬 마음에 핸들을 두드리며 혼잣말로

"어젠 비가 왔는데 오늘은 맑네, 신기하다"라고 말했더니,

와이프가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가 왔으니까, 맑아진 거지"


별 거 아닌 당연한 사실인데, 그 날 그 말이 귓잔등을 간지럽혔습니다.

괜시리 울림이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날씨가 가장 화창하게 맑은 날은

대게 비기 온 바로 다음날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게인 날이었습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당연한 말은 기억하면서

비온 뒤에 맑은 하늘이 펼쳐진다는 건 새삼 다르게 들렸습니다.


'12: 51 PM : 파란 불'

사거리를 반환 점으로 다시 회사로 돌아갑니다.

사무실로 자박자박 걸어들어갈 때

우리네 회사 생활도 비온 뒤 맑음이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은 한 회사에 오래 머무르기 보단

자신의 능력에 맞춰, 상황에 따라 이직을 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으레 새로운 직무로 이직을 하신 분들이라면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는 것들 중에 하나가

이전에 내가 잘하던 것과 내가 새로 배워야하는 것이

완연히 드러날 때가 있으셨을 겁니다.


그럴 땐, 업무에도, 마음에도 비가 내립니다

내가 원래 잘하던 것조차 우중충해지며 앞이 어두워지죠.

'나 원래 이렇게 못했었나? 그저 회사를 옮겨을 뿐인데'

처음엔 마음을 추스려 잘 적응해보려고 하지만,

이전 직장에서 잘 해왔던 사람인 만큼

새로운 곳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스스로에게 더욱 실말하기 마련입니다.


마음에 폭풍이 몰려옵니다

먹구름은 겹겹이 쌓여 내 모습조차 보이지 않게 될 즈음

이런 생각이 머리를 꽉꽉 메웁니다.

"아, 이직 괜히 했나?" 라는 마음이 범람합니다.


저에게도 폭풍우가 몰아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 오기 전, 벌써 3년도 더 전 일이네요.

처음 브랜드 마케터로서 무신사에 이직했을 때였죠.

저에게는 카피라이팅에서 마케팅이이라는 영역으로의 첫 이직이었고

공톰점이라고는 두 단어에 '팅'이 공히 들어간다는 것 외에는

정말 다른 두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이제 막 이직 했으니까

'이 소나기가 금방 지나가가겠지'라는 생각으로 버텨보려고 했습니다.


'12: 58 PM 로비 앞 엘리베이터'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즈음

회사 1층 로비에 도착했습니다.

가랑비에 젖은 우산을 괜히 툭툭 털어내며

사무실로 들어가기 싫은 마음도 털어내봤습니다.


누구나 이 소나기가 지나가야만

비로소 새로운 직장에 잘 적응을 하게 될 테니까

하고 견뎌보신 경험들이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직장이란 곳은

우리에게 황순원 소설가의 소설 '소나기'의 결말처럼

괴팍하고 전에 없던 막막한 마음을 마주게 됩니다

소나긴줄만 알았던 이직의 경험은

점차 더 큰 먹구름을 몰고 오고

이게 어떤 노랫말처럼 끝이 없는 장마의 시작일 수도 있죠.


저 역시도 새로운 직장이 새로운 직책이

마치 새로운 기후에 적응해야할 만큼

새로운 직장에 있어서 만큼은 내가 이방인이구나를 깨달았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카피라이터 시절에는

글을 쓰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예술과 유튜브 감성이 업무에 도움이 될 때마다 덕업일치를 해왔다고 생각했고

무엇이든 새로운 영역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신사에서의 브랜드 마케터는

커머스, 플랫폼, 패션은 완전히 새로운 기후였죠.

숫자와 전략, 소통과 패션, 퍼포먼스와 예산

관계와 리뷰, 캠페인에 대한 책임은

적응하기 전까지는 주르룩 비가 내리는 장마였습니다.


'1: 00 PM "네, 이제 회의 들어가요!"'

축축한 날씨를 뒤로 하고 저는 이제 새로운 회사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환경에서

또 묵묵히 회의를 하며, 새로운 경험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브랜드 마케터냐고요? 아니요. 또 전혀 다른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이 회사에서의 기후도 가끔은 폭우가 내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비가 장마처럼 오진 않습니다.


스스로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하는 법을 배우며

이직 후의 어려움들을 소나기로 만드는 방법을 어느 정도는 터득했습니다

비가 오면 땅이 굳는 것이 아니라,

굳는 땅에 씨앗을 심으려는 의지가 중요한 것처럼,

비가 온다고 비가 멎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맑은 날이 왔을 때 무엇을 할지를 준비하는 법을 배운 거죠.


맑은 날은, 비가 와야 밝습니다.

비가 왔으니까, 날은 맑아진 겁니다

혹여라도 지금 비오는 우기에 있는 모든 분들께

이런 응원을 전하고 싶습니다.


견디고

이겨내고

자기 자신을 응축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당신에게 비가 멈추는

햇살가득한 날이 오면

자랑스러워할 날이 올겁니다.


그리고 그건

우연히 오늘 비가 멈춘 게 아니라

길고긴 장마를 이겨낸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맑은 날이라는 것으로.


그러니까

오늘 우연히 비가 멈춘 것이 아니라,

비가 왔으니까, 맑은 날이 온거라고


그걸 당신이 잘 견뎌낸 거라고 말입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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