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이 공자를 만났을 때
얼마 전 영화 남한산성을 관람했다. 병자호란 당시, 영화 속 추운 겨울만큼이나 보는 이의 마음도 함께 시렸던 남한산성, 그리고 그 속에서의 47일. 영화의 큰 줄기는 척화파(청나라와 싸우자)와 주화파(청나라와 친해지자)로 나뉜 세력들이 당시 임금이었던 인조에게 각자의 관(觀)을 나름의 방법으로 주장하고 관철시키려 하는 ‘말’에 담겨 있다.
영화는 꽤 긴 시간의 러닝타임을 가지고 나라의 존망이 걸린 어려운 선택에 대해 관객에게 함께 고민해 볼 것을 제안한다.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과 기존 명나라와의 군신관계를 지키기 위해 청나라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상헌이 각자의 이념을 가지고 대립하는 그 '말'이 이 영화의 전부이자 백미다.
결과론으로 보면 화친정책이 옳아 보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보자면 그 당시 그것이 쉬운 일기만 했겠는가 싶기도 하다. 잠깐의 치욕을 견디고 미래를 준비하자는 최명길, 그리고 왕으로서 치욕의 삶을 구걸하는 것은 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상헌.
인조의 관점에서 과연 두 신하 중에 누가 더 좋은 신하였을까?
몇년 전 지방 강의를 다녀오던 중 늦은 아침 겸 이른 점심식사를 위해 휴게소에 들렀을 때 일이다.
“은행돌솥비빔밥을 주문했는데 그냥 돌솥비빔밥이 나온 것 같아요. 은행이 없네요.”
하루의 첫 식사를 대충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름 기대를 품고 주문한 메뉴가 바로 ‘은행 돌솥비빔밥’이었다.
하지만 그 ‘은행 돌솥비빔밥’에는 정작 ‘은행’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돌아온 식당 직원의 심드렁한 대답
“여기 은행 들어 있는데요.”
그 말에 비빔밥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니..아..은행이 들어있긴 했다.
“아..이런..있긴 하네요..여기..이런...은행..하..은행”
그리고 나서 다시 메뉴판을 자세히 살펴 본 나는 말 없이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남한산성.
임금이 어느 신하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나라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사안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선택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느냐는 ‘성과’의 문제보다 과연 어떤 신하가 더 좋은 신하였는지, 그것은 왜 그러하였는지에 대한 ‘과정’의 문제에 집중해보았다.
신하로서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은 임금에 대한 충(忠)이다. 일단 이들 두 신하가 임금이 옳은 판단을 하도록 소신을 펼쳐 주장하는 과정과 그 목적에 나라의 안위와 임금의 현명한 결정에 보탬이 되려는 신하의 충(忠)이 있다면 그것은 결과를 떠나 신하다운 행동이다.
“君君, 臣臣, 父父, 子子.” (군군,신신,부부,자자)
제나라 경공의 물음에 대한 공자의 대답이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이는 실존하는 모든 것이 그 이름대로 기능하려면 그 이름에 맞는, 본질에 부합하는 실제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제 아무리 지혜가 뛰어난 신하라 하더라도 임금 앞에서 충(忠)이 모자라면 신하라는 이름이 무색해져 버리는 거짓 신하가 되고 만다. 신하가 신하답게 되기 위해서는 충(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 ‘충’ 역시 ‘충 다워야 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최명길, 김상헌은 신하다운 신하이긴 했다. (물론 영화에서 말이다)
공자는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正名(정명)’이라고 주장하였다.
정명이란 '이름을 바로 세우는 것' 인데 풀어보면 모든 이치에 명분을 바로 잡는 것을 바로 정명이라 한다.
모든 이름은 그 의미에 대한 바른 이해와 이를 뒷받침하는 행동체계가 있기 마련이다. 아니 반드시 있어야 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은행돌솥비빔밥에는 손님이 기대하는 은행이 충분하게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연인의 고백에는 먼저 사랑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 사랑이 느껴지는 행동이 ‘실제’해야 사랑이라는 ‘이름’에 의미가 살아나고,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인의 고백은 정치의 근본과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고 행동하는 태도가 있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행돌솥비빔밥은!
가족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회사 동료들과의 회식이 즐거워서 가족과 보낼 시간을 외면하게 된면 그것은 실제의 사랑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단어도 또 '사랑'이라는 단어도 그 이름엔 다 이유가 있다.
필자는 지난 포스팅에서 기본적으로 강사는 강의를 하더라도 ‘교육(가르쳐서 육성함)’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https://brunch.co.kr/@18580/5)
가르쳐 육성(교육)하는 강사는
1. 가르치기 위해 스스로 선(先)-학습을 하고
2. 육성시키기 위한 명확한 솔루션을 제공한다.
그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앞선 선(先)-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을 습(習)하여 체득화(體得化)하고 결국 학습자가 적용하기 쉬운 지혜로 다듬어 제공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의사'는 '의사'라는 이름의 가치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비로소 명의의 반열에 오를 수 있고 '강사'는 ‘강사’라는 이름이 가진 본질적 의미를 이해해야 명강사가 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메이크 머니는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스승-의사와 강사는 모두 스승사(師)를 사용한다-으로 존중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H2O’ 물의 원소기호이다. 이처럼 물은 두 개의 수소원자와 한 개의 산소원자가 결합한 형태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렇게 결합한 결과를 물이라고 하고 반대로 물의 원소기호를 풀어 두 개의 수소와 한 개의 산소라고도 한다. 물처럼 보여서 그 속을 들여다보았는데 그 조합이 엉망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물'이 아니다.
먼저 태어나 경험한 것을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어 결국 인간다움을 완성해 갈 수 있게 해준 분들을 우리는 ‘선생(先生)님’이라고 높여왔다. 선생은 강의의 품질이 아니라 삶 자체를 이끌어 주는, 즉 선생이라는 이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귀한 ‘이름’이다.
그러므로 좋은 선생은 임용고시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의 본질을 통해 스스로 되어가고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흔한 이야기지만 명심했으면 한다.
모든 문제는 본질에서 시작하고 그 해답도 본질에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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