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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빛 Apr 11. 2021

예능 속 장애 혐오



어둠 속의 대화

  

 중학생 때 '어둠 속의 대화'라는 체험형 전시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한 시간 반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암흑 공간에서 시각이 차단된 채로 여러 장소들을 거쳐서 다시 밖으로 나가는 체험이었다. 내가 들어간 공간에는 빛이 완전히 차단되어 어두컴컴했다. 어둠에 적응되면 혹시 눈에 뭐가 좀 들어오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소리와 손을 뻗으면 만져지는 무언가의 촉감 그리고 후각뿐이었다.  


 앞을 볼 수가 없으니 시각을 제외한 모든 것들에 예민해졌다. 미로같이 느껴지는 공간을 로드마스터의 안내받으며 걸어갔다. 따라가면서 계속 나는 로드마스터에 대해 궁금했다. ‘도대체 저분은 어떻게 이 껌껌한 공간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거지? 적외선 카메라가 달린 안경 같은 걸 쓰면 보이는 건가?’ 계속 궁금해하던 중에 카페 혹은 바처럼 설정되어 있는 공간에 도착했다. 참가자들은 의자에 앉았다. 그 장소에서 사람들을 안내해주던 로드마스터분이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말씀해주셨다. 


 그때 모든 의문이 풀렸다. 누군가에게는 이게 일상이라는 게 몸으로 와 닿았다. 그 충격에 밖으로 나온 뒤로도 계속 멍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줬던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문은 그 이후로 내가 자라는 동안에 계속해서 닫혀가고 있었다. 




상자 속 물건 맞추기


 예능 프로그램에 ‘상자 속 물건 맞추기’ 혹은 안대를 쓰고 사람들을 찾는 일명 ‘좀비 게임’이 종종 등장한다. 눈 가리고 상자 속 물건 맞추기는 상자 속 물건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촉각으로만 물건을 맞추는 것이다. 출연자들은 물건의 촉감이 이상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표정을 찡그린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웃는다. 좀비 게임은 시각이 차단된 상태에서 사람을 잡는 게임이다. 비장애인인 출연자는 주변 사물들에 부딪치지 않게 평소보다 더디게 움직인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걸어가는 모습과 찾고 있는 사람들을 찾지 못하고 헛다리를 짚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웃는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게 일상인 시각장애인들은 이 게임들에 대해 어떻게 느낄까. 내가 매일 겪는 상황들을 보고 누군가는 깔깔대며 웃는다. 이 게임을 정말 ‘예능’으로써 소비할 수 있을까. 정말 부끄럽게도 나는 위 게임들을 보며 웃었던 적이 있다. 상자 속 물건 맞추기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두려움과 비명을 보면서 재밌다고 하는 게 좀 의아했을 뿐이지 다른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심지어 좀비 게임에 대해서는 아무 의문 없이 그저 재밌다고만 생각했다. 어렸을 때 열렸던 생각의 문은 점점 닫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유머는 그 사람의 평소 생각과 무의식을 반영한다. 어떤 웃음 코드를 가지고 있는지는 그 사람의 가치관을 잘 드러내는 것 중에 하나이다. 시각이 차단된 상황에 놓인 것을 보고 웃는 웃음 코드를 가진 사람은 평소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일까. 그리고 시각장애인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평등하며,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인권은 소중합니다.’라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와 동시에 ‘상자 속 물건 맞추기’와 ‘좀비 게임’을 보고 웃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자신이 생각하는 ‘우리’라는 단어에 누가 소속되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예능을 보면서 상처 받고 분노하는 ‘우리 중 누군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고요 속의 외침


 어렸을 적 주말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던 가족오락관에 '고요 속의 외침'이라는 게임이 있었다. 동물 귀 모양이 달린 헤드셋을 쓰고 제시된 단어를 여러 사람에게 차례대로 전달해서 끝에 있는 사람이 그 단어를 맞추면 되는 게임이다. 출연진들끼리 소리가 안 들려서 제시 단어가 아닌 엉뚱한 다른 단어를 말한다던지 상대방의 말을 이해를 못 해서 얼굴을 찡그리거나 상대방이 더 잘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입모양을 우스꽝스럽게 하는 모습이 웃음 포인트였다. 이 고요 속의 외침 게임은 최근까지 계속해서 예능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누군가가 게임을 하는 순간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계속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머릿속으로는 청각장애인의 존재를 알고 있다. 하지만 예능에서 ‘고요 속의 외침’이라는 게임을 소비하는 순간에는 우리는 청각장애인의 입장을 배제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타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때 상대방의 굳어지는 표정이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은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얼굴을 찡그리게 될 수도 있다. 자신의 그런 일상을 누군가는 웃음의 소재로 삼고 웃는다면 기분이 어떠할까.  


 고요 속의 외침과 관련된 기사들을 찾아보다가 한 댓글을 봤다. 기사는 고요 속의 외침 게임이 청각장애인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기사에 달린 댓글의 요지는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지만 비장애인까지 예능을 보며 불편함을 느껴야 하는가’였다. 이 무슨 이기적인 발언인가. 본인이 당사자가 되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누군가를 당연히 차별하고 배제하고 싶다는 말을 너무나 당당히 하고 있다. 누군가는 예능을 보며 깔깔대고 웃지만 동시에 누군가는 불쾌하고 상처 받을 수 있다.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소수를 무시하고 싶다는 저 생각은 어떤 삶을 살아야 나올 수 있는가. 




  작년에 인터넷에서 한 농인분이 고요 속의 외침이 불쾌하다고 말씀하신 글을 봤다. 사실 나는 그 글을 읽기 전까지는 이 게임이 청각 장애인 분들이 불쾌할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다. 어렸을 때 가족오락관에서 나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예능에서 너무나 자주 등장한 게임이었기 때문에 그것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에 불편해하면서 장애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둔감했다. 내가 관심 가지고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 무신경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내심 답답해하면서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답답하고 어찌 보면 오만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 글을 읽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하고 부끄러웠다. 


 누군가가 상처 받을 수 있다면 그건 주의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아야 하는 것이 맞다. 예능 속 장애 혐오는 글에 나오는 것 이외에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미디어는 누구보다 이런 문제에 민감해야 한다. 미디어에서 계속 이러한 게임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티브이에도 나오니까~'라며 경각심을 가지지 못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 인식을 하지 못하고 콘텐츠를 만드는 걸까 아니면 ‘우리의 시청률과 조회수를 올려주는 다수가 비장애인이니 소수인 장애인들은 모른척하고 넘어가자’라는 심리에서 비롯된 오만함일까. 나는 예능을 보면서 멈칫하지 않고 편안하게 웃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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