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by 송정훈


작년 말, 승진을 했다. 그간 명함에 ABM이란 직책이 적혀 있었는데, 이제는 BM이 된 것이다. BM은 브랜드 매니저라는 말의 약자이고, ABM은 BM 앞에 Assistant가 붙어 BM은 보조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브랜드 매니저라는 말이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상은 특정 브랜드의 마케팅 담당자 정도다. 가끔 ‘브랜드 매니저’라는 말 자체가 마케터들이 자신들의 일을 멋지고 대단한 것으로 포장하기 위해서 지어낸 말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입사 후 ABM으로는 7년 정도 일했다. ABM이긴 했지만 3년 전부터는 BM처럼 일해왔다(고 생각한다). 담당 브랜드와 관련 일들을 보통 본부장님께 직접 보고를 드려왔고, 담당하는 브랜드가 많아 신경 쓸 일의 가짓수가 무척 많은 팀장님(BM) 대신에 대부분의 일을 스스로 기획하고 스스로 꾸려 왔으니까. ABM에서 BM이 되었다고 업무적으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BM이 되면 CEO에게 사업계획부터 굵직한 이슈에 관해 보고를 직접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간 BM 역할을 하던 팀장님들이 매년 사업계획이란 이름으로 40~50 페이지의 슬라이드를 만들어 보고를 드리고, 까인 후 다시 들어가길 여러 번 반복하는 걸 보며 자료의 어마어마한 분량과 CEO의 지적을 맞받아치는 말재주와 멘탈에 약간의 경외감을 느껴왔던 터였는데, 그걸 내가 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마음에 먹구름이 잔뜩 끼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ABM에서 BM이 된 시기는 바로 연말, 바야흐로 사업계획의 시즌이었다...




BM이 되면서 담당하는 브랜드도 바뀌었고, 담당하는 브랜드의 가짓수도 늘었다. 새로운 브랜드를 담당하게 된 만큼 소비자 조사부터 새로 해나갔다.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 조사를 진행하고, 대형마트에 나가 우리 제품이나 경쟁 제품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몇몇에게는 이 제품을 왜 샀는지, 우리 제품은 어떤 점이 아쉬운지 묻기도 했다. 그간 6시가 되면 칼퇴하는 동사무소 민원실 공무원 같은 삶을 살아왔는데, BM이 되고 나니 팔자에 없던 야근을 하게 됐고, 주말에도 괜히 마트에 나가 사람들을 관찰하거나 지난주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생각에 다시 빠져들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자료들과 생각을 정리해 사업계획 초안을 만들었다. 괜찮은 내용인 것 같아 본부장님께 보고를 드렸더니 퇴짜! 브랜드 담당자가 바뀌었으니 완전히 새롭게 보고 새 판을 그려봤으면 좋겠다는 피드백이었다. 속으로 ‘저는 그럴 깜냥이 안 됩니다...’하는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맡은 바 최선은 다하자는 마음으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야근을 이어나갔다. 코로나 때문에 연말 느낌이 나지 않는 연말이긴 했지만, 매일 이어지는 야근으로 더 연말 같지 나날이었다. 누구보다 새해를 한 달 먼저 시작한 것만 같았다.


2주 정도의 시간을 들여 새로 작성한 사업계획에 본부장님은 내용이 괜찮다며 ‘오케이’를 외쳤고, 일정을 잡고 며칠 뒤 CEO에게 보고를 드리러 7층 회의실로 올라갔다. 다른 BM이 먼저 발표를 시작했는데, 두 번째 슬라이드를 채 넘기기 전에 지적이 시작됐다.


“이게 뭔 말이지? 브랜드에 대한 인식 조사를 내부 직원 대상으로만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스크린에 띄어진 화면에는 CEO가 레이저 포인트로 쏜 붉은 불빛이 X표를 그리고 있었다. CEO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어 발표하는 내용 하나하나에 쓴소리를 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으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독설까지 쏟아졌다. 담당 BM은 다시 고민해서 새로 보고하겠다는 말로 발표를 마치는 수밖에 없었고, 사업계획을 수년간 보고했던 그의 흔들리는 동공과 넋 나간 눈빛에서 내 미래를 보는 듯했다. 나는 단두대에 오르는 사형수의 마음으로 발표용 노트북 앞에 앉았다.


“21년도 OOO 브랜드 활동계획 보고 드리겠습니다.”


긴장했는지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오늘 발표할 내용을 요약해 먼저 보고 드린 후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내가 생각하는 브랜드의 정체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한 장 발표하고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가고, 그 다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데 아무 피드백이 없었다. 이전 발표자가 슬라이드마다 지적받는 걸 목도했던 터라 좀 의아했다. ‘이 양반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있기는 한 건가?, 끝나고 나서 몰아서 갈구려고 이러는 건가?’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스물다섯 장 정도로 만든 사업계획 발표는 이상하리만치 부드럽게 끝이 났다. 중간에 토론 거리 한두 개가 있긴 했지만, 본부장님이 방패막이 역할을 해줘 사소한 논의로 끝날 수 있었다. 두 명이 1시간 반씩 3시간짜리 보고를 하고 내려오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다리는 후들거렸고,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탓에 잊고 있던 허기가 급작스레 찾아왔다. 몸 전체에 에너지가 달리는 것 같아 부속 고기를 듬뿍 넣어주는 회사 근처 순대국밥 집을 찾아가 따끈한 고깃국과 푸짐한 건더기로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다행히 잘 끝난 그 자료를 이정표 삼아 올해 하나씩 일을 해나가고 있다. 몇 가지 일이 잘 안 풀리고 있고, 몇 가지 일이 계획보다 늦어지고 있지만, ‘뭐 인생이란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하는 변명으로 정신 승리를 하며 그래도 계획한 바가 아주 틀어지지는 않도록 애쓰고 있다.


BM이 되고 브랜드 가짓수가 늘어나면서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BM이 되어 내가 얻은 혜택은 직책 수당이 고작 10만 원 정도 늘었을 뿐인데, 일은 뭐 적게 잡아도 두 배는 늘어난 것 같아 솔직히 억울한 심정이다. 그래도 늘어난 업무가 아주 엉망이 되지는 않도록 잘 관리해나가는 나를 보며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어쩌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ABM으로 일할 때도, BM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BM이 되고 넉 달이 지난 지금도 스스로 BM이 될 깜냥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닥치면 하게 되고 우왕좌왕했다가도 끝내 잘 마무리 짓는 걸 보며 조금은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다.


이 생각은 내게 묘한 위안을 준다. 내가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 괜찮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팀장이 되고 본부장이 되고 리더가 될 수 있을까? 회사 밖으로 나와 혼자만의 힘으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같은 뿌연 고민들을 봄날의 미세먼지처럼 늘 품고 있는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닥치면 하게 되는 거라고,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거라고, 결국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거라고.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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