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주인아저씨와의아름다운 이별
지난 8월 중순, 전셋집 주인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두 달 후에 이사를 하려고 합니다. 계약 기간이 남았지만 사정이 생겼으니 양해 좀 해주세요. 임대인은 알겠다고 답했다. 얼른 세를 놔야겠네. 집이 너무 낡아서 잘 구해지지 않을 수 있으니 집을 좀 고치겠단 말도 덧붙였다. 새시(샷시)랑 화장실만 고치면 집이 깔끔해질 거 같애. 하루면 되니까 너무 신경 쓰진 마시고.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이사를 하는 입장에서 그런 번거로움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는데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드려야지. 한데 이럴 줄은 몰랐다. 임대인은 내게 언제 집수리를 하는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지 말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월요일 저녁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집 현관문 앞에는 새 걸로 보이는 문짝 몇 개와 두세 가지의 페인트 통, 페인트 붓 같은 도구가 즐비해 있었고 현관문 밖에서부터 페인트 냄새가 났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안 살림살이는 구석에 대충 포개져 커다란 비닐로 덮어져 있었고 밖에서부터 느껴지던 페인트 냄새는 더 진동했다. 고풍스런 나무 창은 LG 하우시스 로고가 박힌 깔끔한 화이트톤의 새시로 바뀌어 있었고 덕분에 바닥에는 새시를 교체하면서 생긴 시멘트 가루와 나무 조각들로 어석어석했다. 문이 뜯어져 있는 화장실 안을 살펴보니 변기와 세면대, 낡은 타일까지 모두 뜯어내 거친 시멘트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공간이 화장실이었다는 건 시멘트 벽 사이 살짝 튀어나온 수도관만이 증명하고 있었다.
화가 났다. 아니, 내가 나가는 일정에 맞춰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기 위해 집수리를 미리 하는 건 좋지. 근데 적어도 언제 시작하는지는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하루면 된다면서 꼴이 이게 뭐야? 못해도 이틀은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가다듬고 임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음속으로는 “씨발, 장난해. 개념 없는 놈. 예의 없는 놈.” 같은 상스러운 말이 맴돌았지만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집수리를 시작하셨네요?
아 네, 새시도 깨끗한 거로 바꿨고 화장실도 깨끗하게 싹 고칠 거예요.
네네. 공사는 언제까지 하는 거예요?
한 하루 이틀 더 하면 될 거예요.
집이 너무 엉망이라 도대체 어떻게 자야 할지 모르겠네요.
에이 뭐, 매트리스 깔고 대충 자면 되지 뭐, 아니면 친구네 집에 가서 하루 자도 되는 거고.
참나,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이렇게 안하무인인 작자였나? 온화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연기였던가 싶었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건 제때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아 제때 잔금을 치르는 것이었기에 감정적으로 대꾸하지 않았다.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사장님, 제가 10월 15일에 나간다고 두세 번 말씀드린 거 기억하시죠? 그때 꼭 전세금 챙겨주셔야 해요. 아시겠죠?
내가 최선을 다해볼게요.
그리고 페인트 냄새가 진동하고 뽀얀 먼지가 그득한 집에서 나와 야놀자 앱을 켰다. 집 근처 숙소를 찾아보니 삼청동 쪽 게스트하우스가 저렴하길래 그중 한 곳을 예약했다. 한데 시국이 시국이기도 하고 월요일이기도 하고 너무 저렴한 곳을 고르기도 해서 하필 예약한 곳이 손님이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 게스트하우스 운영자도 어디 다른 곳에 머물고 있는지 비밀번호를 알려줄 테니 알아서 묵고 가라고 했다. 게스트하우스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졌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오래된 집이었는데 혼자서 자다간 귀신이라도 마주칠 것 같아 운영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야놀자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환불받았다. 그리고 가까운 호모텔을 잡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에는 미리 연락해 둔 친구네 집으로 가 신세를 졌다.
집수리를 시작한 지 3일째 되던 저녁, 집에 돌아와 보니 화장실 공사가 채 마무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밖에 가서 하루 더 잘까 하다가 방 쪽은 수리가 끝났으니 방 하나만 깨끗하게 치우고 자자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 먼지가 많이 쌓인 가구 중에 이사를 하면서 버리려고 했던 것은 이참에 밖으로 내놓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방바닥을 쓸고 닦았다. 군대에서 숙영을 한 것 같은 불편한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퇴근하고 돌아와 보니 공사는 끝이 나 있었다. 지난밤처럼 집 구석구석을 열심히 쓸고 닦았고 옷가지와 이불들은 밖에서 털거나 새로 빨래를 돌렸다. 정리는 다음 날 자정이 되어서야 마무리됐다.
집수리를 해서 그런지 다행히 새로운 세입자는 구했다고 한다. 임대인으로부터 약속한 일자에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겠다는 말도 들었다. 집-회사-집-회사 반복적인 일상에 낯선 경험과 좋은 글감을 선사해 준 임대인에게 이 글을 빌려 감사함을 전한다.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다는 사실과 세입자로서의 삶은 원래 서글픈 것이라는 뼈있는 교훈까지 전해주셨다. 오랫동안 이 경험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집수리가 시작됐던 첫 날, 삼청동 게스트하우스를 향해 걸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어른이 되긴 했구나. 감정싸움을 벌이지 않고 내게 중요한 것에 집중했다는 게 대견했다. 어릴 적부터 꽤 다혈질인 탓에 이런저런 감정싸움이 많은 벌이곤 했는데, 그런 내가 감정을 잘 추스르고 이성적으로 대응했다는 게 뿌듯했다. 나이를 헛먹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어른이 되고 있다는 걸 처음 체감한 건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서울에 올라와 누나와 꽤 오랫동안 산 덕에 집안일 중 내 몫은 늘 절반 이하였다. 솔직히 누나 70%, 나 30%였던 것 같다. 누나가 결혼을 하고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모든 집안일은 내 몫이 됐고 일요일 저녁에 밀린 설거지와 빨래, 청소와 분리수거를 군말 없이 해치우면서 깨달았다. 산다는 건 번거로운 일이 세트 상품처럼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걸 감수해야 하는 것이 어른의 삶이라는 것을.
인생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즐거운 일과 번거로운 일이 함께 존재하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무언가를 내놓아야만 하는 법이다. 임대인과 아름답고 추악한 이별의 과정을 겪으면서 인생의 냉엄한 현실을 다시금 목도하게 된다. 여전히 페인트 냄새가 나는 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조금 서글프긴 하지만 뭐 인생이란 원래 이런 것이지. 불편하긴 하지만 원하는 걸 얻었으니 잘된 것이지, 하며 스스로 다독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