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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훈 해설위원 Feb 21. 2020

오늘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스파링의 사회학


아이패드 키보드를 두드릴 때마다 왼쪽 손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아. 오른쪽 턱은 잘 벌어지지가 않아서 아까 주문해서 받은 차이 티 라테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있어. 마치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온 양철로봇이 된 것 같아. 왜냐하면 아까 스파링에서 아주 죽도록 맞았거든. 내가 왜 맞았는지는 이따가 설명하고 일단 스파링의 사회학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게. 글러브 끼고 주먹 휘두르는데 무슨 사회학이냐고? 아니 있어 일단 내 이야기 좀 들어봐.


체육관마다 다르겠지만 서서 겨루는 입식 격투기는 일반적으로 기술 연습, 미트 치기, 스파링, 체력훈련 이렇게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어. 체력훈련은 경기 내내 움직일 수 있는 체력을 기르는 것이고 기술은 잽, 스트레이트, 하이킥 이런 기술들을 코치 또는 파트너와 함께 하는 것이지. 미트는 글자 그대로 미트를 치면서 타격감각과 자세를 키우고 교정하는 것이야. 이 코스 중에서 가장 격렬한 것을 고르자면 역시 스파링이지.


스파링은 우리말로 하면 연습게임 정도로 번역할 수 있어. 코치가 항상 말을 해. “로우킥은 70%, 복부는 50%, 얼굴은 아주 약하게. 무조건 안 다치게 해야 돼요”라고. 그런데 이게 되나. 주먹을 던지고 카운터로 로우킥을 맞고 그러다 보면 나도 흥분해서 주먹에 힘이 들어가곤 해. 그래서 여기서 일종의 사회학이 발동해.


자 처음 신입 루키가 들어왔어. 이 친구가 운동 신경이 좋고 센스도 좋아서 처음 스파링 할 때 힘을 빼고 툭툭 가볍게 해내면 다른 선임들도 같이 맞춰주지. 그런데 나처럼 나이 많고 몸이 딱딱한 사람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체력이 빠지다 보니 몸에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고 힘이 들어가니 쓸데없이 큰 스윙으로 주먹을 날릴 때도 있었어. 자칫 잘못 맞으면 다칠 수도 있지. 노련한 선임들은 이때 한번 주의를 주고 그래도 고쳐지지 않으면 공격 수준을 살짝 높여. 여기서 높인다는 것은 세게 친다는 게 아니라 여러 콤비네이션을 섞으면서 정신없이 잔 펀치를 얼굴 정면, 옆얼굴, 복부, 옆구리 등등에 쉴 새 없이 꽂는 거지. 그러면 벽 쪽으로 쭉 몰렸다가 다시 중앙으로 복귀를 하면 정신이 번쩍 드는 거야. “아 내가 또 몸에 힘이 들어갔구냐”  스파링 할 때 힘을 빼고 상대방이 안 다치게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한다 라는 룰을 내가 깨면 누군가 나를 제재하고 내 잘못을 깨닫고 다시 그 룰을 지키려고 하는 거지. 체육관 다닌 지 반년 정도 지나니까 나도 새로 들어온 신입들이 오버를 하면 이렇게 까지는 안 하지만 “힘 빼고 좀 합시다”라고 이야기해. 그럼 거의 100% 죄송하다 알겠다 하고 스파링을 하지. 우린 싸우러 온 게 아니라 운동하러 온 거니까. 그 대전제를 서로 지키려고 하는 거야. 주먹질을 하는 와중에도 그걸 깨닫는 거야.


자 그럼 오늘 왜 두들겨 맞았는지 알려줄게. 일단 일진이 안 좋았다. 즉 재수가 없었다는 거지. 내 첫 번째 스파링 상대는 중국에서 온 20대 유학생이야. 이 친구는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인데 특이하게도 얼굴을 맞아도 꿈쩍도 안 해. 아마 일부러 버티는 거 같은데 계속 밀고 들어오니까 살짝 질릴 정도야. 이 친구랑 스파링 하면서 진이 다 빠졌는데 오늘따라 파트너가 완전 다국적군이더라고. 그다음으로 복싱 실력이 아주 뛰어난 우즈베키스탄 출신이랑 했는데 이 친구의 펀치를 신경 쓰다가 오른발 하이킥을 맞았고 또 후속타를 경계하다가 왼손 훅을 맞았지. 정말 얼얼하더군. 그런데 이걸로 끝이 아냐. 그다음으로 우리 체육관 일반부 최고참과 붙었는데 이분은 젊었을 때 복싱선수나 합기도 선수를 한 거 같더라고. 그래도 이분은 날 좀 봐주면서 서로 간에 힘 조절하면서 했는데 앞서 두 사람한테 훔씬 맞아서 기운이 없는 상태에서도 꾸역꾸역 끝냈지. 여기서 그만뒀으면 별 일 없었을 거야. 온몸을 체중 150킬로 서양인 레슬러가 자근자근 밟고 간 것처럼 아팠어도-비유가 아니라 실제 경험담-버틸 만했거든. 그런데 운동하는 내내 맞은 게 나도 살짝 꼭지가 돌아서 정해진 시간이 다 지났는데 한 번 더 하려고 상대를 찾다가 한 두 달 전부터 체육관에 다니시 시작한 어떤 회원과 스파링을 하게 됐어. 나보다 몇 체급은 아래이듯 훨씬 작은 회원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좀 쉽게 봤었나 봐.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기본기도 탄탄해서 여간해서 맞출 수가 없어서 나보다 훨씬 빠르고 게다가 난 이미 체력이 거의 소진된 상태다 보니까 계속 화가 나더라고. 나는 못 맞추고 나는 계속 맞고 오늘 내내 맞고 이런 생각을 하니까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스윙이 크게 나오고 동작이 크게 나오니 상대방은 피하고 카운터로 나를 치고. 이런 악순환이 1분 넘게 지속됐어. 그러자 나도 꼭지가 돌아서 주먹이든 발차기든 힘을 너무 넣었던 거야. 몸이 너무 뻣뻣해져서 제대로 맞추지는 못했지만 그런 기세 때문에 상대방이 움찔하기는 했지. 다 끝나고 나서 “힘이 좀 많이 들어간 거 같아요”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샤워하고 집에 오는데 좀 창피하더라. 진짜 창피했어. 왜냐하면 내가 잘못한 게 느껴졌거든.


중국인은 터프했지. 얼굴을 몇 대 쳤는데도 꿈쩍도 안 하고 밀고 들어왔어. 좀 특이하게도 얼굴을 맞아도 내 복부를 공격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실전이라면 그런 방법을 못 썼겠지. 얼굴에 크게 맞으면 바로 다운되니까. 그런데 반칙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니야. 뼈를 내주고 살을 취하겠다는 전략(?)이 이해가 안 되긴 했지만 스파링의 룰에서 벗어난 건 없었어.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친구도 마찬가지. 복싱 강국 중앙아시아 출신이어서인지 기본기 아주 탄탄했고 펀치 원투 섞다가 기습적 하이킥으로 내 턱을 돌려놨지. 그래서 잘못한 거 있나? 아무것도 없지.

우리 체육관 최고참 아저씨는 어떻고? 힘 빼고 툭툭 치면서 가장 부드럽게 코너에 몰리는 사람 배려해가면서 스파링을 리드해갔지. 난 끌려다니기만 했지만 말이야.


정규 시간이 끝나고 내가 먼저 청해서 이루어졌던 맨 마지막 상대도 마찬가지야. 잘못한 거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내심 나보다 약할 거라고 생각했고 앞서 세 게임에서 모두 졌던 분풀이를 이 친구에게 하려고 했던 거야. 내 의도는 불량했고 결과도 좋지 않았어. 서로의 경기력을 점검하면서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더 연마하는 본래 목적이 아니라 ‘화풀이’를 엉뚱한 데다 하고 싶었던 거야. 수평 폭력이라고 하지. 자기가 받았던 고통을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쪽에 풀면서 감정을 배설하는 거야. 


2014년이었을 거야. 세월호 가족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을 때 나도 동조 지지 단식을 한 적이 있었어. 그때 무슨 무슨 부대라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우리들에게 엄청난 욕설을 해대고 어떤 자는 몸에 술냄새를 엄청나게 풍기면서 멱살까지 잡더라고.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해서 내 스마트폰으로 당시 상황을 녹음하기도 했었지. 나중에 알게 됐는데 일부러 술을 마시거나 몸에 술을 뿌려서 행패를 부린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주취소란'이 되면 경범죄로 아주 미약하게 처벌받는대나 뭐래나. 이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이 요구하지도 않았던 의사자 지정과 특례 의학과 보상금을 반대한다며 왜 이런 특혜를 받느냐며 유가족들을 모욕하고 나한테 빨갱이냐고 북한에서 왔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더라고.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질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재로 참아냈지. 왜냐면 세월호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지만 정말 어려운 순간이었어. 침을 튀어가며 삿대질을 해대는데 먼저 한 대 칠까 뒤로 돌아가서 허리를 붙잡고 백드롭으로 던져버릴까 머릿속으로 1초에 100번씩 생각했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을 보듯 뻔했거든. 그리고 난 이 사람들을 알고 있었어. 이 일이 일어나기 몇 해전에 지상파 텔레비전 다큐 프로그램을 통해서 ‘극우 단체’와 만남을 갖고 교류하는 특별기획이 있었거든. 몇 달 동안 찍었지. 다는 그렇지 않겠지만 대략적인 공통점이 노화에 대한 두려움, 자기 삶에 대한 의욕 저하, 가족 구성원으로부터의 소외, 경제적 어려움 등등 고민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 그런 고민들은 누구나 한 두 개씩 갖기 마련이야.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짠 하게 나타나 구세주 행세를 하면서 ‘모든 잘못이 빨갱이들에게 있다’라고 주입하고 선동하는 이들이 있었어. 그들은 이 불쌍한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각종 패악질을 저질렀고 그 사람들도 자기 어려움에 대한 문제를 자기 자신에게 찾지 않고 더 약한 사람, 더 어려운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형태로 배설하면서 다녔던 거야. 참 머릿속이 복잡했다. 물론 내가 했던 행동의 도덕적 무게가 저 사람들이 했던 패악질과 비슷하거나 같지는 않지. 다만 그 작동구조는 동일했던 거야. “나보다 약한 사람을 때리자. 그렇게 분풀이를 하자”라고.


“어 왔어요? 그런데 어제 제가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갔죠? 미안해요. 내가 어제 잘못했네. 실수했어요.”

다음 날 체육관에서 운동이 다 끝나갈 때쯤 맨 마지막 상대를 찾아가 이렇게 사과를 했지. 그리고 웃으며 하이파이브. 아마 이런 작업을 계속 반복할수록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묘한 기대감. 


난 내 글에 명언이나 격언 같은 거 넣는 거 별로 안 좋아하긴 하는데 마침 딱 눈에 들어온 게 있어서 그 대학자의 말로 마무리할까 해.


누구나 화가 날 수 있다. 그건 쉽다. 정작 어려운 건 그럴만한 대상에게, 적시에, 적절한 이유로, 적당히 화를 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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