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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우사랑 Sep 01. 2022

언젠간 되겠지, 불가리안 백

with. 정연진 에세이_<뭐든지 가뿐하게 드는 여자>


어떤 과정을 묘사하는 그래픽에 자주 등장하는 피라미드의 끝이 뾰족한 이유는 밑의 면적이 넓기 때문이다. 멀리서 꼭대기를 바라볼 때는 바닥의 면적이 눈에 잘 안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내가 깔고 지나가야 할 1층의 면적이 얼마나 넓은지 알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에서 뒷걸음치는 것도 존중받아야 할 선택이다. 하지만 피라미드 건설 현장에 남기로 결정했다면, 지금부터는 닥치고 '묵묵함'과 친해질 시간이다.


정연진 에세이_<뭐든지 가뿐하게 드는 여자>





운동하는 사람들 유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여자들이 샤넬 백을 사고 싶어 하는데, 나도 사고 싶은 백이 있다고. 

바로 그건 불가리안 백이라고.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불가리안 백이 뭐란 말인가, 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지금? 나는 유튜브 영상을 보며, 이런 유머에 키득키득 같이 웃고 있다.


얼마 전, 수업 시간에 불가리안 백 8kg을 한 번 돌려 보고는 밤마다 유튜브 영상을 찾아본다.

이 반달? 아니 초승달? 모양을 한 요상한 운동기구는, 레슬링이라던가? 유도라던가? 그런 운동의 연습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왜 만들어졌는지에는 관심 없고,)

어떻게 하면 이 운동기구를 선생님처럼 리듬감 있게 잘 돌리고, 힘든 만큼의 재미를 느낄 것인가. 

어깨에 내려놓을 때는 어떻게 하면 살짝 나의 무게 중심으로 받을 것인가,

하는 승부욕에 불타오르고 있는 중이다.


한참을 케틀벨과 씨름했고, 지금도 8kg 케틀벨과 씨름 중인데, 이제 불가리안 백이 더해졌다. 

상체와 코어의 힘과 온몸의 리듬감을 더해 왼쪽, 오른쪽 열 번씩 스무 번을 돌리는 동안 

살짝 제대로 된 리듬감이 느껴지며 이 무거운 기구와 내가 하나 되는 느낌이 올 때가 있다.

이거다! 싶은 순간 여지없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상체가 흐트러지는 경험을 이번 주 내내 하고 있다.


8kg을 넘어설 수는 있는 것인가.




언젠간 되겠지.


살면서 확실하게 하나 터득한 게 있다면 그건, 한꺼번에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고 되는 일은 재미도 없지만, 어쩌다 운 좋게 된다고 해도 경계해야 할 일이다.

시간의 힘으로 이룬 일들만이 나를 성장시키고 증명한다고 믿는다.


어쨌든, 그리하여,

케틀벨에, 불가리안 백에 실패할 때마다 나는 중얼거린다. 언젠간 되겠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 무엇이든 된다는 걸 안다.

노력하고 노력했는데도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나의 욕심만큼, 내가 바라는 곳까지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만히 들여다보자. 

어제의 나, 일 년 전의 나, 십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다.

그것이 내가 보낸 시간이 만든 '나'라는 사람이다.

나는 무엇인가 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나는 이번에도 매일 달리고,

매일 케틀벨과 씨름하며, 

이제 불가리안 백도 매일 돌린다.

그리고 무수히 실패하는 중이다.

오늘도 그랬다.

하지만 또 이렇게 되뇐다.


언젠간 되겠지.




위에 적어 놓은 문장의 저자인 정연진 작가는 평생 해온 피아노 연주를 그만두고, 

독일어 동시통역 일을 하며, 암벽등반, 마라톤, 철인 3종, 크로스핏 등 여러 운동을 거쳐

사십 대 중반 역도를 시작하고 매일같이 체육관으로 직행, 스스로 정한 무게를 들어 올리고 있다.


8kg 무게의 운동기구도 버거운 나는 당연히 '뭐든지 가뿐하게 드는'이라는 문장에 끌렸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은 이것이다.

아마도 나는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이 어마어마한 작가처럼 뭐든지 가뿐하게 드는 날은 오지 않겠구나. 

하는 작가와의 거리두기.

그런데 그래서 이 책이 그렇게 작가에게 거리를 두며, 

나의 불가능에 대한 좌절로 끝났느냐 하면 물론 그건 아니다. 


매일 실패하고 있다고 해도, 나는 내가 들 수 있는 무게에 매일 도전하고 있다.

내가 들 수 있는 나만의 무게를 아는 것,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점을 아는 것, 

그것이 내 하루를, 나를 단단하게 받쳐 주고 있다는 걸 안다. 


작가의 말처럼,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한다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 묵묵함일 것이다.

운동이라는 피라미드에서, 나는 지금 가장 아랫단에 필요한 그 묵묵함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중이다.

하지만 지금 나의 이 묵묵함은 위로 올라가기 위함은 아니다.

올라가면 좋겠지만, 그것은 하루하루 살아낸 삶의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좌절하지 않고 살아낸 오늘 하루다.


그러므로, 오늘도 불가리안 백을 돌리다 지쳐 냅다 집어던지고 한 말은 이것이다.


언젠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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