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속의 강철 거인
부산항의 밤은 검고 차가웠다.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는 폭우가 항만 전체를 두꺼운 수막으로 감싸고 있었다. 평소라면 24시간 불야성을 이루며 물류를 토해내야 할 아시아 최대의 허브, '포세이돈'은 기이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로운 정적이 아니었다. 폭발하기 직전의 압력이 내는, 고막을 짓누르는 위태로운 고요였다.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포세이돈의 위용은 압도적이었다. 수백 미터 높이의 자동화 크레인들이 거대한 강철의 숲을 이루고 있었고, 그 사이를 오가는 무인 운반 차량(AGV)들의 붉은 표시등만이 혈관 속을 흐르는 적혈구처럼 끊임없이 점멸했다. 인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기계와, 그 기계를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인공지능 '오라클'만이 이 거대한 성채의 주인이었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짠 내 섞인 바람이 비바람과 함께 홍보관의 통유리창을 때렸다. '투두두둑'. 마치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
홍보관 2층 VIP 라운지의 어둠 속에서, 김서연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배낭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투박한 원통형 금속 장치를 스쳤다. 폐기된 스피커의 네오디뮴 자석과 전자레인지의 마그네트론을 뜯어내 엮은, 조잡해 보이지만 치명적인 무기. **'공진 주파수 발생기(Resonance Harmonizer)'**였다.
이 작은 고철 덩어리가 저 거대한 강철 거인의 뇌를 태워버릴 것이다.
"비가 와서 다행이군요."
어둠 속에서 이강혁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붕대를 감은 어깨를 가볍게 돌리고 있었다. 고통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익숙해지려는 움직임이었다.
"빗소리가 발소리를 덮어줄 테니까. 그리고 놈들의 열화상 감지 센서 효율도 15% 정도는 떨어질거야."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K-14 저격 소총의 소음기를 결합했다. '철컥', 하고 맞물리는 금속음이 빗소리 사이로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우리도 춥고 미끄러워. 최악의 조건이야. 서로"
최진아가 덧붙였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 밝기를 최저로 낮췄음에도, 그녀의 안경알에는 쉴 새 없이 흐르는 데이터의 잔상이 푸르게 비쳤다.
"리바이어던 놈들, 아직도 대기 중이야. 해상 3마일 지점에서 엔진을 끄고 조류를 타고 있어. 아주 노골적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군."
"커스토디안은?"
김서연이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배낭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야적장 C구역 컨테이너 틈새에 매복 중. 열화상에는 잡히지 않지만, 놈들이 주고받는 저주파 통신 패턴이 잡혔어. '정화(Purge)'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돼. 아마도 진입과 동시에 모든 전자기기를 태워버릴 작정인 것 같아."
김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판은 짜였다. 바다에는 기술을 탐내는 괴물(리바이어던)이, 땅에는 기술을 혐오하는 유령(커스토디안)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팀 오디세이'는 이 두 거대 세력이 일으킬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파도의 틈을 타 가장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야 했다.
0과 1의 회색지대
"저기, 분위기 깨서 미안한데 말이야."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에서 제로의 텍스트가 경쾌한 속도로 타이핑되었다.
[ Zero ]: 아키텍츠 보안 책임자 '랑정훈' 말이야. 프로필 다시 보니까 아주 재밌는 놈인데?
제로가 해킹한 랑정훈의 인사 기록 일부가 화면에 팝업으로 떴다.
[ Zero ]: 북한 출신의 전직 국정원 대공 수사국, 그중에서도 '블랙' 요원 출신. 10년 전 작전 중 공식 사망 처리됨. 특기는 '역정보 공작'과 '이중 함정'. 이 인간, 방어를 하는 게 아니야. 사냥을 즐기는 타입이지.
"함정이 있다는 소리군."
이강혁이 혀를 찼다.
[ Zero ]: 100%지. 지금 포세이돈 내부 네트워크가 너무 조용해. 데이터 패킷이 흐르는 게 아니라, 마치 멈춰있는 것 같아. 이건 '오라클'이 모든 리소스를 연산 처리가 아니라 '감시'와 '요격' 프로세스에 몰빵하고 있다는 증거야. 우리가 들어가는 그 '직원용 통로'도... 어쩌면 놈이 일부러 열어둔 쥐구멍일 수도 있어.
아지트에 침묵이 흘렀다. 열려 있는 뒷문. 그것이 유일한 입구이자, 가장 확실한 덫일 수도 있다는 경고.
하지만 김서연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배낭의 지퍼를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관없습니다. 함정이라면, 그 함정마저 부수고 들어가면 됩니다. 설계된 모든 것에는 반드시 구조적 결함이 존재하니까요."
그녀는 손목의 스마트워치를 터치했다. 루멘(Lumen) 시스템이 기동하며 그녀의 뇌파와 동기화되었다. 목 뒤의 신경 포트가 미세하게 찌릿거렸다. 익숙한 고통이자, 전투 태세를 알리는 신호였다.
"제로. 진입과 동시에 홍보관 지하의 전력을 차단해. 비상등조차 켜지게 해선 안 돼. 놈들이 야간 투시경을 쓰고 있다면, 갑작스러운 암전은 오히려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줄 거야."
[ Zero ]: 접수 완료. 3, 2, 1... 웰컴 투 더 다크니스.
어둠 속의 카운트다운
'팟-' 하는 소리와 함께 홍보관 내부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희미한 항만의 불빛만이 그들의 윤곽을 간신히 비췄다.
김서연, 이강혁, 최진아.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그들은 그림자처럼 움직여 홍보관 1층 구석에 있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으로 향했다.
문은 이미 제로에 의해 잠금이 풀려 있었다. 문을 열자, 지하로 이어지는 긴 나선형 계단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곰팡내와 섞인 차가운 지하의 공기가 훅 끼쳐왔다. 괴물의 식도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이강혁이 선두에 섰다. 그는 부상당한 어깨 쪽 팔로는 단검을, 다른 손으로는 권총을 들었다. 좁은 실내전(CQC)에 대비한 태세였다.
"제 뒤를 밟으세요. 발소리는 빗소리에 맞춰서."
그들은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빗소리는 멀어지고, 대신 낮게 깔리는 기계적인 웅웅거림이 고막을 진동시키기 시작했다. 포세이돈의 심장, 대형 서버실과 냉각 펌프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지하 통로는 길고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마치 병원의 복도처럼 멸균된 느낌을 주는 공간. 하지만 곳곳에 설치된 CCTV 렌즈들이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 Zero ]: CCTV 루프(Loop) 걸었어. 놈들 모니터에는 아무도 없는 빈 복도만 보일 거야. 하지만 소리는 조심해. 음향 센서까지는 완벽하게 속일 수 없어.
그들은 숨소리조차 죽이며 복도를 전진했다. 김서연은 걷는 내내 벽면의 파이프 배치를 눈으로 훑었다.
'메인 전력선은 천장 트레이를 통과... 냉각수 보조 배관은 바닥 아래 30cm... 가스 소화 설비 라인은 우측 벽면 매립...'
그녀의 눈에는 벽 너머의 구조가 투시도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어디를 터뜨려야 적을 제압하고 어디로 숨어야 살 수 있을지, 그녀는 실시간으로 전장을 '설계'하고 있었다.
첫 번째 총성
그들이 지하 통로의 중간 지점, 'B-4 구역'을 지날 때였다.
쿵-!
지상에서 둔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단순한 천둥소리가 아니었다. 지반을 타고 전해지는 묵직한 폭발의 파동. 흙먼지가 천장에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최진아가 속삭였다.
"시작됐어."
지상. 커스토디안의 침투조가 움직였다. 그들은 야적장 외곽의 변전소에 설치한 EMP 폭탄을 기폭시켰다. 강렬한 전자기 파동이 휩쓸고 지나가자, 외곽 경비를 서던 아키텍츠의 드론들이 힘을 잃고 추락했다. '후두둑, 쾅.' 비 오듯 떨어지는 고철 덩어리들이 바닥에 부딪히며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동시에 해상. 리바이어던의 용병들이 탄 고속 침투정이 파도를 가르며 항만 접안 시설로 돌진했다. 그들은 로켓 런처(RPG)를 발사해 감시탑의 서치라이트를 박살 냈다. 어둠 속에서 예광탄들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덫의 개방
지하 통로를 달리는 김서연 일행의 귀에도 지상의 소란이 점점 크게 들려왔다. 사이렌 소리, 총성, 그리고 무언가 거대한 것이 무너지는 소리.
이강혁이 속도를 높였다.
"놈들의 시선이 쏠렸을 때 돌파해야해! 서둘러!"
그들이 통로의 끝, 항만 내부 진입용 차단문 앞에 도달했을 때였다. 김서연이 멈춰 섰다.
"잠깐."
그녀는 차단문의 제어 패널을 응시했다. 제로가 해킹하여 '잠금 해제' 상태로 만들어둔 패널. 녹색 불이 들어와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패널은 꺼져 있었다. 전원 자체가 차단된 상태.
[ Zero ]: 어? 잠깐만. 내 신호가 튕겨 나갔어. 누군가 물리적으로 회선을 끊었...
그 순간, 그들이 지나온 뒤쪽 복도의 격벽이 '쿵!' 소리와 함께 내려와 퇴로를 차단했다. 동시에 앞쪽의 차단문이 스르르 열렸다.
문 너머에는 항만의 내부가 아니었다. 텅 빈 원형의 홀. 그리고 그 중앙에 홀로그램 프로젝터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치지직-'
홀로그램이 켜지며, 깔끔한 슈트를 입은 남자의 전신상이 허공에 떠올랐다. 차가운 눈매, 맹수 같은 미소. 아키텍츠의 보안 아르콘, 랑정훈이었다.
"환영합니다"
랑정훈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지하 통로에 울려 퍼졌다.
"쥐새끼들이 앞문으로 들어올 때, 더 영리한 쥐는 뒷문을 노릴 거라 생각했지.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김서연, 당신의 그 '설계'라는 거... 내 '사냥터' 안에서는 꽤 귀여운 재롱이더군요."
김서연은 랑정훈의 홀로그램을 노려보았다. 공포는 없었다. 다만 차가운 분노가 그녀의 이성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고 있었다.
"하데스 볼트에서 훔쳐간 암호키로 들어오려 했나? 유감스럽게도, 그 키는 내가 10분 전에 전부 폐기했습니다. 그리고..."
랑정훈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원형 홀의 벽면이 열리며, 검은색 도장을 한 4족 보행 로봇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안광의 센서가 김서연 일행을 조준했다. 아키텍츠의 살상용 드론, '가고일(Gargoyle)' 초기형 모델이었다.
"손님맞이 준비가 좀 거칠어도 이해해 주십시오. 밖이 좀 시끄러워서 말입니다."
이강혁이 김서연과 최진아 앞을 가로막으며 소총을 겨눴다.
"함정이야. 내가 막을 테니, 틈을 봐서 문을..."
"아니요."
김서연이 이강혁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눈은 가고일 로봇이 아니라, 홀 천장의 스프링클러 배관과 바닥의 배수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건 함정이 아닙니다, 랑정훈 씨."
김서연이 홀로그램을 향해 말했다.
"당신은 우리를 가둔 게 아니에요. 당신들이 가장 아끼는 '심장' 옆에, 시한폭탄을 제 발로 들여놓은 겁니다."
그녀는 배낭에서 '공진 주파수 발생기'를 꺼내는 대신, 주변의 지형지물을 스캔했다. 그녀의 뇌 속에서 물리 엔진이 가동되었다.
'가고일의 무게 250kg... 바닥 타일의 마찰 계수... 배수구의 경사각... 스프링클러의 수압...'
그녀는 이강혁에게 짧게 속삭였다.
"3시 방향, 소화전 밸브. 전력으로 타격하세요."
랑정훈의 미소가 굳어졌다.
"처리해."
그의 명령과 동시에 가고일들이 달려들었다. 이강혁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폭풍의 전야는 끝났다. 이제 진짜 폭풍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