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나가는 창 (The Missed Shot)
부산 앞바다, 심해 300m의 차가운 어둠 속. 거대한 강철의 고래, '리바이어던' 소속의 공격 원잠(原潛) '에이허브(Ahab)'가 침묵을 지키며 부유하고 있었다. 함교의 붉은 비상등만이 지휘관 제임스 킴의 날카로운 눈매를 비추고 있었다.
"위성 무기 '제우스(Zeus)', 재충전 상태 보고해."
함장의 질문에 무기관제사가 침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냉각 시스템 과열 상태 지속 중. 재발사 가능 시점까지... 최소 72시간 남았습니다. 부산항 타격은 불가능합니다."
제임스 킴은 주먹으로 콘솔을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빌어먹을! 지난번 상암동 데이터 센터('하데스 볼트')가 '오라클'의 코어 신호와 일치한다며! 그 막대한 트래픽은 대체 뭐였단 말인가!"
"분석 결과, 기만전술이었습니다. '제로'라는 해커와 '아키텍츠'가 서로 데이터를 주고받으며 발생한 일시적인 트래픽 폭주를... 정보국이 코어 신호로 오판했습니다."
리바이어던은 뼈아픈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카드인 '광자 어뢰(Photon Torpedo)'를 허무하게 소모해 버렸다. 그것은 물리적인 폭탄이 아니었다. 위성 궤도에서 지상의 특정 좌표에 고밀도의 광자 빔(감마선 레이저)을 쏘아, 대기를 순간적으로 이온화시키는 무기였다. 반경 2km 내의 모든 반도체 회로를 태워버려 '디지털 삭제'를 일으키는, 현대전의 신(神)과 같은 무기.
그 한 방은 서울의 아키텍츠 감시망을 마비시키고 김서연 일행에게 의도치 않은 퇴로를 열어주었지만, 정작 제거해야 할 '오라클'의 본체는 부산 지하 깊은 곳, SMR(소형 원자로)의 보호 아래 멀쩡했다.
"결국 깡통따개로 직접 따는 수밖에 없군."
함장은 잠망경 모니터에 비친 수면 위, 화려하게 빛나는 포세이돈 항만을 노려보았다.
"용병 부대 전원에게 전달해. 전면전을 개시한다. 가장 강력한 화력을 쏟아붓되, 서버실 진입 전까진 폭격을 자제한다. 오라클의 코어는 반드시 온전한 상태로 우리가 손에 넣어야 해."
침묵의 기사단 (The Silent Knights)
부산항 외곽, 비 내리는 컨테이너 야적장. 어둠 속에서 수십 명의 그림자가 빗줄기를 뚫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커스토디안의 집행부대, '사일런스(Silence)'였다.
그들의 무장은 겉보기엔 최첨단 특수부대와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그 속살은 현대전의 상식을 거부하고 있었다.
"네트워크 모듈, 전원 오프 확인." "광학 조준경, 아날로그 영점 조절 완료." "엑소 스켈레톤(외골격), 수동 제어 모드 전환."
그들은 강화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어떤 장비도 외부 인터넷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아키텍츠의 '오라클'이 해킹을 시도해도 들어올 '문' 자체가 없는, 완벽한 폐쇄 회로(Closed Circuit) 무기들이었다. 그들은 AI의 자동 조준 보정 대신, 인간의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약물을 투여하고 자신의 눈과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이것이 그들의 철학이었다. 기계가 판단하고 인간이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판단하고 기계는 도구일 뿐이어야 한다는 신념. 'Man-in-the-Loop(인간 개입형)' 무기체계.
지휘관인 '기록관'의 대리인이 나지막이 명령했다.
"놈들의 AI는 0.1초 뒤의 미래를 예측한다. 그러니 생각하지 마라. 본능으로 움직여. 기계가 계산할 수 없는 가장 인간적인 비합리성으로 놈들의 목을 쳐라."
그들은 유령처럼, 그러나 묵직한 기계음을 내며 포세이돈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의 목표는 탈취가 아니었다. 악마의 뇌를 태워버리는 완전한 파괴였다.
신의 요새 (The Fortress of God)
'포세이돈' 중앙 관제탑 최상층, 펜트하우스. 통유리 너머로 폭우가 쏟아지는 항만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전장이 아니라, 신들이 체스판을 내려다보는 성소와도 같았다.
보안 총괄 아르콘, 랑정훈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강철처럼 차가웠고, 눈빛에는 사냥감을 앞둔 맹수의 잔인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중앙의 거대한 홀로그램 테이블 위에 전장의 상황도를 띄웠다.
"보고 드립니다. 쥐새끼들이 덫에 들어왔습니다."
랑정훈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해상 3마일 밖, 리바이어던의 잠수정 침투 징후 포착. 외곽 야적장 C구역, 열화상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미세한 생체 신호 다수 이동 중. 커스토디안입니다."
창가에 서 있던 권석열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하데스 볼트가 뚫린 영향은?"
"보안 프로토콜의 14%가 노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랑정훈이 비릿하게 웃으며 홀로그램을 조작했다.
"그 덕분에 놈들이 방심하고 제 발로 들어왔습니다. 놈들은 우리가 뚫렸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문을 열어두고 기다린 겁니다."
그는 붉은색 키(Key)를 단말기에 꽂아 돌렸다.
"'프로젝트 히드라(Hydra)' 가동. 위장 컨테이너 잠금 해제. '가고일' 부대 대기 상태 전환. 수중 요격 드론 '크라켄', 사출 준비 완료."
화면 속, 평범한 컨테이너 박스처럼 야적장에 쌓여 있던 수백 개의 구조물 내부에서 붉은 안광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바다 밑바닥에서는 거대한 강철 촉수들이 웅크린 채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정부와의 협약에 따라, 이 시간부로 부산항 일대는 치외법권 지역입니다. 외부의 간섭은 없습니다."
랑정훈이 권석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완벽한 청소(Sanitation)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권석열은 유리창에 손을 대었다. 번개가 치며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췄다.
"시작해. 우리의 완벽함에 흠집을 내려는 자들에게, 진짜 절망이 무엇인지 가르쳐줘라."
재결합 (Reunion)
"윽..."
포세이돈 프로젝트 홍보관 2층, VIP 라운지. 이강혁이 낮은 신음을 삼켰다. 김서연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강혁의 찢어진 어깨 상처를 봉합하고 있었다. 변변한 의료 도구도 없이, 낚싯줄과 바늘을 라이터 불에 달궈 사용하는 원시적인 수술이었다.
살 타는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아직 개관조차 하지 않은 홍보관 특유의 새 건물 냄새와 뒤섞여 기묘한 불쾌감을 자아냈다.
"손 맵네, 김서연 씨. 수전증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야."
이강혁이 식은땀을 흘리며 농담을 던졌다. 김서연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통유리창 너머로 그들이 파괴해야 할 거대한 괴물, '포세이돈' 항만의 불야성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내려다보였다.
수백 대의 드론이 밤하늘을 순찰하고, 거대한 크레인이 웅장하게 움직이는 저 철통같은 요새. 그 바로 옆에 위치한 이 홍보관은 아키텍츠에게 있어 전략적 가치가 없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그래서 비어 있었고, 그래서 안전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놈들은 자기네 앞마당에 우리가 와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겠군요."
최진아가 먼지 덮인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녀는 방금 리바이어던의 무전 감청을 끝낸 참이었다.
"상암동 정전... 그거 리바이어던 짓이었어. 놈들이 헛다리 짚고 광자 어뢰를 날려먹은 덕분에 우리가 도망친 거지. 덕분에 오늘 밤 부산에는 그 무시무시한 빛이 떨어지지 않을 거야."
그때, 먼지 덮개 위에 올려둔 김서연의 노트북 화면이 지직거리더니 녹색 텍스트가 떠올랐다.
[ Zero ]: 와, 장소 선정 보소. 제일 비싼 자리(Royal Seat)를 잡았네?
제로였다. 하데스 볼트에서 미끼가 되어 사라졌던 그가, 부산시의 교통망을 우회해 다시 접속한 것이다.
"살아있었군."
이강혁이 안도하며 피식 웃었다.
[ Zero ]: 지옥 구경 좀 하고 왔지. 아키텍츠 놈들, 항만 보안 레벨을 미친듯이 올렸더군.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정문으로는 못 들어가. 대신, 내가 자네들이 있는 그 홍보관 지하랑 연결된 직원용 통로의 잠금을 풀어놨어. 일종의 'VIP 전용 개구멍'이지.
제로가 홍보관의 보안 카메라를 해킹해 외부 상황을 보여주었다. 항만 외곽, 칠흑 같은 바다 위에서 번쩍이는 섬광. 그리고 컨테이너 야적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리바이어던과 커스토디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후의 설계 (The Final Design)
"폭풍이 시작됐어."
최진아가 노트북 화면을 띄웠다. 화면에는 **[기사 전송 대기: 수신처 - 전 세계 주요 언론사 152곳]**이라는 문구가 붉게 깜빡이고 있었다.
"내가 엔터키를 누르는 순간, 아키텍츠의 모든 치부는 전 세계에 생중계될 거야. 하지만 그들이 인터넷을 끊어버리면 무용지물이야. 물리적인 증거, 즉 '오라클'이 멈추는 그 순간이 필요해."
김서연은 수술 도구를 정리하고 배낭에서 투박하게 생긴 원통형 장치를 꺼냈다. 폐기된 스피커의 강력한 자석과 마이크로파 발생기를 조합해 만든, 볼품없지만 위험해 보이는 기계였다. '공진 주파수 발생기'.
"우리는 저들의 화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제로는 방화벽을 뚫을 수 있지만, 물리적으로 닫힌 서버실 문은 열 수 없죠. 이강혁 씨의 총으로도 저 로봇 군단을 다 막을 순 없습니다."
김서연은 장치를 어루만지며 결연한 눈빛으로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물리학'은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장치를 냉각수 파이프에 꽂아 넣으면, 특정 주파수의 미세 진동이 발생합니다. 그 진동은 파이프를 타고 흘러가, 정확히 오라클의 메인 프로세서 반도체와 **'공명(Resonance)'**을 일으킬 겁니다."
"공명이라니?" 이강혁이 상처 부위를 감싸 쥐며 물었다.
"오페라 가수가 고음으로 유리잔을 깨는 것과 같습니다. 오라클의 뇌를 물리적으로 진동시켜, 스스로 타버리게 만드는 거죠. 이게 우리의 '한 방'입니다."
밖에서 둔탁한 폭발음이 들려오며 홍보관 건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이에나들이 물어뜯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이 움직일 차례였다.
김서연은 배낭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됐습니까? 괴물의 뱃속으로 들어갑니다."
이강혁은 소총의 노리쇠를 당겼고, 최진아는 노트북을 닫아 품에 안았다. 모니터 속 제로의 텍스트가 **[ Show Time ]**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화려한 조명이 비치는 지하 통로, 직원용 출입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뒤로 보이는 포세이돈 항만의 불빛이, 마치 그들을 기다리는 지옥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