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구도심, 지하 저수조 - H-Hour + 07:05 ]
빛이 사라진 세상은 무거웠다.
단순히 조명이 꺼진 것이 아니었다. 수십 대의 드론이 일으키던 날카로운 호버링 소음, ‘헌터 킬러’ 로봇들의 관절이 구동되는 기계음, ‘새니테이션’ 요원들이 주고받던 전술 데이터 통신의 고주파 잡음. 그 모든 ‘문명의 소음’이 칼로 잘라낸 듯 일시에 증발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원초적인 침묵과, 갑작스러운 시스템 정지로 인해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드론들의 파열음뿐이었다.
‘콰창! 툭... 투둑...’
어둠 속에서 김서연은 숨을 멈췄다. 목에 겨누었던 날카로운 파이프 조각을 천천히 내렸다. 그녀의 ‘엔지니어링 센스’가 이 기이한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려 애썼지만, 논리 회로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건 단순한 정전이 아니다.
그녀의 뇌에 이식된 ‘루멘’ 시스템조차 강제 오프라인 상태로 전환되었다.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던 데이터의 흐름이 끊기고, 텅 빈 정적만이 뇌를 채웠다. 그것은 마치 전 세계의 스위치가 내려간 것 같은 감각이었다.
“...서연 씨?”
최진아의 떨리는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쉿.”
김서연은 최진아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시각과 데이터가 차단된 지금, 청각만이 유일한 생존 수단이었다.
전방 5미터. 붉은 안광을 잃은 로봇들이 고철 덩어리처럼 멈춰 서 있었다. 그 뒤로 ‘새니테이션’ 요원들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HUD 오프라인! 야간 투시경 먹통입니다!” “통신 불가! 본부 응답이 없습니다!” “시스템 재부팅 시도... 실패! 예비 전력도 가동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최첨단 슈트는 이제 그들을 가두는 무거운 강철 관이 되어 있었다. ‘오라클’의 눈과 귀가 되어주던 모든 센서와 보조 장치들이, 강력한 EMP(전자기 펄스)와는 또 다른 종류의, 더 근본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때였다. 최진아의 품속에서 다시 한번 지직거리는 잡음이 들려왔다.
[ ...치지직... 하수도... B-7... ]
김서연은 최진아의 품을 더듬어 낡은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디지털 세상에서, 오직 건전지로 작동하는 이 낡은 아날로그 기기만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 ...오른쪽 벽면... 3시 방향... 낡은 쇠사슬을 찾아라... ]
발신자 불명의 목소리는 기계음이 아니었다. 노인의 건조하고 나직한 육성이었다.
“누구야...?”
최진아가 속삭였다.
“몰라요. 하지만...”
김서연은 어둠 속에서 이강혁이 쓰러져 있는 방향을 가늠했다.
“지금은 악마의 손이라도 잡아야 해요.”
김서연은 바닥을 기어 이강혁에게 다가갔다. 그는 미동도 없었지만, 목덜미에서 희미한 맥박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강혁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최 기자님, 반대쪽을 맡아요. 소리 내면 안 돼요.”
두 여자는 의식 없는 거구의 남자를 끌고, 멈춰 선 로봇들의 다리 사이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맹수들이 잠든 숲을 지나가는 사슴처럼, 그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어둠 속을 포복했다.
[ 지상 작전 지휘 통제실 - 이동형 커맨드 센터 ]
“이게 무슨 상황이야!”
랑정훈이 주먹으로 콘솔을 내리쳤다. 하지만 깨지지 않는 강화유리 모니터는 칠흑 같은 검은색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지휘 차량 내부의 비상등조차 켜지지 않았다. 차량 밖, 서울의 하늘은 별빛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암흑천지였다. 가로등, 건물의 조명,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심지어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까지. 전기가 흐르는 모든 것이 죽었다.
“보고해! 원인이 뭐야!”
랑정훈의 고함에 전술 오퍼레이터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그는 작동하지 않는 키보드 대신, 창밖의 상황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모릅니다! 그냥... 모든 게 멈췄습니다! ‘오라클’과의 연결도 끊겼고, 위성 링크도 다운됐습니다. 이건 EMP가 아닙니다. 하드웨어는 멀쩡한데, 소프트웨어 코어 자체가 증발한 것 같습니다!”
랑정훈은 차 문을 발로 차고 밖으로 나갔다. 공장 지대는 혼란 그 자체였다. 멈춰 선 장갑차들 사이로 병력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던 드론들이 추락해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지만, 소방 시스템조차 작동하지 않았다.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정도 규모의 블랙아웃(Blackout)... 단순한 테러가 아니야.’
그의 뇌리에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아키텍츠’와 대등한 힘을 가진 유일한 기술적 대항마.
‘리바이어던(Leviathan).’
군산복합체와 월스트리트의 자본이 결합된 괴물들. 그들이 ‘아키텍츠’의 독주를 막기 위해 기어이 금지된 무기를 꺼내 든 것이다.
‘광자 어뢰(Photon Torpedo).’
물리적인 폭탄이 아니었다. 양자 컴퓨터를 이용해 네트워크의 기저 대역(Baseband)에 무한에 가까운 노이즈를 발생시켜, 디지털 신호 자체를 ‘상쇄 간섭’으로 소멸시키는 무기.
“미친놈들...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다 태워? 서울 전체를 마비시켰어?”
랑정훈은 이를 갈았다. 이것은 김서연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키텍츠’의 안방인 서울에서 그들의 통제력을 무력화시키고, ‘오라클’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한 ‘리바이어던’의 기습적인 선전포고였다. 김서연은 그 고래 싸움에 낀 새우, 아니 운 좋은 변수에 불과했다.
“수동으로 전환해! 조명탄 쏴! 놈들이 어둠을 틈타 도망치게 두지 마!”
랑정훈의 육성이 어둠 속에서 메아리쳤다.
[ 지하 3층 배수로 - B-7 구역 ]
“...3시 방향... 쇠사슬...”
김서연은 벽을 더듬었다. 손끝에 차갑고 녹슨 쇠사슬의 감촉이 닿았다. 무전기 속 목소리가 말한 그대로였다.
“찾았어요.”
그녀가 쇠사슬을 잡아당기자, 벽인 줄 알았던 콘크리트 블록의 일부가 덜컹거렸다. 위장막이었다. 그 뒤로 성인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와, 아래로 향하는 낡은 나선형 계단이 나타났다.
“이런 게... 지도에는 없었는데...”
최진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김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라클’은 모든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오라클’이 수집하는 데이터는 디지털화된 기록들이다. 만약 이 통로가 디지털화되기 전, 수십 년 전의 종이 도면에만 존재하고 실전된 곳이라면? 혹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데이터베이스에서 삭제한 곳이라면?
“‘오라클’의 사각지대예요. 빨리요.”
그들은 이강혁을 부축해 좁은 통로로 들어갔다. 나선 계단은 끝도 없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무전기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계단을 따라 40미터 하강... 지하수 소리가 들리면 멈춰라... 그곳에 배가 있다... ]
“배라고요?”
최진아가 되물었지만, 무전기는 지직거리는 잡음만 토해낼 뿐이었다.
그들은 어둠 속을 맴돌며 내려갔다. 김서연의 체력은 한계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위쪽에서는 랑정훈의 고함 소리와 함께 붉은색 조명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솨아아-’ 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지하 암반수 층이었다.
계단이 끝나고 작은 선착장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정말로, 낡은 고무보트 한 척이 매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들이 올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보트 안에는 방수포에 싸인 구급상자와 손전등, 그리고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쪽지에는 아무런 설명 없이, 손으로 그린 투박한 지도 한 장과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 운명은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
문구 아래에는 ‘커스토디안’을 상징하는 낡은 펜촉 문양이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이들이... 우릴 도와주는 건가요?”
최진아가 구급상자를 열며 물었다. 안에는 이강혁에게 절실히 필요한 에피네프린 주사와 혈액 팩이 들어 있었다.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김서연은 이강혁을 보트에 눕히며 말했다.
“그저... 균형을 맞추려는 거예요. ‘아키텍츠’가 너무 강해지니까, 우리라는 돌멩이를 저울 반대편에 올려놓은 거죠.”
그녀는 보트의 밧줄을 풀었다.
“가요. 물살이 우릴 밖으로 데려다줄 거예요.”
보트는 어둠 속의 지하수를 타고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뒤편에서 ‘새니테이션’ 팀의 발소리가 계단을 타고 울려 퍼지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이미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 서울 외곽, 한강 하류 갈대숲 - H-Hour + 09:00 ]
아침 해가 떠올랐지만, 도시는 여전히 혼란 속에 잠겨 있었다. 전력망은 복구되었지만, 통신망과 데이터 서버들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리바이어던’의 광자 어뢰가 남긴 후유증이었다.
갈대숲 사이에 숨겨진 배수구에서 고무보트 하나가 조용히 빠져나왔다.
김서연과 최진아는 탈진한 채 갈대밭 위로 쓰러졌다. 이강혁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지만, 에피네프린 덕분에 호흡은 한결 안정되어 있었다.
“...살았어.”
최진아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매연 섞인 서울의 하늘이 이렇게 아름다워 보인 적이 없었다.
김서연은 몸을 일으켜 도시 쪽을 바라보았다. 강 건너 상암동 쪽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도심 곳곳에서 사이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결과를 보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시작한 전쟁의 서막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헬멧에서 빼낸 데이터 모듈을 꽉 쥐었다.
“이제 시작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지만,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빛났다.
“우린 살아남았고, 무기를 손에 넣었어요. 이제 우리가 그들을 사냥할 차례예요.”
그녀는 최진아를 돌아보았다.
“이강혁 씨를 치료할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요. 그리고... 제로가 남긴 흔적을 찾아야 해요. 그가 정말 죽었는지, 아니면 어딘가에 살아있는지.”
최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낡은 폴더폰을 꺼냈다. 그녀가 가진 인맥 중, 유일하게 ‘아키텍츠’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아날로그적인 조력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여보세요? ...네, 저예요. 도움이 필요해요. 묻지 말고, 지금 당장 트럭 한 대만 보내주세요. 네, 시체... 아니, 환자가 있어요.”
전화를 끊은 최진아는 김서연에게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가죠. 아직 안 끝났으니까.”
바람이 불어와 갈대를 흔들었다. 세 사람의 모습은 이내 갈대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살아남았다. 거대 조직들의 틈바구니에서, 기계 신의 눈을 피해서.
그리고 이제 그들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단순한 도망자가 아니라, 거인들의 발목을 끊어버릴 수 있는 가장 위험한 ‘가시’가 되었다는 것을.
[ 콘클라베의 결단 ]
다시 ‘아키텍츠’의 펜트하우스.
전력은 복구되었지만, 회의실의 분위기는 더욱 침울했다. ‘오라클’의 기능은 70%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고, 복구에는 수일이 걸릴 예정이었다.
랑정훈이 흙투성이가 된 군화를 신은 채 회의실로 들어왔다.
“놓쳤습니다.”
짧은 보고였다. 변명은 없었다.
권석열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리바이어던’이 개입했어. 그리고 ‘커스토디안’의 냄새도 나더군. 낡은 하수도 통로... 기록에 없는 길이었어.”
그는 뒤를 돌아 랑정훈을 보았다.
“이건 더 이상 내부의 ‘버그 수정’ 문제가 아니야. 국제적인 전면전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추적을 계속할까요?”
“아니.”
권석열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그들을 쫓는 건 무의미해. 그들은 숨었고, 다른 조직들이 그들을 보호할 거야. 게다가 ‘오라클’이 회복될 때까지 우린 눈먼 장님이나 다름없어.”
그는 홀로그램 테이블 중앙에 새로운 지도를 띄웠다. 부산이었다.
“그들은 결국 오게 되어 있어. 그들이 가진 데이터, 그들이 원하는 복수...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하니까.”
‘포세이돈 프로젝트’.
“병력을 부산으로 집결시켜. 서울은 미끼로 놔두고, 부산을 완벽한 요새로 만든다. 그들이 제 발로 지옥 불에 뛰어들게 만들어.”
권석열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리고... ‘아에타스’의 2단계를 조기 실행한다. ‘오라클’을 인간의 뇌와 직접 연결하는 실험.”
“위험 부담이 큽니다. 아직 안정화되지 않았습니다.” 랑정훈이 경고했다.
“상관없어. 김서연... 그녀가 ‘루멘’으로 해낸 것을 봤잖아. 인간의 직관과 기계의 연산이 결합되면, ‘리바이어던’의 광자 어뢰도 막아낼 수 있어.”
권석열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내가 직접 연결하겠다. 내가 ‘오라클’이 되고, ‘오라클’이 내가 된다. 신과 인간의 결합. 그것만이 이 난국을 타개할 유일한 길이야.”
그것은 광기였다.
김서연이 ‘하데스’를 뚫고 살아남은 시각, 권석열은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선택하고 있었다.
전쟁의 무대는 이제 서울을 떠나, 한반도의 끝, 부산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