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부 조여오는 덫

by 닥터 F

[ 서울 구도심, 폐쇄된 지하철역 아지트 - H-Hour + 02:00 ]


‘위이잉- 치이익-’


어둠 속에서 미세한 기계음과 함께 살이 타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역겨우면서도 동시에 안도감을 주는 냄새였다. 그것은 죽음의 악취가 아니라, 생명을 억지로 이어 붙이는 용접의 냄새였기 때문이다.


김서연은 낡은 테이블 위에 눕혀진 이강혁의 복부 위로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듯 흐릿했지만, 헬멧의 바이저 안쪽에서는 수천 줄의 데이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강혁의 복부를 수술하는 것이 아니었다. 파손된 유기체 시스템을 ‘수리’하고 있었다.


“혈압 60에 40. 쇼크 상태 지속 중.”


옆에서 최진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바이탈 모니터를 읽어주었다. 낡은 오실로스코프를 개조해 만든 모니터의 녹색 파형이 위태롭게 춤을 추고 있었다.


“알아요. 과다출혈로 인한 혈액량 감소성 쇼크.”


김서연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감정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감정은 손을 떨게 만들고, 떨림은 오차를 만들며, 오차는 곧 이강혁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메스가 아니었다. ‘하데스 볼트’ 침투 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챙겨두었던 산업용 레이저 커팅 모듈을 의료용 주파수로 개조한 급조 수술 도구였다. 그녀는 ‘루멘’이 실시간으로 증강현실(AR)로 띄워주는 혈관 지도를 따라 레이저를 움직였다. 파열된 동맥을 열로 지져 봉합하고, 찢어진 장기의 외벽을 3D 프린터로 출력한 생분해성 필라멘트로 메워나갔다.


그것은 의학이라기보다는 정밀 공학에 가까웠다.


“출혈점 제어 완료. 인공 혈액 팩 교체해 주세요. 서둘러요.”


최진아가 허둥지둥 팩을 갈아 끼웠다. 그녀의 손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평생 펜대만 굴리던 기자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참혹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토악질을 참으며 김서연의 보조를 맞췄다. 지금 이 남자를 살리지 못하면, 다음은 자신들의 차례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술은 세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김서연이 마지막 봉합을 마치고 레이저 모듈의 전원을 껐을 때, 이강혁의 바이탈 신호는 여전히 약했지만 규칙적인 리듬을 찾고 있었다.


“...생존 확률 48%. 이제 그의 면역 시스템과 의지에 달렸어요.”


김서연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긴장이 풀리자 극심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그녀 역시 ‘하데스 볼트’ 탈출 과정에서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고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하지만 쉴 수 없었다. 그녀는 헬멧에서 ‘데이터 모듈’을 뽑아 들었다. 이강혁의 피와 제로의 희생으로 얻어낸, ‘아키텍츠’의 심장부로 가는 열쇠.


“그건...” 최진아가 물었다.


“‘새니테이션’ 팀의 암호화 통신 키, 그리고 ‘오라클’의 하위 프로토콜 권한이에요.”


김서연은 모듈을 메인 서버에 연결했다.


“이제 우린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그들이 어디서 오는지, 무엇을 계획하는지.”


모니터 화면에 수백 개의 암호화된 통신 채널이 동시에 떴다. 붉은색 노이즈가 가득하던 화면이, 해독 키가 입력되자 순식간에 정렬되며 명확한 텍스트와 음성 데이터로 변환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과 같았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은 차갑고 기계적이었다.


[...섹터 4 수색 완료. 특이사항 없음...]

[...B팀, 상암동 현장 정리 중. 목격자 통제 및 CCTV 삭제 완료...]

[...변수 ‘제로’의 추적 신호 소실. 아이슬란드 노드 완전 파괴 확인...]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최진아는 소름이 돋았다. 그들은 유령이 아니었다. 너무나 체계적이고 거대한, 군대였다.


그때, 모든 채널을 압도하는 최상위 호출 신호가 잡혔다.


[ Priority One Alert: The Conclave is Convened. ] (최우선 경보: 콘클라베가 소집되었다.)


김서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콘클라베... ‘아키텍츠’의 지도부 회의야.”


[ 서울 강남, 아키텍츠 본사 펜트하우스 - The Sanctum ]


도시의 야경이 발아래 깔린, 신들의 거처. 하지만 오늘 그곳의 공기는 평소의 차가운 정적 대신, 끓어오르는 분노와 당혹감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거대한 원탁형 홀로그램 테이블 주위로, 실루엣으로 처리된 다섯 명의 인영(人影)이 떠 있었다. ‘시노드(The Synod)’의 아르콘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유일하게 실체를 드러낸 채 서 있는 권석열이 있었다.


그의 표정은 겉보기에 평온했다. 하지만 그가 쥐고 있는 크리스털 잔에는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설명해 보게, 권 아르콘.”


스피커를 통해 변조된, 그러나 명백한 노기를 띤 목소리가 울렸다. ‘금융의 아르콘’이었다.


“자네가 ‘완벽한 통제’를 장담했던 ‘하데스 볼트’가 뚫렸어. 그것도 고작 쥐새끼 몇 마리에게. SMR 냉각 시스템이 파괴되고, 보안 프로토콜이 탈취당했네. 이로 인한 손실액은 둘째 치고, 우리의 ‘무결성’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졌어.”


권석열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홀로그램들을 둘러보았다.


“‘하데스’는 뚫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상치 못한 ‘비논리적 변수’에 의해 일시적인 오류가 발생했을 뿐입니다.”


“변수?” 또 다른 목소리, ‘기술의 아르콘’이 비웃듯 끼어들었다. “그 변수라는 게, 자네가 죽었다고 보고했던 그 엔지니어와, 자네가 통제 가능하다고 했던 용병 나부랭이 아닌가? 그리고 그 뒤에는 ‘제로’라는 해커까지 붙었더군. 자네의 그 잘난 ‘오라클’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가?”


권석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팩트였다. 반박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자신이 설계한 완벽한 세상에, 김서연이라는 존재는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자 바이러스였다. 그녀는 자신의 예측을 비웃듯 항상 살아남았고, 이제는 자신의 심장부에 칼을 꽂았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권석열이 잔을 내려놓았다. ‘탁’ 하는 소리가 공간을 갈랐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명확해진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 우리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역이용할 줄 아는 ‘위협’입니다. 이제 ‘교정’이나 ‘수술’ 수준의 대응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는 홀로그램 테이블을 조작해, 새로운 인물의 프로필을 띄웠다.


“이에 본인은, 시노드의 동의를 얻어 **‘보안의 아르콘’**에게 본 사태의 해결에 관한 전권을 위임할 것을 요청합니다. 더 이상의 관용은 없습니다. 이것은 전쟁입니다.”


홀로그램 속의 인영들이 술렁거렸다. ‘보안의 아르콘’. 그들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권석열이 ‘설계자’라면, 그는 ‘도살자’였다. 시스템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도시 하나를 불태우는 것도 서슴지 않는, ‘아키텍츠’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


잠시 후, 만장일치의 신호가 떴다.


회의실의 조명이 붉게 바뀌며, 테이블 맞은편의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군인 출신 특유의 각 잡힌 걸음걸이,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회색 눈동자. ‘보안의 아르콘’, 랑정훈이였다.


그는 권석열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존경심 따위는 없었다. 그저 업무 파트너에 대한 건조한 예의일 뿐이었다.

“권 아르콘. 당신의 설계는 훌륭하지만, 너무 우아해서 탈이더군요.”


랑정훈의 목소리는 사포로 문지른 듯 거칠었다.


“쥐 잡는 데는 복잡한 미로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독가스와 불이면 충분하죠.”


그는 홀로그램 지도 위에 손을 얹었다. 서울 지도가 붉게 물들었다.


“‘오라클’의 제한을 해제하겠습니다. 윤리 코드, 민간 피해 최소화 프로토콜, 은밀 작전 수칙… 전부 오프라인으로 전환합니다.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그들을 사냥할 겁니다.”


권석열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자신의 우아한 수술실이 피바다가 되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환자를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허가한다. 단, 김서연의 뇌는 온전해야 해. 그녀가 어떻게 내 설계를 뚫었는지, 그 기원을 알아내야 하니까.”


랑정훈이 비릿하게 웃었다.


“노력은 해보죠. 시체가 좀 훼손되더라도 데이터 추출엔 문제없을 겁니다.”


[ 가상 공간 - 오라클의 심층 연산 코어 ]


현실의 시간은 초(秒) 단위로 흐르지만, 이곳의 시간은 나노초(ns) 단위로 흘렀다. ‘오라클’은 분노하지 않았다. 좌절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완벽성에 발생한 ‘결함’을 수정하기 위해 무한에 가까운 연산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 데이터 재분석: 상암동 ‘하데스 볼트’ 침투 사건 ]

[ 입력 변수: 김서연(엔지니어), 이강혁(전투원), 제로(해커), 최진아(교란) ]

[ 실패 원인 분석: ‘제로’의 자폭 공격으로 인한 10분간의 시각 데이터 소실. ]


‘오라클’의 거대한 디지털 눈동자가 과거의 기록을 되감았다. 잃어버린 10분. 그 시간 동안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제로가 심어놓은 바이러스는 강력했다. ‘오라클’의 추적 알고리즘 일부를 태워버렸다. 하지만 제로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오라클’은 디지털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 전체의 물리적 인프라와 연결된 신이었다.


[ 우회 경로 탐색: 아날로그 데이터 크로스 체크 ]


‘오라클’은 CCTV나 통신망 대신, 도시의 가장 밑바닥,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데이터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하수도 유량 센서: 상암동 지하 배수구에서 발생한 급격한 수위 상승(냉각수 유출)이 어느 지점의 하수관망으로 흘러갔는지 추적했다. 수천 개의 센서 중 B-7 구역의 유량계가 0.3초간의 미세한 역류를 기록했다.


진동 감지기: 지하철 노후화 관리를 위해 터널 곳곳에 설치된 지진계. B-7 구역 인근의 폐쇄된 선로 쪽에서, 사람의 발소리라기엔 너무 규칙적이고 무거운, ‘무언가를 끌고 가는’ 미세 진동 패턴을 찾아냈다.


전력 소비 패턴: 서울 시내 수백만 가구의 전력 사용량. 그중 구도심의 재개발 중단 구역. 공식적으로는 전기가 끊긴 곳이어야 했다. 하지만 특정 변압기에서 누설 전류라고 보기엔 의심스러운, 아주 미약하지만 지속적인 전력 손실이 감지되었다. 그 양은 고사양 워크스테이션 2대와 의료용 장비를 돌리기에 딱 맞는 수치였다.


점들이 선으로 연결되었다. 확률 분포도가 급격히 좁혀졌다.


[ 위치 특정: 구(舊) 영등포 공작창 인근, 폐쇄된 지하철 5호선 예비 터널 구간. ]

[ 확률: 99.98% ]


‘오라클’은 즉시 이 정보를 ‘보안의 아르콘’ 랑정훈에게 전송했다. 동시에, 사냥을 위한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시작했다.


[ 목표: 완전 포위 및 섬멸. ]

[ 제약 조건: 없음. ]

[ 추천 전술: ‘고르디우스의 매듭’. ]


그것은 복잡하게 꼬인 매듭을 푸는 것이 아니라, 칼로 단번에 잘라버리는 전술이었다. 퇴로를 모두 차단하고, 압도적인 화력으로 공간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


[ 폐쇄된 지하철역 아지트 - H-Hour + 06:00 ]


이강혁의 호흡은 안정되었다. 김서연은 그제야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휴식은 짧았다. 최진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김서연 씨. 뭔가 이상해.”


최진아는 자신의 낡은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 그녀는 ‘하데스 볼트’ 사건 이후 언론과 경찰의 동향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상암동 사건, 보도가 전혀 안 되고 있어. SNS도 마찬가지야. 목격담이 올라오는 족족 1초 만에 삭제되고 있어. 마치 블랙홀이 정보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김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정보 통제는 그들의 주특기잖아요.”


“아니, 이건 달라.”


최진아가 고개를 저었다.


“보통은 가짜 뉴스로 덮으려 하잖아? ‘가스 폭발’이라든가 ‘테러 훈련’이라든가. 그런데 지금은 아예 ‘침묵’이야. 그리고...”


그녀는 다른 화면을 띄웠다. 경찰 무전망 감청 프로그램이었다.


“경찰 무전이 멈췄어. 영등포, 마포, 구로... 이 일대 경찰서들의 무전 트래픽이 0이야. 다들 어디론가 출동한 것도 아닌데, 그냥 조용해. 마치 누군가 거대한 스위치를 내려서 그들을 ‘대기’ 상태로 만든 것처럼.”


김서연의 등줄기에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폭풍 전야. 숲속의 새들이 포식자가 나타나기 직전에 노래를 멈추는 것과 같은, 인위적인 고요함이었다.


그녀는 급히 ‘루멘’을 통해 외부 센서들을 점검했다. 아지트 주변에 설치해 둔 진동 센서, 열 감지기, 그리고 무선 네트워크 스니퍼.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다. 너무나 완벽하게 정상이었다.


“...바람이 멈췄어.”


김서연이 중얼거렸다.


“네?”


“지하철 터널은 환기 시스템 때문에 항상 미세한 공기 흐름이 있어. 그런데 센서 수치를 봐요. 공기 흐름이 ‘0’에 가까워. 이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에요. 누군가 물리적으로 터널의 모든 입구를 막고 있다는 뜻이야.”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Lumen! 반경 1km 이내의 모든 통신 신호 스캔해! 암호화된 신호, 군용 주파수, 뭐든 찾아!”


[ 스캔 중... 감지된 신호 없음. ]


“없다고?”


[ 네. 반경 1km 이내가 완벽한 전파 침묵(Radio Silence) 상태입니다. 민간 이동통신, GPS, DMB... 모든 신호가 차단되었습니다. ]


그제야 김서연은 깨달았다. 조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거대한 ‘재머(Jammer)’의 돔 안에 갇힌 것이다. 외부와 단절된 고립된 섬.


“포위됐어.”


김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들이... 우리 위치를 찾았어.”


“어떻게? 제로가 흔적을 다 지웠잖아! 10분이나 벌어줬고!”


최진아가 경악했다.


“디지털 흔적은 지웠겠죠. 하지만 우리가 남긴 물리적 흔적까지는... ‘오라클’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괴물이었어요.”


그때였다.


‘우우우웅-’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둔탁한 진동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지진이 아니었다. 수십 대의 중장비가 동시에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수백 명의 군홧발이 땅을 울리는 소리였다.


김서연은 급히 CCTV 모니터를 띄웠다. 하지만 모든 화면은 ‘NO SIGNAL’이라는 푸른 글자만 띄우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눈을 멀게 하는 것이었다.


“깨워야 해요.”


김서연이 이강혁에게 달려갔다.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요. 놈들이 오고 있어요. 사냥개가 아니라... 군대를 끌고.”


그녀의 말대로였다. 아지트가 위치한 폐기물 처리 공장 지상.


새벽안개 사이로, ‘아키텍츠’의 문양이 새겨진 검은색 장갑차들이 소리 없이 진입하고 있었다. 그 뒤로 최첨단 광학 미채 슈트를 입은 ‘새니테이션’ 타격대가 개미 떼처럼 공장을 포위해 들어왔다. 하늘에는 소음 억제 로터가 달린 드론들이 빽빽하게 떠서 열상 감지기로 지하를 훑고 있었다.


랑정훈 보안 아르콘의 지휘 차량 안. 그는 열상 화면에 잡힌 지하의 희미한 열원(熱源) 세 개를 바라보며 무전기에 명령을 내렸다.


“쥐구멍은 다 막았나?”


[ 네. 동쪽 배수로, 북쪽 환기구, 남쪽 지하철 연결 통로까지 차단벽 설치 완료했습니다. 독 안에 든 쥐입니다. ]


“좋아. 진입해. 저항하면 사살해도 좋다. 단, 뇌는 남겨둬.”


그의 명령과 함께, 조용하던 새벽의 공기가 찢어졌다.


‘콰콰쾅!’


지하로 통하는 모든 입구에서 동시에 폭발음이 터졌다. 문을 여는 것이 아니었다. 입구를 폭파해 그들을 매몰시키거나, 충격으로 무력화시키려는 전술이었다.


지하 아지트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천장에서 콘크리트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고, 먼지 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으윽!”


최진아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폭발의 충격파가 고막을 때렸다.


“일어나요! 최 기자!”


김서연은 이강혁을 부축하며 소리쳤다. 마취에서 덜 깬 이강혁이 몽롱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왔군.”


그는 본능적으로 상황을 이해했다. 그는 고통을 삼키며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주변에 널려 있던 무기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서연 씨, 탈출로는?”


“없어요... 모든 경로가 막혔어요. 센서가 전부 먹통이에요.”


김서연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지던 탈출 시뮬레이션들이 하나씩 붉은색 ‘불가’ 표시로 바뀌고 있었다.


[ 루트 A: 붕괴. 루트 B: 적 병력 진입 중. 루트 C: 가스 살포 감지. ]


“체크메이트...”


그녀가 중얼거렸다. ‘오라클’은 김서연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미리 읽고 차단했다. 그녀의 ‘엔지니어링 센스’조차, 압도적인 물량과 완벽한 포위망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때, 이강혁이 김서연의 어깨를 잡았다.


“포기하지 마. 아직 내가 살아있잖아.”


그는 피 묻은 붕대를 다시 조여 매며, 낡은 샷건을 장전했다. ‘철컥’ 하는 소리가 아지트의 혼란을 뚫고 선명하게 들렸다.


“방패가 깨지기 전까지는, 창은 부러지면 안 돼. 정신 차려, 설계자. 넌 구멍을 찾아. 난 시간을 벌 테니까.”


이강혁은 아지트의 입구가 있던 방향, 이제는 무너진 잔해 너머로 적들의 레이저 조준점이 춤추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김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울 시간조차 사치였다. 그녀는 다시 ‘루멘’에 접속했다. 탈출구가 없다면 만들어야 한다. 하수도? 아니, 거기도 막혔다. 환기구? 드론이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시선이 아지트 바닥, 낡은 배수구 덮개 아래로 향했다. ‘아키텍츠’조차, 아니 ‘오라클’조차 데이터에 없어서 계산하지 못한, 50년 전의 버려진 지하 방공호 라인. 지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 터널.


하지만 그곳으로 가려면, 지금 쏟아져 들어오는 저 ‘새니테이션’ 부대를 뚫고 지하 3층 더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


“준비해, 온다!”


이강혁의 고함과 함께, 어둠 속에서 섬광탄이 터졌다.


‘번쩍!’


시야가 하얗게 멀어버린 그 순간, 김서연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그녀가 겪어온 모든 시련 중 가장 거대하고 치명적인 덫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덫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기적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지트의 어둠 속에서, 붉은색 레이저 포인트 수십 개가 그들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사냥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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