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Hour: 03:28:15 ]
복도 저편에서 울려 퍼지는, 정제된 분노가 담긴 군홧발 소리. 그것은 조금 전 경기장으로 향했던 어수선한 병력의 소리가 아니었다. 완벽하게 통제된, 오직 파괴만을 위해 움직이는 엘리트들의 발소리였다. ‘새니테이션’ 정예팀. ‘오라클’이 마침내 기만의 연극을 간파하고, 자신의 심장부를 지킬 최후의 면역체계를 보낸 것이다.
“젠장!”
이강혁이 으르렁거렸다. 그들의 시간은 초 단위로 증발하고 있었다.
김서연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잊힌 기억을 따르듯, 수동 오버라이드 패널의 회로를 짚었다. 그녀의 뇌가 아닌, 그녀의 몸이, 그녀의 ‘루멘’ 시스템이 이 기계의 언어를 기억하고 있었다.
‘…엔지니어의 마지막 열쇠…’
그녀가 특정 회로를 차단하고, 다른 회로를 직렬로 연결하자, ‘오라클’의 통제에서 벗어난 아날로그 신호가 서버실의 육중한 문을 움직였다.
‘콰아아아-’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완벽한 금속 벽처럼 보였던 문이 이음새를 드러내며 옆으로 미끄러지듯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들을 맞이한 것은 인간의 온기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차갑고 푸른빛의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것은 서버실이 아니었다. ‘오라클’의 두뇌 단면을 떼어낸, 디지털 신의 성소(聖所)였다.
수백 개의 검은색 서버 랙이 끝없이 도열해 있었고, 그 표면을 따라 흐르는 푸른색 광섬유 케이블들이 마치 살아있는 신경망처럼 고동치고 있었다. 공기는 먼지 하나 없이 차가웠고, 오직 수만 개의 팬이 돌아가는 ‘위이이잉-’ 하는, 거대하고 단조로운 소음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들어가!”
이강혁이 김서연의 등을 떠밀어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가 문 안쪽으로 발을 딛는 순간, 복도 저편에서 ‘새니테이션’ 팀의 모습이 나타났다.
“잠가!”
김서연의 외침에, 이강혁은 문 옆의 비상 폐쇄 버튼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티타늄 합금 문이 다시 닫히며 그들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격리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들 스스로를 이 거대한 무덤 안에 가두는 행위이기도 했다.
‘쿵! 쿵! 쿵!’
문 너머에서, 닫힌 문을 두드리는 육중한 충격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간을 벌었지만, 탈출구는 사라졌다.
김서연은 이강혁을 돌아볼 틈도 없이, 자신의 헬멧에서 데이터 케이블을 뽑아 들어 가장 가까운 메인 프레임의 인터페이스 포트에 꽂았다.
“제로! 연결됐어! 지금부터 내부 방화벽, ‘케르베로스’를 뚫어야 해!”
[ Zero ]: …Nice panel trick. (멋진 패널 쇼였어.) 이제 진짜 파티를 시작해 보실까.
김서연의 헬멧 바이저에, ‘케르베로스’의 3중 방화벽 구조가 입체적으로 펼쳐졌다. 그것은 제로가 ‘살아있는 미로’라고 표현했던 박선우의 외장 하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짜 괴물이었다.
“첫 번째 벽은 내가 맡을게. 이건 물리적 구조 기반이야. 이 서버실의 냉각 시스템과 연동되어 있어. 내가 열효율 오차를 역으로 계산해서 가상 오버히트 신호를 보낼 테니, 그 틈을 뚫고 들어가!”
“제로! 두 번째, 세 번째 벽은 당신 거야!”
[ Zero ]: 맡겨두라고. 신의 멱을 따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까.
김서연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녀의 뇌가 ‘루멘’ 시스템을 통해 ‘하데스’의 냉각 시스템에 접속했다.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이 속삭이는 대로, 0.017%의 오차를 증폭시켜 거짓 데이터를 만들어냈다.
순간, ‘케르베로스’의 첫 번째 방화벽이 시스템 오류로 판단하고, 0.5초간 비상 점검 모드로 전환되었다.
[ Zero ]: Gotcha! (잡았다!)
제로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수천 줄의 코드를 쏟아부으며 두 번째 방화벽을 무력화시켰다.
‘쿵! 쿵! 콰아앙!’
그때, 서버실의 문이 안쪽으로 휘어질 듯한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새니테이션’ 팀이 플라스마 절단기를 작동시킨 것이다. 문 중앙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강혁 씨!”
“알고 있어!”
이강혁은 문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총구를 문에 고정했다. 그는 이 문이 얼마나 버틸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임무는 문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문이 뚫린 ‘이후’의 시간을 버는 것. 그것이 그가 이 팀에서 맡은 ‘방패’의 역할이었다.
김서연의 바이저에, 마침내 데이터 다운로드 창이 떠올랐다.
[ DATA PACKAGE: ‘SANITATION’ ENCRYPTION KEY / ‘ORACLE’ SUB-PROTOCOL ACCESS ] [ EST. TIME: 4 MINUTES 00 SECONDS ]
“4분!” 김서연이 절박하게 외쳤다. “4분만 버텨줘요!”
[ 3 MINUTES 59 SECONDS ]
“4분이라.” 이강혁은 쓴웃음을 삼켰다. 지옥에서 4분은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콰아아아아!’
플라스마 절단기가 문을 꿰뚫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시뻘건 불꽃이 문 중앙에서 뿜어져 나왔다.
“제로! 저놈들 소리 때문에 집중이 안 돼!” 김서연이 외쳤다.
[ Zero ]: 나도 마찬가지야! ‘오라클’이 정신 차렸어. 놈이 내 뒤를 쫓기 시작했어! 제기랄, 이 녀석… 미쳤잖아!
제로의 디지털 전쟁터도 지옥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라클’은 더 이상 도시의 혼란에 속지 않았다. 초지능의 모든 연산력이 ‘하데스 볼트’의 침입자, 그리고 그 침입자를 돕는 ‘제로’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제로가 만들어낸 수천 개의 가상 IP와 프록시 서버들이, ‘오라클’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3 MINUTES 00 SECONDS ]
‘쿠-콰콰쾅!’
육중한 굉음과 함께, 플라스마로 잘려나간 문 중앙의 원형 조각이 서버실 안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이강혁은 이미 그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잘려나간 구멍 너머로, 검은색 전술 헬멧을 쓴 ‘새니테이션’ 정예팀의 붉은색 바이저가 섬뜩하게 빛났다.
“지금부터다.”
이강혁은 구멍을 향해 K7 기관단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타!’ 소음기가 장착된 총구가 불을 뿜었지만, 총성은 서버실의 거대한 팬 소음에 묻혔다.
“크윽!”
총알이 적중했지만, 정예팀의 강화 아머는 7.62mm탄을 튕겨냈다. 그들은 잠시 주춤했지만, 구멍 너머에서 즉각적인 응사가 시작되었다.
‘피융! 피융!’
서버 랙을 뚫고 지나가는 고출력 에너지탄. 그들의 무기는 단순한 화기가 아니었다.
“이강혁 씨!”
“신경 쓰지 마! 다운로드에만 집중해!”
이강혁은 서버 랙 사이를 구르며,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좁은 문을 통과하려는 적들을 향해, 그는 자신의 모든 전투 기술을 쏟아부었다. 그는 방패였고, 지금은 그 방패가 적들의 진입을 막는 유일한 성문이었다.
[ 2 MINUTES 00 SECONDS ]
“제로! 다운로드 속도가 느려! ‘오라클’이 대역폭을 조이고 있어!”
“빌어먹을! 놈이 내 메인 서버의 위치를 거의 다 파악했어!”
제로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의 익명성은 그의 생명이었다. ‘오라클’의 추적은 그의 디지털 존재 자체를 지워버릴 수 있는 위협이었다.
“젠장, 젠장!”
이강혁의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가 엄폐하고 있던 서버 랙이 에너지탄에 맞아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구멍을 통해 진입한 정예팀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타앙!’
이강혁이 먼저 쐈다. 헬멧 바이저에 정확히 맞았지만, 적은 쓰러지지 않았다. 동시에 적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크헉…!”
이강혁의 몸이 뒤로 크게 튕겨 나갔다. 방탄복이 뚫리지는 않았지만, 그 충격으로 갈비뼈가 부러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그가 균형을 잃고 쓰러진 찰나, 두 번째 총알이 날아왔다.
‘퍽!’
이번에는 방탄복이 막아주지 못했다. 방탄복과 방탄판 사이의 가장 취약한 지점. 탄환은 그의 왼쪽 복부를 그대로 관통했다.
“강혁 씨!”
김서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운로드 게이지는 50%를 겨우 넘기고 있었다.
이강혁은 쓰러진 채, 피가 쏟아지는 옆구리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거대한 팬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권총을 들어, 여전히 구멍을 통해 진입하려는 적들을 향해 힘겹게 방아쇠를 당겼다.
“아직… 안 죽었어… 이 개자식들아…”
하지만 그의 저항은 눈에 띄게 약해져 가고 있었다.
[ 1 MINUTE 00 SECONDS ]
“안 돼… 안 돼, 강혁 씨!”
김서연은 패닉에 빠졌다. 그녀의 눈앞에서, 그녀의 유일한 방패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는 다운로드를 중단하고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움직이면, 이 모든 희생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뇌리에, 지하 18미터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또다시 눈앞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건가.
[ Zero ]: …Shit. (…젠장.)
제로의 낮은 탄식이 들려왔다.
[ Zero ]: 나 잡혔어. (I'm exposed.)
‘오라클’이 마침내 제로의 본진 서버가 위치한 아이슬란드의 데이터 센터를 특정해냈다. ‘아키텍츠’의 글로벌 ‘새니테이션’ 팀이 그곳으로 향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 Zero ]: 이봐, 엔지니어. (Hey, engineer.)
제로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차분해져 있었다.
[ Zero ]: 네 그 ‘친구’ 양반, 시간 다 벌었어. 이젠 내 차례야.
“제로, 무슨…!”
[ Zero ]: '오라클'이 날 잡으러 오는 문을 열었더군. 그럼 나도 선물을 줘야지. 내 모든 걸 걸고, 놈의 뇌 속에 바이러스 하나를 심어주겠어. 30초. 그게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전부야.
“안 돼! 그럼 당신은!”
[ Zero ]: 시끄러워! 난 내 서명을 새기러 온 거야! 신의 뇌에 0을 새기는 것만큼 멋진 서명이 또 어딨겠어! 데이터나 챙겨!
제로는 자신의 모든 익명성을 포기했다. 그는 자신을 보호하던 모든 방화벽을 역으로 개방하고, ‘오라클’의 추적 경로를 타고 역으로, 초지능의 심장부를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디지털 카미카제 공격을 감행했다.
‘오라클’의 시스템이 일순간 마비되었다. 예상치 못한 바이러스의 침투. 초지능의 연산력이 제로를 제거하는 것에서, 자신의 시스템을 방어하는 것으로 급격하게 전환되었다.
김서연의 눈앞에서, 다운로드 게이지가 미친 듯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80%... 90%...
[ 0 MINUTES 10 SECONDS ]
“으아아아!”
이강혁이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쓰러진 서버 랙의 케이블을 잡아당겼다. 랙 하나가 위태롭게 기울어지며, 문을 통해 들어오려던 정예팀 한 명을 덮쳤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의 손에서 권총이 떨어져 나갔다. 그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98%... 99%...
김서연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쓰러진 이강혁과, 침묵에 빠진 제로의 채널, 그리고 100%를 향해 기어가는 다운로드 바를 번갈아 보았다.
[ DOWNLOAD COMPLETE ]
[ 0 MINUTES 00 SECONDS ]
‘콰아아아앙!’
마침내, 이강혁이 마지막으로 무너뜨린 장애물이 치워지고, 서버실의 파괴된 문으로 ‘새니테이션’ 정예팀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총구가 일제히, 데이터 케이블을 뽑아 들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김서연을 향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데이터는 확보했지만, 그들은 이 지옥의 성소에 갇혔다.
김서연은 자신을 겨눈 총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쓰러진 이강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뇌리에, 지하 18미터에서 느꼈던 극한의 공포가 아닌, 파이트 클럽에서 탈출로를 설계했던 그 차가운 ‘엔지니어링 센스’가 번개처럼 깨어났다.
그녀의 시선이 서버실 천장을 가로지르는, SMR의 비상 전력이 흐르는 거대한 고압 전력 케이블과, 바닥을 적시고 있는 냉각수 배관으로 향했다.
“강혁 씨…”
그녀는 데이터 모듈을 자신의 헬멧 슬롯에 삽입하며, 쓰러진 이강혁을 향해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우리가 들어온 문은… 이제 없어.”
그녀는 이강혁을 부축하려 애쓰며, 정예팀을 향해 낮게 속삭였다.
“하지만, 나갈 문은… 지금부터 내가 만들 거야.”
그녀의 손이 허리춤에 매달아 두었던, 그녀가 직접 만든 소형 플라스마 토치를 움켜쥐었다. ‘하데스 볼트’의 심장부에서, 그녀의 진짜 반격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