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Hour: 03:29:10 ]
시간이 멈췄다.
아니, 시간은 초고속으로 압축되었다. 김서연의 뇌리에, 1초가 100만 개의 프레임으로 쪼개져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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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바이저에 뜬 녹색 글자는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옥의 다음 막이 올랐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콰앙!’
서버실의 파괴된 문으로 ‘새니테이션’ 정예팀의 검은 군화가 첫발을 내디뎠다. 그들의 붉은색 광학 센서가 방 안의 두 생명체를 포착했다. 한 명은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그 옆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완벽한 제압 시나리오.
팀 리더가 에너지 라이플의 총구를 김서연에게 겨누며, 헬멧의 스피커를 통해 기계적으로 변조된 음성을 내뱉었다.
“변수 ‘김서연’. 모든 저항을 멈춰라. 생포 프로토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서연이 움직였다.
그녀는 쓰러진 이강혁을 향해 달려간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방패 삼아 그 뒤편, 벽면을 타고 흐르는 SMR의 거대한 고압 전력 케이블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손에는 이강혁의 플라스마 절단기가 아닌, 그녀가 원래 가지고 있던 소형 플라스마 토치가 폄켜 있었다.
“우리가 들어온 문은… 이제 없어.”
그녀는 피 흘리는 이강혁을 내려다보며, 그러나 ‘새니테이션’ 팀을 향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있지 않았다. 그것은 텅 빈 기억 속에서 막 깨어난, 지독하게 차가운 분노와 광기 어린 환희가 뒤섞인, ‘창조주’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갈 문은… 지금부터 내가 만들 거야.”
그녀는 토치의 점화 스위치를 눌렀다. ‘쉬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불꽃이 10센티미터 길이로 뿜어져 나왔다.
팀 리더가 방아쇠를 당기려던 찰나, 김서연은 그 불꽃을 ‘새니테이션’ 팀이 아닌, 자신의 머리 위, 고압 케이블의 두꺼운 절연 피복에 가져다 댔다.
그것은 자살 행위처럼 보였다.
“미쳤…!”
팀 리더의 외침은 공허했다. 김서연의 목표는 케이블을 자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뇌가 속삭이는 대로, 정확히 3초간, 케이블의 피복만을 태워 내부의 전도체를 노출시켰다.
[ H-Hour: 03:29:15 ]
‘파지지지직!’
수만 볼트의 전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노출된 케이블에서 가장 가까운 도체(導體)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그 도체는 바로 그들 발밑에 있었다.
‘하데스 볼트’의 심장부를 식히기 위해 순환하는 차가운 ‘냉각수’.
이강혁이 절단기로 뚫었던 문에서 흘러나온 냉각수는, 이미 서버실 바닥 전체를 얇은 수막(水膜)으로 덮고 있었다.
“안 돼…!”
팀 리더는 늦게나마 그녀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는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물리학의 법칙은 ‘오라클’의 명령보다 빨랐다.
‘콰아아아아아아-!’
노출된 고압 전류가, 서버 랙의 금속 프레임을 타고, 바닥의 냉각수를 통해, 서버실에 서 있던 모든 ‘새니테이션’ 팀의 전도성 강화 아머로 흘러 들어갔다.
그것은 총성이 아니었다. 천둥이었다. 서버실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아크 방전로(Arc Furnace)가 되었다.
“크아아아악!” “가아악!”
완벽한 훈련을 받은 정예팀은 자신들의 최첨단 장비 안에서 속수무책으로 타들어갔다. 그들의 강화 아머는 방패가 아닌, 전기의자가 되었다. 붉은색 광학 센서가 스파크를 튀기며 터져 나갔고, 과전류를 견디지 못한 내부 시스템이 폭발하며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그들은 총 한 발 쏘지 못하고, 자신들이 지키려 했던 신의 제단 위에서 끔찍한 제물이 되었다.
서버실의 조명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SMR의 비상 전력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으면서, ‘하데스 볼트’는 암흑과 정적에 휩싸였다. 오직 타버린 회로와 살점이 타는 역겨운 냄새만이, 김서연이 방금 저지른 일의 결과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충격의 여파로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냉각수가 닿지 않는, 절연 처리된 케이블 더미 위에 정확히 몸을 던진 후였다. 모든 것이 그녀의 계산대로였다.
[ H-Hour: 03:29:45 ]
암흑 속. ‘위이잉-’ 하던 거대한 팬 소음이 멎자, 서버실에는 이강혁의 거친 숨소리와 그녀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울렸다.
“강혁 씨! 이강혁 씨!”
김서연은 헬멧의 비상 조명등을 켰다. 희미한 불빛이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이강혁을 비췄다. 그는 간신히 눈을 뜨고 있었지만,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 하아…”
그가 피 섞인 숨을 내뱉었다.
“당신… 정말… 미친년이군…”
“칭찬으로 들을게요.”
김서연이 그의 상처를 살폈다. 복부 관통상. 과다출혈. 현장에서 조치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버텨요. 여기서 죽게 안 둬.”
그녀는 데이터 모듈을 자신의 헬멧 슬롯에 단단히 삽입했다. 승리의 전리품이었다. 그리고 이제, 퇴각로를 확보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지졌던 고압 케이블과, 그 바로 옆의 냉각수 주 배관이 연결된 벽면을 바라보았다. 플라스마 토치와 고압 전류의 열기가 콘크리트 벽을 이미 한계까지 몰아붙인 상태였다. 벽면에는 거미줄처럼 거대한 균열이 가 있었다.
“우리가 만들 ‘문’이에요.”
그녀는 이강혁의 허리춤에 남아있던 마지막 C4 소형 폭약을 떼어냈다. 침투를 위해 가져왔지만, 쓸 일이 없었던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녀는 폭약을 균열의 가장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막아요!”
그녀는 쓰러진 ‘새니테이션’ 팀원의 육중한 시체를 끌어다 폭약 위를 덮었다. 폭발력을 한 방향으로 집중시키기 위한, 그녀다운 방식의 탬핑(Tamping)이었다.
그녀는 이강혁을 부축해 일으켰다. 아니, 거의 끌다시피 했다. 100kg이 넘는 거구의 군인을, 그녀는 깡마른 몸으로 지탱하며 서버 랙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Lumen… 이제 내 말 들려?”
그녀가 헬멧의 통신기를 두드렸다. ‘오라클’이 제로의 바이러스와 씨름하고, ‘하데스’의 전력이 마비된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서…연… 씨…?]
이어피스에서, 잡음 섞인 최진아의 목소리가 기적처럼 들려왔다.
“최 기자! 데이터 확보! 이강혁 씨 부상! 지금 퇴로 개척 중!”
[…뭐라고? 이강혁 씨가! 젠장! 알았어. 하수도 B-7 루트에서 대기…!]
“제로… 제로는?”
[…연락 두절. 그의 모든 채널이 죽었어. 김서연 씨, 그는…]
김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애도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녀는 원격 기폭 스위치를 눌렀다.
‘쾅!’
그녀가 설치한 시체 방벽 덕분에, 폭발음은 둔탁하게 울렸다. 하지만 그 파괴력은 정확히 콘크리트 벽의 가장 약한 지점을 강타했다. ‘쿠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벽면 전체가 무너져 내리며 그들이 들어왔던 냉각수 터널로 향하는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가요!”
김서연은 이강혁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러메고, 무너진 벽의 잔해를 향해 그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 H-Hour: 03:33:00 ]
그들이 빠져나온 냉각수 터널은 지옥이었다.
고압 전류가 흘렀던 냉각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터널 전체를 뜨거운 증기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발의 충격으로 SMR의 비상 냉각 시스템이 완전히 고장 나며, 수위가 미친 듯이 차오르고 있었다.
“젠장… 젠장!”
김서연은 허리까지 차오르는 뜨거운 물속에서, 의식을 잃어가는 이강혁을 끌고 하수도를 향해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전술 헬멧의 바이저는 수증기로 뿌옇게 흐려졌고, ‘루멘’ 시스템은 과열 경고를 뿜어내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버텨요!”
그녀는 이강혁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첫 번째 ‘방패’였다. 그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파이트 클럽에서 죽었을 것이다. 비논리적이고, 비효율적인 감정. 하지만 그녀는 그 감정 때문에 움직이고 있었다.
[ Zero ]: …Ksssh… Not… dead… yet… (…아직… 안 죽었어….)
그때, 잡음 속에서 기적처럼 제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로! 당신!”
[ Zero ]: …'Oracle' is… pissed. (…‘오라클’이… 제대로 빡쳤군.) My Iceland rig is… toast. (내 아이슬란드 장비는… 날아갔어.) But I left her a… parting gift. (하지만 작별 선물은… 남겨뒀지.) 'Hades' is blind for another… 10 minutes. (‘하데스’는 앞으로… 10분간 장님이야.) Get out… of there…
그의 목소리는 다시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10분.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벌어준, 마지막 골든 타임이었다.
김서연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이강혁을 버려진 서버 랙 패널 위에 싣고, 그것을 튜브 삼아 물에 띄웠다. 그리고 자신은 그 썰매를 끌며, 그들이 잘라냈던 하수구의 구멍을 향해 필사적으로 나아갔다.
[ H-Sewer Trunk Line: 03:40:00 ]
“이쪽이야!”
마침내, 거대한 하수도 트렁크 라인의 악취 섞인 공기가 그들을 맞았다. 최진아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약속 장소인 B-7 구역의 맨홀 뚜껑을 열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 이강혁!”
최진아는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을 잃은 이강혁의 모습에 경악했다.
“시간 없어요! 끌어올려요!”
김서연과 최진아, 두 여자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이강혁의 거구를 지상으로 끌어올렸다. 그들이 맨홀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오자마자, ‘하데스 볼트’에서 터져 나온 뜨거운 냉각수가 하수도를 덮치며 거대한 증기 폭발을 일으켰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들은 그대로 삶아졌을 것이다.
[ Extraction Point Charlie: 03:45:00 ]
최진아의 낡은 통신사 점검 차량이 미친 듯이 새벽의 도로를 질주했다. 도시의 다른 편에서는 여전히 제로가 일으킨 혼란의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밴의 뒷좌석. 김서연은 이강혁의 방탄복과 전투 조끼를 찢듯이 벗겨내고, 끔찍한 총상을 확인했다. 피가 멎지 않았다.
“병원으로 가야 해! 이러다 죽겠어!” 최진아가 절박하게 외쳤다.
“안 돼요.”
김서연의 목소리는, 모든 감정이 소진된 잿더미처럼 차가웠다.
“병원에 가는 순간, 우린 5분 안에 ‘새니테이션’ 팀에게 잡혀요. 그는… 병원에서 죽을 거예요.”
그녀는 밴의 구급상자를 뒤져, 지혈대와 거즈를 꺼내 상처를 압박했다. 하지만 피는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최 기자. 아지트로 가요. 지금 당장.”
“아지트? 거긴 수술실이 없어! 당신 미쳤어?”
“내가… 수술할 거야.”
김서연의 말에, 운전대를 잡은 최진아의 손이 경악으로 떨렸다.
“뭐라고?”
“그의 상처는 내 계산 안에 있었어. 성공 확률 1.7%.”
김서연은 자신의 헬멧에서 데이터 모듈을 뽑아 들었다. ‘아키텍츠’의 심장을 열 열쇠. 피와 희생으로 얻어낸, 상처뿐인 승리의 증거였다.
“제로가 우리에게 10분을 줬어요. 이강혁 씨는 나에게 4분을 줬고. 난 그들을 실망시킬 수 없어.”
그녀는 ‘루멘’ 시스템에 접속했다. 그녀의 뇌리에, 이강혁의 총상 부위가 3D 도면처럼 펼쳐졌다. 파열된 혈관, 손상된 장기, 총알의 예상 경로.
“아지트로 가요.”
그녀는 다시 한번,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내가 요청하는 장비들을 전부 구해줘. 가장 강력한 전원 공급 장치, 3D 프린터용 의료 등급 필라멘트, 그리고… 레이저 수술 모듈이 필요해.”
그녀는 더 이상 지하 18미터에서 생존을 설계하던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그녀는 파이트 클럽에서 탈출을 설계했고, ‘하데스 볼트’에서 파괴를 설계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생명을 설계하려 하고 있었다.
밴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 뒤로, 상암동의 ‘하데스 볼트’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키텍츠’는 처음으로 그들의 심장부에 칼이 꽂히는 고통을 맛보았다.
저 멀리, 아이슬란드의 어느 데이터 센터에서는, 모든 것이 녹아내린 서버실의 모니터에 마지막 메시지가 깜빡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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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퍼레이션 그리핀’은 끝났다. 상처뿐인 승리였다. 그리고 이제, ‘오라클’의 진짜 분노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